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仁의 두 가지 정의와 “가인지리可仁之理”
이러한 두 종류의 윤리적 상황을 바탕으로 다산은 공자의 인仁에 대
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도道를 다하는 것”과 “두 사람 사이의 도道를
다하는 것” 등 두 가지 기본 정의를 도출하게 된다. “자신의 도道를 다
하는 것”은 “인은 자신에 의해서 하는 것이다[爲仁由己]”를 강조하고, 주
체가 마땅히 해야 하는 본분을 중시하여 “완선完善”의 개념에 가깝다.
“두 사람 사이의 도道”는 주, 객체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본분
이며 “평등”, “정직”에 가까운 개념이다.
다산의 인仁에 한 이 두 가지 정의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사람 자신의 도道”와 “두 사람 사이의 도道”는 같은 하나의 도
道인가? 다른 두 개의 도道인가? “도道”와 “이분(理分, 이의 분할)”의 관계
는 어떠한가? 등등. 다산은 비록 이런 문제를 직접 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성기호설”을 통해 그가 “사람이 자신의 도道를 다하는 것”과 “두
사람 사이의 도道를 다하는 것”에서 얘기하는 도道는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도道는 사람의 마음[心]이 의식하고 기호嗜好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원칙”이다. 다산은 이러한 “보편적 도덕원칙”을 “가인지
리(可仁之理, 인할 수 있는 이)”라고 불렀다. “가인지리”에 한 다산의 설
명을 보자.
인仁이 밝히지 않은지 오래다. 인仁을 할 수 있는 리理은 본심本心에 있다.
시경의 “백성의 타고난 마음은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民之秉彛, 好是懿
德]”는 것이 바로 이 말이다. 인을 행하는 뿌리는 본심에 있다. 맹자가 이르
기를,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의 발단이다[惻隱之心, 仁之端也]” 인
의 이름은 반드시 일을 행한 후에야 이룰 수 있다.[仁之不明久矣. 可仁之理, 在
於本心,《詩》云‘民之秉彝, 好是懿德’, 是也. 行仁之根, 在於本心, 孟子云‘惻隱之心,
仁之端’, 是也. 若仁之名, 必待行事而成焉]
허령虛靈한 본체로 얘기할 때 체大體라고 부른다. 체에서 발생한 것을
얘기할 때 도심이라고 한다. 체의 호오를 얘기할 때 성이라고 한다. 사람
이 처음 태어날 때 하늘이 허령한 본체 속에 덕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성을 부여했다는 얘기지, 성이 곧 본체라는 것이 아니다. 성이란 기호하는
것 혹은 혐오하는 것으로 이름 붙여진다.[以虛靈之本體而言之, 則謂之大體, 以
大天於生人之初, 賦之以好德恥惡之性於虛靈本體之中, 非謂性可以名本體也. 性也者, 以
嗜好厭惡而立名]
體之所發而言之, 則謂之道心, 以大體之所好惡而言之, 則謂之性. 天命之謂性者, 謂
이상 두 문장에서 네 가지 주목할 만한 논점이 있다.
(1) “허령본체虛靈本體”, “본심本心”, “도심道心”, “체大體” 등 어휘는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로 모두 “인심”이 “성”의 “기호”를 따르고 “성”의
판단 기능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을 “각종 욕망의 집
합장소”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
는” 보편적 도덕원칙으로 이해해야 한다.
