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전경 3판>과 <대순철학> 출간경위의 내막
청음 이 상호의 동생 이 성영은 1945년 8.15 해방이후 보천교 내에서 악명 높은 자신의 이름을 세탁하기 위해 남조선 배라는 남주(南舟)로 호를 짓고 이름도 정립(正立)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해방이후 청맹과니로 시력을 거의 상실한 맹인 형님 이 상호가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자 해방이후 발행한 <대순전경> 3판의 서문 찬(贊)을 이 성영이란 본래 이름으로 쓰지 않고 세인의 눈을 가리기 위해 이 정립(李正立)으로 새로 지은 이름을 쓰게 됩니다.
1945년 8.15 해방이후 당시 안 흥찬(安興燦) 총사수(總師首)는 자신이 개창한 단체의 핵심 직계 간부인 경상도 포항 울진출신의 배 동찬(裵東燦:황원택과 함께 8교리 간부의 한 사람.영주· 봉화 ·문경 책임자)을 통해 당시 신도들의 재정후원을 통해 <대순전경> 3판을 47년 발행하게 한 것이고 후일 이 정립은 <증산교사>에서 당시 실제 지도자였던 안 흥찬(安興燦) 총사수(總師首)가 증산교 대법사를 주재한 사실을 뿌리부터 철저히 왜곡해 말살합니다. 안 흥찬(安興燦) 총사수(總師首)가 이 정립을 서울에 하숙시켜 생활비를 대주며 책 쓰기를 독려해 나온 작품이 바로 <대순철학>인데 이 역시 총사수의 지원으로 <대순전경> 3판과 함께 47년 함께 발행하게 된 것입니다.
<증산교의 진리>는 중복지도자인 안 경전(安耕田)의 저서로 1981년 미성사 이름으로 발행된 증산 상제님의 종합적인 천지공사 교리 설명서입니다. 뒤에 <증산도의 진리>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한 이 책의 초반 도입부에는 안 운산(安雲山) 총사수(總師首)가 1945년 해방 당시 처음 그려 포교한 우주변화 원리 도표가 실려 있습니다. <보천교 연혁사>나 <보천교 교전>을 보면 차 경석 성도의 ‘보천교’ 시절에는 소 강절 선생의 ‘우주변화 원리 도표’를 비롯 이에 대한 종합적인 그 어떠한 설명이나 언급도 찾아보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하 ‘보천교’ 시절에는 전혀 빛깔도 안보이던 소 강절 선생의 우주원리를 배경으로 천지공사를 언급하는 내용이 세상에 처음으로 활자화하여 체계적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은 바로 이 정립의 <대순철학>에서입니다.
안 운산(安雲山) 총사수(總師首)는 해방이후 서울 합정동 최 위석 집에서 만난 이 정립에게 우주변화 원리에 입각한 상제님 진리의 전반을 일제하 구 보천교 시절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전해 줌과 동시에 하숙비와 일상 생활비까지 전담하며 적극적으로 책 만 쓰게 독려한 결과 2년여 뒤에 바로 <대순철학(大巡哲學)>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이 책에는 안 운산(安雲山) 총사수(總師首)가 이 정립에게 <증산도의 진리>에 나오는 소 강절 선생의 우주원리 도표를 손수 그려가며 그 대국을 설파한 결과 이 정립의 시각으로 재해석되는 집필과정을 거쳐 세상에 인쇄물로 빛을 보게 된 결과물입니다.
