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중련은 노련이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후기 제나라 사람이다. 그는 기발하고 장쾌하게 그리고 세속을 초탈한 책략을 구사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부귀에 전혀 뜻을 두지 않고 고상한 절개를 지켰다.
외교가들 중에서 로맨티시스트가 있다면 노중련이 단연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그는 일신의 영달을 돌보지 않았던 괴짜 외교가이자 전국시대 마지막 자유인이었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그것이 자연의 진리이기도 하다. 천태만상이란 말도 있다.
이것은 똑같은 사람인데 지혜와 인품과 마음가짐이 그만큼 격차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불의(不義)의 곡식을 먹지 않기 위해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죽은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있는가 하면,남의 집 담을 넘고 들어가 도둑질을 직업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같은 재사(才士)가운데서도 남을 속이고 자신의 영달만을 꾀해 온 소진(蘇秦) 장의(張儀)가 있는가 하면 노중련(魯仲連)같은 정반대의 고매한 재사도 있다.
노중련은 소진 장의와 같은 시대의 제(齊)나라 사람이다.
그는 생긴 모양부터 신선처럼 속된데가 없었고 어릴 때부터 타고난 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소진 같은 천재도 귀곡(鬼谷)선생에게 오랜 동안 공부를 했었고, 포부를 가지고 각국을 돌아다니다가 노자가 없어 길가에 쓰러진 일까지 있었으며,
그뒤 비로소 실력부족을 깨닫고 송곳으로 턱을 찔러 잠을 쫓아가며 공부를 한 다음에야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노중련은 나이 열살 미만에 벌써 말재주로써 천리구(千里驅)소리를 들었고, 열 두 살 때는 당시 유명했던 전파(田巴)라는 재사를 누른 일이 있었다. 전파는 당시 제나라에서는 말로써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의 입에서는 오제(五帝)도 빛을 잃고, 삼왕(三王)도 죄인 취급을 당했으며, 오패(五패)도 항복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그는 혜시(惠施) 공손룡(公孫龍)과 같은 일종의 궤변론자로서 하루 천 명의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노중련은 그때 서겁(徐劫)이라는 사람에게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서겁에게 이렇게 청했다.
[선생님 전파를 좀 만나고 오겠습니다.]
[전파는 왜?]
[그렇게 천하에 둘도 없는 변사라고 하니 어떤 분인가 좀 만나보고 싶습니다.]
전파를 만난 노중련은 이렇게 물었다.
[저는 이런 말을 듣고 있습니다. 방안에서는 될 수가 없고 들에 난 풀은 김을 맬수가 없으며,
앞에 들이닥친 칼날은 구할 길이 없고, 날아오는 화살은 급히 멈출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초나라 군사가 남양(南陽)에 진을 치고, 조나라가 고당(高唐)을 공격하고 있으며
연나라 십만대군이 요성(邀城)을 떠나지 않고 있어 나라가 금방 망할 지경에 이르러 있습니다.
삼왕(三王)과 오패(五覇)를 가소롭게 보시는 선생님께서 이를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남의 흉이나 보라면 잘 보았고, 실속 없는 공론이나 그럴 듯하게 늘어놓을 수 있었던 전파로서는, 얼른 실질적인 답안을 내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께서 이에 대처할 아무런 묘안도 없으시다면,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흡사 올빼미의 울음 소리와 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듣기 싫어할 따름입니다. 바라옵건대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다시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전파는 생쥐 앞에 코끼리 모양으로 코를 틀어쥐고 꼼짝을 못 했다.
전파는 서겁을 만나 노중련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천리마이며 나는 토끼와도 같다. 감히 따를 수가 없다.]
전파는 열 두 살 먹은 소년에게 한 번 혼이 난 뒤로 평생을 통해 다시는 변론을 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소진, 장의가 변론의 천재라면 노중련은 변론의 신동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신동적인 말재주를 가진 노중련이었건만 벼슬을 귀찮은 존재로 알고,홀로 높은 절개를 지켜 가며 천하각국을 초연한 입장에서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그는 세상을 미워하며 피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굽어보며 자연을 즐기고 살았던 것이다. 그는 이따금 남의 어려운 사정을 동정하는 일도 있었고, 세상이 하는 하찮은 일을 가지며 떠들어 대면 잠시 발길을 들여놓는 수도 있었다.
그가 조나라에 놀러 와 있을 때다.
그 때는 조나라 40만 대군이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의 손에 하룻밤 사이에 학살된때였고,
다시 진나라 군사에 의해 수도 한단(邯鄲)이 포위되어 있을 때였다.
조나라에는 삼천명 식객으로 유명했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이 상국(相國)으로 있었으나, 별다른 묘책이 없이 이웃 나라들의 구원만을 재촉하고 있었다.
위나라에서는 진나라의 협박과 노여움이 두려워 대장 진비(晉비)에게 10만의 구원병을 주어 놓고는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당부를 해두고 있었고,
초나라 역시 8만의 구원병을 무관(武關)에 주둔시킨 채 정세만을 관망하고 있었다.
진나라에서는 왕이 직접 현지로 달려와 수도인 한단 포위를 더욱 서두르고 있었고,
조나라에서는 배고픈 아이 밥달라듯 원병을 청하는 사신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위나라 조정으로 찾아들고 있었다.
이때 위나라에서는 객장군(客將軍)에 신원연(新垣衍)이란 사람이 있었다.
객장군이란 객경(客卿)과 같은 지위다. 장군으로 현직이 없어 동등한 대우만을 받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가 이런 궁여지책을 생각해 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급히 공격하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위왕은 궁금한 듯이 물었다.
[전날 진나라 왕이 제나라 민왕과 함께 제(帝)로서 행세하자고 합의한 다음 얼마쯤 쓰다가는 그만둔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지.]
[이제 제나라 민왕은 이미 죽었고 나라도 극히 약해져 있으므로 혼자 제호(帝號)를 붙이고 싶어
못 견디는 심정일 겁니다. 그래서 무력으로 그 목적을 이루려고 조급한 공격을 하는 것이니
조나라로 하여금 진왕을 진제(秦帝)로 높여 주게끔 하면, 기뻐서 곧 군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이는 곧 실속없는 이름으로 실속있는 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위왕은 조나라를 구할 용기도 없고 또 구원병을 보내 주지 않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있었으므로 그 말이 솔깃하게 들렸다. 위왕은 곧 신원연에게 사명을 주어 그로 하여금 조왕을 달래 보도록 했다.
구원병을 얻으러 왔던 위나라 사신은 구원병 대신 신원연을 데리고 돌아왔다.
다급한 조왕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군신들의 의견을 들어 보기로 했다.
군신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찬성파와 반대파가 갈라져 결론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