(2) “성性이 곧 본체라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의 뜻은 “성/심”은 주희
의 “리/기”, “체/용”의 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체용론으로
볼 때, “심”은 성리性理의 용用이므로 단지 리를 따를 수만 있지 리를
거역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 상황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다산은 “성”
을 “본체”로 보지 않고, “심”이 선을 향하고 악을 멀리하는 “기호嗜好”
를 따라서 형성된 “허령虛靈의 심”을 “본체”로 본다. 즉, 다산이 얘기하
는 “본체”는 존재론적인 “본체”가 아니고 “도덕적 활동”으로서의 “본체”
이다. 다시 말해, 다산의 학설에서 “본심本心”, “허령지심虛靈之心” 등
개념이 강조하는 것은 도덕적 토론, 도덕적 행동을 할 수 있는 “도덕 행위
자(moral agent)”이며, 존재론적 의미의 “도덕적 주체(moral subject)”는 아니
다. 존재론에서 사람을 논할 때 “천리”의 측면이 있다고 얘기하기 때문
에, 사람의 “도덕적 주체”의 “순수한 천리만 있고 인욕의 사사로움은 추
호도 없는[無一毫人欲之私]” 경지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천리(天理)”학설은 사람의 도덕적 사고를 “마음이 혼탁하여 천리를 가
리지 않을까”, “행위는 과연 천리에 부합한가”와 같은 방향으로 이끌게
된다. 때문에 “천리”는 존재론 혹은 도덕적 사고를 할 때의 곤란한 점이
된다. 다산은 아마도 이런 곤란함을 의식하였기 때문에 “도덕 행위자”
가 생각해야 하는 중점은 “천리”가 아니라 “심”, “성” 및 “타자” 간의 상
호관계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도덕 행위자”를 논한다면, 사람이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도덕 행위
자”는 감정적인 생명, 욕망과 이익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선을 추구하고
악을 멀리하는 도덕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 행위자”도
“이익 추구”라는 요구를 회피할 수 없다.
(3) 다산은 “도덕 행위자”가 사회적 맥락에서 “서로 베푸는” 과정을 주
희보다 더 강조하였지만, 그가 도덕 행위의 바탕에는 “보편적 도덕원칙”
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보편적 도
덕원칙”이 없을 경우 도덕적 행위와 일반 행위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산은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보편적 도덕원칙”을 “가
인지리可仁之理”라고 부른다. 다산이 “인仁의 이름은 반드시 일을 행한
후에야 이룰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은, 인仁은 반드시 구체적 행위(실천)
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구체적 행위가 인仁이라고 칭할 수
있는지는 “가인지리”로 판단해야 한다. 따라서 성性에서 도출된 “가인
지리”는 인仁인지 여부를 검증하는 형식적 원칙이다.
(4) “도덕 행위자”는 이익적 요구가 있으므로, “가인지리”로 인仁 여부
를 검증할 때 그 중점은 “공리적 효용”이 아니라 “보편적 도덕원칙”에 부
합하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설명으로 알 수 있듯이, 다산이 얘기한 “성性”과 “가
인지리”는 모두 형식상의 보편적 도덕원칙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보편적 도덕원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다산의
말을 참고할 수 있다. 다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仁이란 인륜의 덕
을 이루는 것이다. 서恕란 인仁을 이루는 방법이다. ……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다산이 얘기한 “인仁을 이루는 방법”
은 “인仁이냐 아니냐”를 검증하는 원칙으로 보아도 무방하고, 이 검증
원칙은 바로 《논어》에서 얘기한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서도恕道”이다.
다산이 “서恕”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가 《논어》의 “충서忠恕”의
도道를 논할 때도 주희의 해석과 다르다. 주희는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
集注》에서 “충忠”을 “자기를 다하는 것[盡己]”, “서恕”를 “자신을 미루어
헤아리는 것[推己]”으로 설명하였다. 다산이 보기에는 “나 혼자라면 충
忠도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을 다하고 싶어도 착수할 곳이 없다”, 따라서
“충서忠恕” 두 글자는 마땅히 “추기推己”인 “서恕”를 위주로 해야 할 것
이다. 그래서 그는 “서恕가 근본이고 이를 행하는 수단이 충忠이다”, “충
忠이 나올 때 서恕는 이미 존재한지 오래다”라고 하는 것이다.
다산의 “충서”에 한 설명에서 그는 “도덕 행위자”의 “상”의 문제
를 특히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도덕적 상황, 윤리적 정황에 반
드시 하나의 상이 있어야 하고, 설사 “두 사람이 서로 베푸는” 상황
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지향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다산의 “충서”
에 한 설명을 근거로 추론해보면, 그가 얘기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도道를 다하는 것”과 “두 사람 사이의 도道를 다하는 것” 중의 도道는
사실 “하나의 도”이고, 이는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자기가
원치 않으면 남에게도 하지 말라]”의 원칙으로 통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 말하는 “이분理分”은 이 원칙으로 구체적 사물을 검증한 후 형성된
규범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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