예장(禮章)-敬
洛出神龜 天地節文
성장공사와 예장공사, 신장공사는 안내성이란 이름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백이숙제의 이제원과 후한 때의 반첩여의 시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장신궁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이 지금은 무엇을 뜻하는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짐작할 수는 있다.
신장공사부도에는 믿을 信의 言이란 글자의 머리 부분에 오로봉(五老峰)의 장신궁(長信宮)이란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33수와 21수와 12수라는 수리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4그루의 소나무와 9개의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형체의 불상이 있다. 13수의 수리구조로 도가 드러나는 것을 장신궁도가 암시하는 것이다.
다시 김자현을 통한 10만포교대명과 유찬명을 통한 10만포교대명이 어떤 관계에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청조전어(靑鳥傳語)와 백안공서(白雁貢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청조와 백안이 입에 물고 있는 서신이 곧 바른 진리이며, 글이란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유서집과 중화경이 차지하는 의미로 일단 귀착시켜 볼 수는 있다.
기러기는 신(信)의 상징인데, 편지를 서신이라 하듯이 기러기는 전령의 메시아적 의미까지 지닌다. 신장공사부도는 청조와 백안이 등장하는데, 원래 이에는 고사가 있다.
청조는 서왕모(西王母) 이야기에 등장하는 새인데, 《한무고사 漢武故事》에 의하면 “칠월 칠일 홀연히 청조가 무제(武帝)의 궁전에 날아들었는데, 동방삭(東方朔)이 말하기를 이것은 서왕모가 이곳에 온다는 소식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하였다. 청조가 서신을 물고 온다는 것은 서왕모가 온다는 소식을 가져오는 의미로 전해져 온다. 그래서 그림에서 청조는 ‘요지춘궁 청조전신(瑤池春宮 靑鳥傳信)’이라는 화제를 쓰거나 ‘청조애제 요지벽파(靑鳥哀啼 瑤池碧波)’라는 화제를 쓰기도 한다.
그러면, 흰기러기의 편지는 무슨 의미인가? 흰기러기는 ‘상림춘풍 백안전신(上林春風 白雁傳信)’이란 화제로 쓰였는데, 상림원에 봄바람 일어나니, 흰 기러기가 서신을 전한다는 뜻으로 쓰인 점에서 메신저로서의 역할은 같지만, 또 다른 소식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춘향전의 구절이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될 것으로 본다. 춘향전의 이도령과 춘향이가 이별하는 장면에 청조와 흰기러기가 등장한다.
“소매 잡고 가느니 못 가느니 이다지 섧게 우니 내 아무리 장부인들 철썩 간장 다 녹는다. 요지(瑤池)의 서왕모는 일쌍청조(一雙靑鳥) 날리어서 주(周) 목왕(穆王)께 편지 전코, 북해상(北海上) 소중랑(蘇中郞)은 기러기에 부탁하여 상림원(上林苑)에 상서하니, 백안청조(白雁靑鳥) 없을망정 남원 인편이야 없겠느냐”
夫政也者柔浦蘆也 漢水濱含蘆飛行 飛鴻得意天空濶
정사란 부드럽기가 갈대 같으니, 한수 가에 갈대꽃이 흩날리는 가을에 비홍이 득의하여 천공을 날게된다.
천지정사에서 공사도의 신장(信章)에 해당하는 기약이 36수의 3천이 마치면, 새장 속의 기러기는 더 이상 새 장속에 갇혀 있지 아니하고, 하늘을 날아오른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 드러난다는 뜻으로, 둔법으로 숨겨놓은 진법이 세상에 알려진다는 의미이다. 새장 속에 갇혀 있는 기러기와 같이 제약되고 제한된 의식에 혁명이 일어나서 장신궁의 비밀의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게 된다. 이는 혁명인 것이다.
단주수명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라는 명령이며, 이는 기러기가 전하는 혁명의 소식으로 인식의 틀을 개혁하고 세상 만방에 진리를 드러내는 일인 것이지, 단주가 무슨 천자의 사명을 띠고 와서 두목 행세하는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신비화, 신격화, 상징조작에 현혹당하지 않고 이치를 파고들어서 알지 아니하면 속고 또 속는 것이다. 중화경의 다음 글은 매우 의미가 있다.
非多述舊聞이면 固不足以建事하고 非博學古訓이면 固不足以立經이니라.
非徒貴於多聞이오. 尤貴於學古也니라. 聞而知之는 非眞知也오. 不學이면 不能知新이니라.
예로부터 들은 바를 많이 기술한 것이 아니면 건사(建事)에 부족하겠고, 고훈에 박학하지 아니하면 입경(立經)에 부족하겠으니, 문도가 아니라면 예로부터 많이 들어온 바를 귀하게 여기고, 고훈에 박학함을 더욱이 귀히 여겨야 하느니라. (옛 것을) 많이 들어서 아는 것이 참되게 아는 것은 아니니, 박학하지 못하고서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니라.
徒學이 不思其理則 罔且昏矣라. 思者는 自得也니 如食必飽耳니라.
배움이 단지 그 이치를 생각하지 않고 배울 뿐이라면 속이는 혼미함에 빠지리니, 생각이란 먹고 배부른 것과 같이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