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인생관이랄까, 아니면 세계관이나 우주관이랄까, 이른바 도(道)니, 진리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말로 단정지을 수 없다. 공자는 위대한 교육자로서 묻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그때 그때 다른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제자인 안연을 평하기를 누공(屢空)이라 했다. 불교의 공(空)사상을 말한 것이다.
완전한<공>이 못되고 이따금<공>의 상태에 그 마음이 놓여 있음을 말한 것으로 본다.
<공>은 곧 무아(無我)의 경지를 말한다. 공자는 확실히 무아의 일체관을 깨달은 불보살(佛菩薩)의 경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그의 도통을 이은 증자(曾子)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삼(參=증자의 이름)아, 내 도(道)는 하나로 꿰었다. (一而貫之)」 이 하나가 무엇이냐?
흡사 선문답(禪問答)과 같다. 이때 증자는 「네에」하고 대답했다. 공자는 듣는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는 일은 없었다. 증자가 그의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깨우쳐준 것 뿐이다.
공자가 나간 다음 증자의 제자들이 증자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옵니까?」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뿐이니라.」
충은 하늘이 준 인간 본연의 공통된 자연선(自然善)이라 볼 수 있다. 그 자연선을 거울처럼 비추어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서>다. 충은 글자가 말하듯이 중심(中心)이다 사람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본연의 마음이다.
그것은 곧 성(性)이다. 즉 중용(中庸)이란 책에서 말하는 성(性)이 곧 충인 것이다.
따라서 충은 곧 진리요, '도'요 '각(覺)'이다. 그러나 도를 깨닫고 진리를 터득한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 공자의 대자대비한 구원의 손길이다. 서(恕)는 용서한다는 뜻이 있는 데 용서란 결국 사랑의 일종인 것이다.
남을 나와 똑같이 보기 때문에 용서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보고 미워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봄으로써 용서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행실이 부정한 여자를 팔매질하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혼자만 깨치고 속세를 피한다면 그것은 곧 노장사상이 되고만다. 공자와 같은 시대에도 공자만큼 지혜롭고 거룩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다같이 공자를 안타까와 하고 부질없는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건질 수 없는 세상인줄 알면서 혼자 세상을 구해 보겠다고 동분 서주하는 공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달자(達者) 혹은 각자(覺者)일 수는 있어도 성자(聖者)일 수는 없다.
여기 그들 은자들의 성자에 대한 평을 소개하는 것도 재미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공자는 자로와 함께 먼길을 가고 있었다. 강을 건너 가야만 할 텐데 강은 아직도 보이지 않고,
갈림길이 몇 개나 나 있는 곳에 다다르게 되었다.「어느 길로 가야만 하겠습니까?」
자로는 말고삐를 당겨 수레를 멈추고 공자에게 물었다. 「글쎄다. 근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좋을텐데……」
자로는 고삐를 공자에게 넘겨주고 수레에서 뛰어내려 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 두 농부에게로 달려갔다.
이들은 장저(長沮) 걸익(桀溺)이라는 은자(隱者)였다.
그것도 무슨 인연인지 공자에게는 자주 이런 은자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로는 공손히 말을 물었다.「나루터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자로가 먼저 말을 건넨 것은 장저였다. 장저는 그를 흘끔 한 번 바라볼 뿐 못 들은 척 대답이 없었다.
자로가 똑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한 뒤에야 비로소 허리를 펴고 일어나며 괭이를 지팡이 삼아 사방을 뚜릿 뚜릿 살폈다. 그는 큰길 가에 수레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 수레 위에 있는 사람은 누구요?」
「공구(孔丘=공자 이름이 구(丘)다)올시다.」 「아 그 노나라 공구말인가?」
「그렇습니다.」 「공구라면 나루가 어디 있는 것 쯤은 알 텐데……」「몰라서 묻지 않습니까?」 「알고 있을 거야.」
장저의 뜻인즉 천하를 구하겠다고 돌아다니는 주제에 길 하나를 짐작 못하고 묻느냐 하고 비꼬는 것이었다.
자로는 하는 수 없이 걸익에게 물었다. 그러자 걸익은 「자네는 누군가?」하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중유(仲由)올시다.」 「공자의 제자인가?」 「그렇습니다.」 「나루터는 어디로 갑니까?」
「그까짓 나루터가 문젠가?」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자로는 화가 치밀었지만 생김생김이나 말하는 품이 무게가 있어 보였으므로 꾹 참고 있었다. 「지금 온 천하가 홍수처럼 해일처럼 온통 야단인데 누가 이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은가?」
「하긴 그렇습니다만……」 「그대의 스승인 공구인가 하는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며
더구나 남의 힘을 빌어 세상을 바로잡겠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자네 그 어리석은 사람을 버리고 우리와 같이 살아보지 않겠는가?」 묻지 못한 채 되돌아와 그들이 한 이야기를 공자께 일러바쳤다.
「은자들이로구나. 내가 내 스스로를 위해서라면 그도 좋겠지.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보고 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세상이 바로잡혀 백성들이 평화롭게 산다면 내가 무엇하러 일할 사람을 찾아다니겠나?」
공자가 위나라에서 정나라로 갔을 때다. 제자들과 길이 어긋나서 혼자 동문(東門)밖에서 제자들이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자들은 제자들대로 공자를 찾노라 우왕좌왕 했다. 그때 웬 노인이 자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동문 밖에서 내가 사람을 하나 만났었지, 키는 아홉자 여섯 치나 되고, 큰 눈에 높은 이마
머리는 요(堯)임금같고 목은 고도(皐陶)같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같은데
허리아래로는 우(禹)임금보다 세 치가 짧더군. 그런데 실의에 찬 모습이 흡사 초상난 집 개 같더군!
자공이 공자를 만나 이 말을 고하자 공자는 흔연히 웃으며 「생긴 모양은 그럴 수 없겠지만, 초상난 집 개란 말은 정말 그렇다. 자공이 공자를 만나 이 말을 고하자 공자는 흔연히 웃으며
「생긴 모양은 그럴 수 없겠지만, 초상난 집 개란 말은 정말 그렇다. 정말 그래!」하고 한숨을 지었다.
아무도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 두릿두릿하고 서 있는 사람을 초상집 개라고 하는 말은 꽤 유래가 오랜 것같다.
이밖에도 공자는 경쇠(磬)치는 소리를 듣고, 공자의 세상을 구하지 못하고 안타까와하는 심정을,
처음엔 칭찬을 하고 나중에는 야비하다고 꾸중을 한 망태기(簣)를 질머진 사람도 있었고,
「봉(鳳) 이여! 봉이여!」하고 공자를 비꼬아 노래를 부른 초나라의 은자도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앞엣 사람을 「망태기를 짊어졌다」해서 하궤자(荷簣者)라 부르고 뒤엣 사람은 공자와 수레를 맞대어 지나갔다 해서
초광(楚狂) 접여(接輿)라고 이름 지어주고 있다. 이밖에도 많은 은자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공자는 일일이 이를 시인하면서도 세상을 구하고 싶은 자비의 감정만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춘기의 남녀와도 같이 누를 길이 없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