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멸망은 관료부패 때문이었다
“경술년 7월(음력) 대한(大韓)이 망한 뒤 작위를 받은 조정의 관리가 모두 72명이었다. 작위를 받지 않은 사람은 조정구(趙鼎九) 한 사람뿐 이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음란한 계집이 재산을 탐하고 색을 좋아하듯 이 기쁘하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하늘이 이런 놈들을 왜 싫어하지 않 는지 모를 일이다.”
★1936년 6월 29일 총독부에서는 양주삼 목사에게 "감리교가 총회 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양주삼 통리는 "국민의 의무일진데 누구나 참배할 것이니 구태어 결의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 다.
★일본의 앞잡이 교역자들은 이러한 정책에 협력하여 야훼를 배신하며 조국을 배신하고 동역자를 배신하고 신사참배에 동조하였고 황국신민이 된 것을 감사하였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은 것을 깨끗이 씻고 천조대신 아들이 되기 위하여 한강에서, 부산 의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귀신대장 '미소기바라'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량주의, 타협주의, 어용기회주의가 극성을 부리게 되자 3.1운동의 정신이 사라지고 일본의 앞 잡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사참배를 권유할 때 아무런 저항도 없이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하게 되어 기독교의 정신을 병들게 하였으며 이 것이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해방후 기독교는 반성과 새로운 각성운동으로 재건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각성없이 오늘에 이르게 되어 기독교정신은 현실도피주의 기복주의 어용주의로 전락하여 많은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시종원 부경(요즘의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이었던 정환덕(鄭煥德)의 회고록 ‘남가몽(南柯夢)’에 실린 이 말은 조 선왕조가 망한 이유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박성수 객원교수가 ‘매천야록’‘기려수필’등과 함께 구한말 비사(秘史) 로 유명한 ‘남가몽’을 중심으로 당시 역사의 이면에서 일어났던 사실들을 해설한 ‘조선의 부정부패 그 멸망에 이른 역사’(규장각)라는 책을 펴냈다. 광운대 강사인 박은경씨도 대한제국의 관료들이 일제시대 식민관료로 고스란히 연결된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혀낸 ‘일제하 조선 인 관료연구’(학민사)를 최근 출간했다.박씨는 이 책에서 “1909년 6월 당시 ‘한국직원록’에 수록된 조선인 관료 3천6백24명 중 67.6%인 2천4백49명이 일제시대 식민관료로 재임용됐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패전하여 대한민국이 해방되고, 감옥에 있던 교역자들이 출옥하여 승리의 감격으로 교회에 왔을 때 교회에서는 그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거의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환영은 커녕 회개하는 기색도 없이 자기 안일만을 위하여 강단과 교권에 집착하였다. 그리고 출옥파와 어용파로 분열이 되었다. 많은 성도들은 교역자들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한말 조선왕조의 관료들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부패했는지를 보여주 는 이 두 책은 지난 97년말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도 결국 관료들의 잘못에서 비롯됐음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교회 안에는 '가미다나'가 설치되었고, 예배를 드리기 전 여기에 절을 먼저하고 천황을 향해 머리숙여 동방요배를 한 다음 예배를 드렸 으니 하나님께서 괴씸하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에레미아 13:10) 목사들 복장은 일본식 군복이었다. 장로교 총회 교육부 사무실에는 일본의 국조신인 아마데라스 오오카 미의 사진을 걸었다.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이 신도의 창조설화와 위배된다고 하여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고백하지 못하게 하 여 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또한 찬송가 260장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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