이 상호(明鐸) · 이 정립(誠鐸) 형제가 힘을 합쳐 증산교 대법사의 종권(宗權)을 조직적으로 탈취하고 안 흥찬(安興燦) 총사수(總師首)가 54년 말점도 대 휴게기 은퇴를 선언하자 현실적으로 당시 총사수를 따르던 배 동찬, 황 수찬, 황 원택 등 대다수의 심복간부들까지 이 상호 · 이 정립의 휘하에 자진 귀속되어 이 상호 · 이 정립의 핵심간부가 되는 세탁 과정을 거칩니다. 이는 당시만 해도 말점도 도수를 통해 시간의 도수에 맞추어 때가 되어야만 활짝 피어나는 문왕도수의 시절화(時節花)를 알지 못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해방이후 2변 교운을 개창해 증산교 대법사를 개창한 운산(雲山) 안 흥찬(安興燦) 총사수(總師首)는 정읍 시기리에서 초가단칸방에 경제적으로 홀로 버려지다시피 한 늙은 장님 이 상호를 만나(만날 때는 버려진 빈집에 들어가 생활) 용화동에 누옥을 마련해 주고 해방과 더불어 서울 합정동 최 위석 집에서 대구감옥에서 갓 출옥한 동생 이 정립을 만난이후 직계 대연원주 간부 배 동찬(裵東燦)을 시켜 앳된 울진처녀 21세의 장 옥(張玉)을 맺어주어 혼인까지 시켜줍니다.
당시 <동아흥산사> 사건으로 대구감옥에서 갓 출옥해 일가친척 하나 없는 홀아비 이 정립(誠鐸)은 서울에 사는 동생 이 순탁(淳鐸)의 집에 들렀다가 순탁으로부터 서울 마포 합정동 최 위석 집에서 치성이 있으니 한 번 가보라는 연락을 받고 안 흥찬 총사수(總師首)와 조우하게 된 것입니다. 이 상호, 이 정립 형제는 전라도 해남 끝 좁은 섬마을에서 첩의 자식이라 성장과 더불어 좁은 섬마을의 손가락질을 피해 일찍이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했으므로 일가친척과 일체 소통이 없었습니다.
후일 이 정립은 일제하 보천교 혁신운동으로 차 월곡 교주에게 배사율을 범한 것으로도 모자라 본인의 <증산교사>에서 자신의 스승이신 월곡 차 경석 교주의 보천교를 사이비로 흠집 내어 다시 한번 깎아내려 보천교 혁신운동을 미화시킵니다. 일제 당국의 보천교 힘 빼기 기획의 일환으로 일제 종교밀정 김 환(金丸)의 협조를 얻어 동화교를 개창한 이 상호 형제는 과거 보천교 시절 자신들이 주도해 공개적으로 태모 고수부님 배척운동을 벌여 축출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31년 조 학구 등을 데리고 차를 대절해 수차례 조종골을 찾아 태모님 유치를 통해 동화교의 정통성을 갖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입니다.
이 상호, 이 정립 형제가 태모님을 모시기 위해 찾아다니는 각고의 유치노력과 조종골 태모님의 경제압박의 정황이 일치하자 태모 고수부님 수석성도 고 민환(高旻煥) 성도는 잠시 용화동에 가서 조종골 살림의 경제적 난국을 피하자고 주청드린 결과 태모님은 마지못해 고육지책으로 신미년(1931) 동지치성 봉행 후 임신년(1932)부터 힘겨운 조종골-용화동 과도기 합동 살림시대가 바야흐로 개막됩니다.
