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성유(性有)
性有巧拙,可以伏藏。九竅之邪,在乎三要,可以動靜。
火生於木,禍發必剋。姦生於國,時動必潰。知之修鍊,謂之聖人。
성품에 정교함과 치졸함이 있으니 숨기고 감추어야 옳다. 아홉 구멍(九竅)의 간사함이 세 가지 중요한 것(三要)에 있으니, 움직이게 하고 고요하게 할 수 있느니라. 화(火)는 목(木)에서 나와서 재앙(禍)을 불러 반드시 극하여 상(傷)하게 하고, 간신이 나라에서 있어서 때가 되어 움직이면 반드시 궤멸하느니라. 지혜롭게 수련함을 성인이라 이르느니라.
원숙진은 도덕경(道德經)에 ‘대변약눌(大辯若訥)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 하였는데 은밀함을 말한다(言隱密也)고 하였으며, 또 주역(周易)에 "군주가 은밀한 일을 경솔히 발설하면 신하를 잃게 되고 신하가 주도면밀하지 못하면 제 몸을 잃게 되니, 기밀이 은밀하지 아니하면 해를 입게 된다(君不密則失臣 臣不密則失身 機事不密則害成)"고 한 것이 다 이러한 이유를 말함이라(由斯之謂也)고 하였다.
화양은 성(性)의 청탁(淸濁)에서 교졸(巧拙)이 생한다고 하였는데, 공자는 ‘상지(上智)와 하우(下愚)가 곧 교졸(巧拙)이나 한가지로 천부의 일심을 받음이니 어찌 교졸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본성이 청(淸)하다면 정교하여 은밀(密)하니 온전해지는 까닭에 교(巧)라 함이고, 본성이 탁(濁)하다면 편벽되어 굴절하므로 졸(拙)하다 하는 것이다. 청탁이 함께 있음은 혼돈이니 인간의 본성에 교졸이 있어서 그 청탁함으로 인하여 선악이 있으며 보고 듣고 익혀서 지식이 더욱 넓어짐에 교졸도 더욱 넓어져 참다움이 미혹에 가려지겠으나 이를 복장(伏藏)시킨다면 성(性)이 온전해진다 함이다. 복장(伏藏)이란 마음으로 제압하여 복(伏)함이고, 신(神)에 감춤이 장(藏)이다.
이목구비 등의 구규로 들어온 것은 다 적(賊)이다. 구규의 사악함을 생하지 못하게 하려면 삼요(三要)의 수기(收機)로 마음을 안정(心定)하고 정심(正心)으로 성명성견(性明性見)하면 득천(得天)함이다. 함허는 이(耳) 목(目) 구(口)가 삼요(三要)이니 동정(動靜)이 있어서 정하면 함광(含光) 응이(凝耳) 함기(含氣)하여 삼요를 돌이켜 삼보가 되고, 동하면 색(色)이 사람을 눈멀게 하고 소리가 귀먹게 하고 맛이 몸을 어긋나게 하여 도리어 삼해(三害)가 된다고 하였다.
화(火)는 목(木)에서 나와서 다시 목(木)을 태우니 군주가 간신을 신임하여 키워서 간신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되는데 이 때 그 간신인들 온전하겠으며 군주라고 망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구규로 들어오는 사기(邪氣)가 나라의 간신과 같음이니 사람에게서 군주인 마음이 사기를 길러서 몸이 재앙을 입는 것이나 나라에 간신이 있어서 망하는 것이나 이치는 동일하다.
구규를 바르게 한다면 상극의 재앙이 미치지 않음이니 성인(聖人)이 아니고서는 이를 할 수 없다. 이를 ‘알고서 수련함이 성인이라 함이다’(知之修鍊,謂之聖人)라는 말이다. 정(靜)하면 사(邪)의 발동을 제압함이니 사악함에 빠져들지 않게 되고, 동(動)하면 사(邪)도 따라서 동하니 사악함에 의하여 궤멸되고 만다. 눈과 귀와 입으로 보고 듣고 맛보는 것에 치우치면 본성의 청(淸)함을 잃게 되어 본분을 벗어나니 오적에게 빼앗기는 바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동정지기(動靜之機)를 수련함에 있어서 정(靜)을 위주로 함은 이 때문이다. 심성(心性)을 수련함에 오직 솔성(率性)하여 교졸(巧拙)을 분별하지 않게 되니 연심(鍊心)하여 사적(邪賊)을 없애면 오적(五賊)도 안정됨이다.
도덕경(道德經) 제 45장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躁勝寒 靜勝熱 淸淨爲天下正.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라는듯하나 그 쓰임에 폐단이 없으며, 크게 찬 것은 빈듯하나 그 쓰임에 궁함이 없다. 크게 곧은 것은 굽은 듯하고, 크게 정교함은 졸렬한 듯 하고, 잘하는 말은 어눌한 듯하다. 뛰면 추위를 견디고, 고요하면 더위를 이길 수 있으니, 맑고 깨끗하여 천하가 바르게 된다.
말을 잘함은 아무 말이나 가리지 않고 함이 아니라 때를 분간하고 시의적절하게 함은 물론이고 그 잘한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니 어눌하여 보이지만, 말이 씨가 되는 까닭에 주역(周易)에서 이른바 군주가 은밀한 일을 경솔히 발설하면 신하를 잃게 되고(君不密則失臣) 신하가 주도면밀하지 못하면 제 몸을 잃게 됨(臣不密則失身)과 같은 해를 입지 않는 까닭에 은밀하여 어눌함이 대변(大辯)이라 하는 것이다.
