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구단 제천의례
원구단圓丘檀은 말 그대로 하늘의 모양을 본딴 원형의 단이다. 여기에
는 개국시조가 배향된다. 이는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운 개국시조의 공
덕이 하늘과 짝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구단에서 하
늘에 제사할 때는 동시에 개국시조에 대한 제사도 올리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원구단이 개경에 있었으며 이곳에서 왕이 제천의례를
행했다. 고려시대 원구단의 제천의례는 최고의 국가제례인 대사大祀로
정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되면서 원구단에서 왕이 제천의례를 행할 수 있는
지 없는지에 대해 심각한 논쟁이 야기되었다. 그것은 중국에 대하여 제
후국을 자처한 조선왕이 천자의 고유권한인 제천의례를 행할 수 없다는
명분상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논쟁의 와중에서 원구단의 제천
의례는 치폐를 거듭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었다고 원구단의 제천행사가 곧바로 폐지된 것
은 물론 아니다. 개국 직후인 태조·정종 때까지는 원구단의 제천행사가
계속 유지되었고, 태종·세종 때에는 거행되기도 하고 또는 폐지되기도
하는 등 치폐가 거듭되는 상황이었다.
조선시대의 원구단은 한양의 남교에 있었다. 지방에는 따로 제천단祭
天檀을 설치하여 국왕을 대신한 그 지역의 수령들이 하늘에 대한 제사를
드렸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의 왕들은 한양 남교의 원구단에서 제천의례
뿐만 아니라, 기우제나 기곡제祈穀祭 등의 제사도 몸소 행했다.
세종조까지 치폐를 거듭하던 원구단의 체천의례는 세조 때에 다시 거
행되었다. 이는 세조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거행한 것인
데, 이때도 제후국의 명분을 주장하는 유교 지식인들의 반발을 받았다.
이에 따라 세조 이후부터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전까지는 원구단이 폐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원구단이 없어졌다고 해서 제천의례가 모두 폐지된 것은 아니
었다. 비록 조선의 왕이 중국에 대해 제후를 자칭했지만 이는 어디까지
나 대외명분용이었다. 즉 문화·군사·경제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
세한 중국과 평화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외교술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조선왕은 중국에 대해 외교적으로 제후를 자칭하면서도 실제로는 천
명을 받은 왕으로 행세했다. 따라서 조선왕의 왕권을 정당화해주는 실제
근거는 중국천자의 책봉을 받는 것 이상으로 천명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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