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蘇秦)과 장의(張儀)를 통해 살펴보는
‘프레너미(Frenemy)’의 진정한 의미
'프레너미'
글쓴이 - 김영수
‘프레너미’란 ‘friend(친구)’와 ‘enemy(적)’의 합성어로 당초 여성들의 친구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였지만 지금은 기업을 비롯하여 사회 각 방면에 두루 통용되고 있다. 무한 경쟁에만 몰두하던 기업들 사이의 관계가 점점 ‘프레너미’의 관계로 바뀌는 현상이 두드러져 보인다. 따라서 이런 현상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관계 설정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역사에서도 이런 관계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춘추전국이라는 활기찬 경쟁시대에서 프레너미 관계는 다반사였다. 어제의 적이 오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 적이 되는 일은 각국의 이해관계와 국제 사회의 역학 구도에 따라 수시로 발생했고, 개인 사이에서도 이런 현상은 적지 않았다.
이제 전국시대 말기 천하를 종횡으로 누비며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도우며 천하정세를 좌우했던 두 사람의 행적을 통해 바람직한 프레너미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혼란스러운 전국시대, 위대한 두 유세가의 탄생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 초에 걸친 전국시대 말기는 초강대국 진(秦)과 그에 맞섰던 나머지 6국의 극한경쟁의 시대였다. 생존을 건 사생결단에 국가의 모든 정책이 집중되었다. 이에 따라 진과 6국의 대외정책이 각각 어떤 방향으로 설정되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을 돌며 자신의 주장과 능력을 설파하는 소위 ‘유세가(遊說家)’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데, 사마천은『사기』에서 소진과 장의라는 대표적인 두 유세가의 전기를 소개하고 있다.
유세가에게는 무엇보다 천하정세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이 중요했다. 즉, 대세를 간파하고 그에 맞는 대응책을 마련하는 능력에 따라 우열이 갈렸다. 이 과정에서 유세가들은 각국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식견과 주장을 말로 설득해야만 했기 때문에 언변술이 거의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유세가들의 언변술 공부에는 상대의 심리를 꿰뚫는 오늘날 심리학과 유사한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언변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상대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젊어서 제나라로 유학을 가서 당시 이름을 떨치고 있던 귀곡자(鬼谷子)에게 함께 유세술을 배웠다.
귀곡자는 귀곡이란 골짜기에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했기 때문에 귀곡자라 불렸고, 중국 사상사에서는 유세가를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인 종횡가(縱橫家)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소진과 장의를 비롯하여 손빈(孫臏)․방연(龐涓) 등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길러낸 것으로 전한다. 주로 교육시킨 과목은 유세․병법․음양․술법 등이었고, 그 자신 『귀곡자』라는 책략서를 저술했다고 전한다.
소진, 자신만의 공부법으로최고 유세가로 등극하다
공부를 마친 소진은 자신이 배운 바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세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고향 낙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소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의 수도 낙양에서 태어난 그는 조국이 주위 열강에 둘러싸여 껍데기만 남은 채 몰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천하정세를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 천자국의 체면을 회복하려 했다. 훗날 그가 당시 초강국 진나라에 맞서 나머지 6국이 동맹하여 대항하자는 ‘합종책(合縱策)’을 제안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다. 소진은 이 『음부』를 1년 정도 공부했는데, 완전히 책에 머리를 파묻고 집중 연구했다. 『전국책』에 따르면 공부하는 중에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 며 잠을 쫓았는데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른다’는 뜻의 ‘추자고(錐刺股)’라는 유명한 고사가 나왔고, 소진 공부법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소진과 장의가 공부했던 하남성 운몽산 귀곡의 모습
소진은 이밖에 ‘두현량(頭懸樑)’이란 공부법도 남겼는데, 역시 졸음을 쫓기 위한 방법으로 졸리면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매달았다’는 것이다. 소진은 이런 자기만의 독특하고 독한 공부법을 통해 당대 최고의 유세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장의, 일인자 소진을 벤치마킹하여 연횡책을 수립하다
소진과 동문수학한 장의는 소진에 이어 천하를 주름잡았던 유세가였다. 소진처럼 그가 어떻게 공부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유세가로서 철두철미한 프로 정신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전한다.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하던 장의는 초나라 재상의 식객으로 있다가 도둑으로 몰려 흠씬 두들겨 맞았다. 만신창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장의를 본 아내는 “아이고! 당신이 아무 쓸데없이 책만 읽고 유세만 일삼지 않았더라면 이런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 아니오”라며 한탄했다. 장의는 뭐라 대꾸하는 대신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쑥 내밀더니 “내 혀가 아직 그대로 붙어 있나 보시오”라고 물었다. 아내가 “아직 그대로 있네”라고 하자 장의는 싱긋 웃으며 “그럼 됐소”라고 했다.
