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중도(中都)라는 노나라(魯)의 조그만 고을을 맡아 다스린 일이 있다.
그가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남의 것을 훔치는 사람은 커녕 길에 떨어진 것을 줍는 사람마저 없었다.
그릇을 만드는데 겉만 번드르하게 꾸미는 일이 없이 모두 실용적인 것을 만들었고,
값비싼 물건으로 속여 만드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일 년을 지나자 서쪽에 여러 나라들이
공자의 정치하는 내용을 배우러 사람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경이 중도에서 쓰고 있는 제도와 방법을 나라에 쓰면 어떻겠는가?」
공자는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비록 천하라도 다스릴 수 있는데 어찌 노나라 뿐이겠습니까?」
이리하여 공자는 노나라의 사공(司空 = 農林商工)을 거쳐,
나중엔 사구(司寇=法務治安)의 자리로 옮겨앉는 동시에 정승의 일을 겸해 보게 되었다.
이 때 공자는 당시 가장 평판이 좋고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던
소정묘(小正卯=小正은 벼슬이름 卯는 사람이름)를 대궐 앞에서 목을 베어
사흘 동안이나 그의 시체를 밖에 내두었었다.
소정묘는 언변이 누구보다도 뛰어나서, 그른 것을 옳은 것으로, 옳은 것을 그른 것으로 만드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다.
그는 공자가 사구의 벼슬에 오르기 전에는 항상 배후에서 공자가 하는 일을 방해해 왔었다.
그러던 그가 공자가 임금의 신임을 받아 사구 벼슬과 함께 정승의 권리까지 겸하게 된 것을 보자,
백팔십도로 태도를 바꾸어 공자의 비위을 맞추기에 앞장 서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 도에 지나쳐서 세도정승의 비위에 거슬리는 상소문을 올려
공자의 하는 일을 높이 추켜올리게 되었었다.
공자는 그를 즉석에서 잡아 묶은 다음 군신간을 이간시킨다는 죄목으로 그를 처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점에 대해 공자의 사랑하는 제자 자공이 물었다.
「소정묘는 노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선생님께서 정권을 잡으신 그날로 그를 죽인다는 것은
혹시 실책이 아니온지 알고 싶습니다.」
공자는 자공을 앉게 한 다음 이렇게 설명했다.
「천하에 큰 악(惡)이 다섯이 있는데 그중에 도둑질은 들어 있지 않다.
……이 다섯 가지 중 하나만 있어도 군자의 베임을 면치 못하거늘
소정묘는 그 다섯을 다 겸하고 있다.
그는 있는 곳에서 무리들을 모아 당을 꾸미고,
말하는 것이 족히 거짓을 참인양 사람들을 유혹 시키며,
그의 담력과 수단이 족히 옳은 것을 뒤집어 제 주장을 내세울 수 있으니
이는 곧 인간의 간웅(姦雄)이다.
이런 무리를 일찌감치 처치하지 못하면 곧 소인들이 작당하여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
그러기에 공자는 늘 사이비(似而非)를 가장 싫어 했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부정부패란 것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그런 인물들 때문이 아닐까?
出處:中國諧謔小說大系 第一卷 李周洪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