주역 수택절(水澤節) 괘에서 절(節)은 죽절(竹節)이니, 절괘(節卦)는 만물의 성장과정(長成過程)에서 마디가 되어 물(物)을 완성하는 때이며 물(物)이 완성되면 다시 출발하게 되어 절(節)이라 한 것이다. 감수중(坎水中)의 일양이 진(震)으로 발진하는 마디(節)에서 달의 형질(形質)을 이루고 다시 새로운 달로 출발하는 것이므로 진(震)의 씨앗이 이루어지는 상(象)에 대(竹)의 상(象)을 취하여 절(節)로써 괘명(卦名)을 삼은 것이다. 천지(天地)에 절(節)이 있고 사람의 일상 제도에도 절(節)이 있으며, 사람의 호흡하는 중에도 절(節)이 있고, 병(兵)을 움직이는데에도 절(節)이 있음이니 이를 절도(節度)라고 함이다.
천지(天地)는 원행(圜行)하기 때문에 막히거나 궁색함이 없으나 그 원행(圜行)하는 가운데 스스로 절(節)이 있어 일행(日行)이 북지(北至)하면 하지(夏至)이고 남지(南至)하면 동지(冬至)이고 적도(赤道)를 통행하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이 있음이니 이것이 모두 절(節)인 것인 바, 천지는 24절이 있다 함이다. 하늘의 기후에 도수(度數)가 있어서 땅에서는 생사흥망의 도수(度數)가 있으니, 만물은 무궁불식하나 그 한도가 있기 때문에 그 쓰임이 중도를 지켜야 함이다. 인사에서 재물이란 천지의 도수에서 오는 것이니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만물의 화육이 한도가 있어서 사람이 이를 취하여 씀에도 한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까닭에 재(財)를 부리고 쓰는 것도 절도가 정하여져 있음이니 이를 어기면 낭패를 당하게 됨이다. 천하만물의 유통이 모두 절(節)이 있음이니 이 절(節)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인사의 성공을 기할 수 없게 되고 필시 자멸하게 된다.
인사에서 재화의 유통 역시 수화(水火)의 소통하는 이치이며 귀신의 왕래굴신하는 이치이니 ‘日中爲市 致天下之民 聚天下之貨 交易而退 各得其所’라 하였음이니, 일중(日中)에 저자에서 장이 섰을 때 교화를 취하여 교역을 행하고 나면 다시 물러남이 이치이듯이 인사의 절(節)은 재화(財貨)이다. 천지에 절(節)이 있어서 사시가 성(成)하니 절(節)로써 제도로 삼으면 재화를 상하지 않겠고 백성을 해치지 않음이라 하겠다. 소비가 과다하면 재화가 상함이고(傷財) 생산이 이에 따르지 못하면 백성에게 해를 끼침이다.(害民) 천하의 재화를 상하게 하고 천하의 백성을 고달프게 한다면 천하를 얻지 못함이니, 사람이 몸에서도 이러한 이치로 오적(五賊)을 안정시키지 못한다면 도리어 오적의 극함을 받아서 몸을 잃게 됨이니, 경에서 ‘성유교졸(性有巧拙) 가이복장(可以伏藏)’이라 함은 진실로 절(節)의 제도(制度)를 말함이다.
그리하여 주역의 절괘(節卦)는 달의 기울고 차고 하는 형질의 변화를 취하여 그 절(節)을 삼는 이치를 밝혔음이니, 만물이 운행불식하되 그 수와 한도가 있음을 말함으로써 나라에서 간신이 절도의 밝음을 가림을 경계함이며, 사람에게서 몸에서 절도의 있고 없음이 생사의 기틀임을 밝힘이다.
원숙진이 “복장(伏藏)이란 것은 현인군자가 정교하고도 지혜로운 언변과 혜안의 성(性)을 지녔다고 한들, 박학다문한 인재가 동정함에 기틀의 마땅함에 부합한다 함이 교(巧)가 아닐 수 있겠는가?(伏藏者,賢人君子縱有巧智辯慧之性、博學多聞之才,動靜合於機宜,可不為巧乎?)”라고 하였음은 인사를 행함에 있어서 사람의 행실이 절도(節度)를 벗어나지 않아야 함을 말함이며, 오적(五賊)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눈과 귀와 입으로부터 일어나는 발동을 고요함(靜)으로 다스려야 함을 말함인 것이다.
따라서 원숙진은 귀(耳)와 눈(目)과 입(口)를 요체(要)라 하였으며 계신하여 끊어서(切使誡慎) 재앙을 생하지 않도록 하라(無令禍生)고 하였다. 효경(孝經)에 “법도에 맞지 아니하면 말하지 말며(非法不言) 도리에 맞지 않으면 행하지 말지니(非道不行), 그러면 입으로는 가릴 말이 없으며(口無擇言) 몸으로는 가릴 행실이 없어서(身無擇行), 비록 내가 하는 말이 천하에 넘치더라도 허물이 없고(言滿天下無口過), 행적이 천하에 넘치더라도 원망이나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行滿天下無怨惡)”라고 한 것도 이것이다. 유가의 존심(存心)과 불가의 발원(發願)이 모두 성(性)의 교졸(巧拙)을 복장(伏藏)하여 구규(九竅)의 사(邪)를 동정(動靜)하는 이치로부터 물리침이니 이는 모두 정(靜)을 위주로 하여야만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