유세가는 다른 건 몰라도 혀만 살아 있으면 된다는 것을 이 일화는 아주 생생하게 잘 전해준다. 여기서 저 유명한 ‘혀는 아직 있다’는 ‘설상재(舌尙在)’의 고사가 탄생했다.
그런데 장의의 일생을 차분히 추적하다 보면 그의 출세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유세가로서의 출세는 소진이 빨랐다. 조금 늦게 시작한 장의는 초기 소진이 그랬던 것처럼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받았다. 동문수학한 친구 소진에게서조차 인격적으로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심하게 홀대를 당했다.(당시 조나라에서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던 소진은 찾아온 장의를 며칠 동안 허름한 객사에 처박아 놓고 만나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음식도 개돼지가 먹는 수준으로 대접했다.) 장의는 설움을 삼키며 당시 최강국 진나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장의는 천만다행 주막에서 만난 귀인 덕분에 편하게 진나라로 갈 수 있었고, 또 그 사람의 주선으로 진나라 왕을 만나 유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친구 소진의 안배였다. 사실을 안 장의는 자신은 소진에게 한참 못 미친다며 소진이 죽기 전에는 그의 합종책을 건드리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소진이 죽자 장의는 소진이 공들여 구축한 6국 합종책을 차례차례 무너뜨리기 시작하는데, 장의가 진나라를 위해 수립한 대외책략은 ‘연횡책(連橫策)’이었다. 남북 6국이 종(남북)으로 연합하여 강국 진에 대항하는 합종에 대응하여 진은 횡(동서)으로 6국과 각각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여기에 각국의 내분을 조장하는 첩보술을 가미하여 각개격파하는 연횡을 내세운 것이다.
장의의 연횡책은 소진의 합종책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전략이었다. 장의는 소진이 수립한 전략을 반대로 적용하여 연횡책을 구상해낸 것이다. 말하자면 장의는 소진으로부터 벤치마킹 내지 아웃소싱을 한 셈이다.
상대가 커야 내가 큰다
장의는 자신의 능력이 소진에 못 미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소진의 뒤를 따르되 그가 고안해낸 전략이나 책략과는 정반대되는 책략을 구사하기로 한 것이다. 소진의 식견과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 장의로서는 어찌 보면 이것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책이었는지 모른다. 탁월한 1인자에 정면으로 맞서거나 1인자가 내세운 논리나 상품과 똑 같은 것을 들고 나와서는 경쟁력이 없다고 장의는 판단했던 것이다.
소진은 소진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내세운 합종책의 치명적인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연횡책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는 것도 예상했다. 그래서 그는 동문 장의를 몰래 보살피며 그가 진나라에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게 배려했던 것이다. 당시 천하 정세를 놓고 볼 때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6국 중 합종이 거의 유일한 외교 정책이었고, 진나라는 합종을 각개격파할 수 있는 연횡책이 필요했다. 소진과 장의는 자신들의 능력과 공부에 따라 각각 합종과 연횡을 선택하여 서로 도우면서 경쟁했던 것이다.
소진과 장의는 단순히 세 치 혀에만 의존하여 출세한 것이 아니었다. 젊어서부터 단계적으로 철저한 교육을 받았고,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만의 브랜드를 창출하기 위해 더 깊게 공부에 매달렸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천하정세에 대한 정보 분석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제정세를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최고 전문가들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상대가 있어야 내가 있고, 상대가 커야 내가 클 수 있다는 프레너미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