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
글쓴이 - 장 진 호
무위(無爲)는 곧 인위(人爲) 또는 작위(作爲)에 상대되는 말이다. 무위(無爲)는 비인위적인 자연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도가(道家)의 중심 사상인데 인간의 작위적인 요소를 배격하고 무위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이다.
유가(儒家)는 우주가 착하다고 보았다. 태양이 있어서 밝은 빛과 따뜻함을 주고, 하늘은 사시에 맞게 비를 내려 곡식을 풍성하게 하고, 땅 위에 거처를 마련하게 해 주니 선한 존재란 것이다.
과연 그렇기만 할까? 때로는 가물어서 기근을 초래하고, 때로는 폭우와 폭풍을 보내 인명을 해치기도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 우주는 선하다고도 할 수 없고 악하다고 할 수도 없으며, 아예 인간과는 무관한 독립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도가의 입장이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우주가 선하다고 하면서, 그 마음을 읽은 듯이 행세하지만 그것은 턱도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우주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니 이렇다 저렇다 말고 그대로 놔 두어라. 이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다.
유가들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앞세워 인간을 몰아가는 것도, 무위자연에 어긋나는 인위이니, 자연의 대도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무위는 인간이 목표로 삼아 추구해야 할 행위의 규범으로, 인위와 조작은 자연의 질서에 이르는 장애물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무위를 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라고(爲無爲 則無不治) 하여, 인위로 만든 법령은 물론이거니와 유가의 인의(仁義) 또는 예(禮)로 다스리는 것도 인위의 다스림이라 하여 이를 배격하였다.
이와 같이 노자는 자연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 즉 무위자연의 삶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무위자연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르자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 뒤를 이어받은 장자에 이르러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상으로 확대되었다. 인간이 벌이는 일체의 시비(是非)·선악(善惡)·미추(美醜) 등을 구분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만물은 결국 하나의 세계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이른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 잘 나타나 있다.
장자가 어느 날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莊周)였다. 장주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장주인 자신이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피상적인 구별과 차이는 있어도 절대적인 변화는 없다. 장주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주다. 물아의 구별이 없는 만물일체의 절대경지에서 보면 장주도 나비도, 꿈도 현실도 벌개의 것이 아니다. 삶도 죽음도 둘이 아니다. 인간이 호불호(好不好)로 구분한 것일 뿐이 아닌가.
그래서 무위자연을 설파한 장자는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도 대야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삶도 죽음도 자연의 질서일 뿐인데, 그것을 인간이 분별하여 구차한 인위적 행위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장(老莊)의 무위와 불교의 무위는 의미가 다르다.
전자의 무위는 인위의 상대 개념인데 대하여 불교의 무위는 유위(有爲)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유위는 수많은 인연이 결합하여 생긴 현상적인 것으로서 생멸변화(生滅變化)를 겪는 것들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형의 물질적인 현상들은 단독으로 성립하거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여 상호 의존하고 있다. 촛불이 켜지는 것도 제 홀로 켜지는 것이 아니며, 꺼지는 것 또한 제 홀로 꺼지는 것이 아니다. 저기 피어 잇는 꽃이나 서 있는 바위도 예외일 수 없다. 이처럼 인연에 의하여 변화하고 생멸하는 것이 유위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중생이나 자연, 그리고 인간이 벌이는 모든 행위 곧 정치, 경제, 문화 등이 모두 유위법에 속한다.
무위법은 유위와 같은 인연의 지배를 받지 않고 생멸변화의 현상을 갖지 않는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절대적 진리[法 dharma]를 말한다. 삼독(三毒)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온갖 분별망상과 번뇌가 끊어진 상태 곧 해탈한 열반의 경지를 말한다. 중생이 유위의 상태에서 벗어나 무위의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다. 다른 말로 하면 도를 닦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금강경에서는 유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일체유위법 一切有爲法 이 세상 모든 현상적 존재들[有爲法]은
여몽환포영 如夢幻泡影 꿈 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여로역여전 如露亦如電 이슬 같고 번갯불 같은 순간적인 것이니
응작여시관 應作如是觀 마땅히 이같이 바로 볼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