<2변 도운 121(1991).3.4 강론>*서울서 도장 잘 새기는 사람 최 기석이라는 사람을 내가 데려다가 의통인(印)을 새기는디, 그때 50 전인가 50 원씩인가를 줬어. 매 개 새길 때마다. 그리고 나서 그건 하루저녁에 되는 게 아니니께 그건 일방적으로 정리를 하고. 그러니께, 말로만 본부도장이고 돈이 있나 신도도 없고. 그러니께 내 호주머니 돈이 공금이고 그렇게 4년을 지냈었어. 이 상호 씨를 그날 내버려두면 똥수깐에 빠지게 생겼어. 이 정립 씨는 감옥살이 3년하고 8.15후에 나와서 서울서 하숙하고. 그래서 같이 일하자는 생각에 나가서 밥 먹자고 하면 먹고, 담배 피우고 그랬지.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러면서도 증산교 교칙을, 조직을 하는데. 그 때는 이 상호 씨한테 청음 선생이라고 했어. 우리 아버지 연배니께 말여. 당신이 의통 얘기하는데 천하에 다 공개된 사실인데. 내가 당신한테 받은 게 뭐가 있냐? 내가 당신 지켜주고 당신 동생 생활시켜 주고 그런 거 밖에 없는데 조직으로 하자. 그래서 내가 <수주>여. 이 상호 씨가 <토주>고. 내가 포교한 김 종렬이가 화주이고. 경상도 이 원호라는 사람이 목주고. 서울 합정동 27번지 최 규석이라는 사람이 금주여. 내가 조직을 위해서 조직 정비하고 의통을 이 상호 씨에게 반환을 했어. 받건 말건 동지의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역사적으로 이 상호 씨 밑구녕 닦아주기 위해서 생겨난 게 아니다. 다만 상제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차 교주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공인의 한 사람으로서 진리의 사도로서 그러는 거지.
<2변 도운 121(1991).3.4 강론>*이 정립이 50여살 넘었을 때 자기 집이 없으니께, 마누라도 없고. 이 정립이 돈 일 푼이 있나? 또 늙었고 해서 이 정립한티 시집온다는 사람도 없고. 그런 사람이 장가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혀. 그건 지 부모도 어떻게 하덜 못혀. 그래서 내가 안 되는 일이 어딨냐고. 내가 결혼시켜 준다고 말여, 내가 책임진다고. 그렇게 해서 결혼시켜서 아들 삼형제를 낳게 해줬어! 그 중에는 교수도 있고. 이 정립이는 신명이 다할 때까지도 나한테 은혜를 다 못 갚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대법사大法社에 입사원서여, 입사원서에 입사금으로 그때 돈 50원을 받았어. 쌀 한말 값이 50원했어. 그래서 이 상호 씨 보고 입사금入社金으로 쌀 팔아 먹어라. 그래도 됩니까?. 내가 그래라고 했으니 되는 거 아니냐? 그런데 포교를 못하니께, 입사금入社金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려. 그것도 안 되니까 옥성광산의 아랫 칸이 비었고 그랬으니까 가족을 전부 더불고 오라고, 내가 쌀을 팔아주마. 쌀 밥 먹게. 이사하구서 내가 쌀값을 주니께 좋은 옥배미 밥을 먹는단 말여. 이 상호씨 부인이 배가 아퍼서.... 이 상호씨 살림도 내가 돌봐 주었는디 말여, 신도들도 드나들고.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러면서 그네들도 그런대로 다 밥 먹고 살게 해줘. 이 상호 씨 부인이 하얀 쌀밥을 보니께 ....이 상은 씨가 금평호 오리알터 <법종교> 있쟎어 글로 가 버렸어. “우리 집 안사람이 인간적으로 (이상호 부인이) 미워서 여기 안 있는답니다.” 그래서 나갔어. 이 상호 씨 부인 미워서. 이 상은 씨는 그렇게 못살게 해서 잃어버리고. 또 이 돈영 씨도 꼴 보기 싫다고 그리 가 버렸어. 이 상호 부인 하는 짓거리 때문에.
<2변 도운 121(1991).3.4 강론>*이 돈영 씨가 포교한 이 원호, 당시 65살 정도 됐을까? 도체 조직할 때 사람이 없으니께 목주로 하고. 거개가 이 상은, 이 돈영 그런 사람들 많이 끌고 그랬거든. 화주가 내 신도다 말여. 이 상호 심부름꾼 그런 거 하고 싶지 않다 말여. 김 종렬 씨 같은 이, 최 규석 씨 같은 이, 목주로 있는 이 원호 같은 이 말여, 다 내 영향권에서 일하고 있고.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 사람들하고 같은 위치에서 이 상호 씨 밑에서 있을 수 있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그래서 내가 조직에서 빠졌다 말여 할 수 없이. 실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