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은퇴를 선언한 쑨원과 교활한 위안스카이의 음모
쑨원은 임시총통을 위안스카이에게 물려주고 철도건설 사업에 모든 힘을 쏟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쑨원이 성장과정에서 하와이, 영국 등지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체험한 선진문명국의 관계도로망을 보았기에 잘 알 것이다.
의대 진학 후 혁명에 뜻을 품었을 때는 관조했던 생각들이 보다 체험적으로 심화되었을 것이고, 혁명을 진행하면서는 혹은 망명생활을 하면서는 근대화된 서구 유럽과 일본, 미국 등지에서 철도 및 도로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중국에는 대상인大商人 들이 많았고 그들의 상행위는 주로 근거리 바다를 중심으로만 이루어졌다. 더불어 중국의 역사는 물길과 큰 수로를 잇고 제방을 쌓는 이른바 대운하와 크고 작은 수로를 중심으로 상업도시가 발달했다.
그러나 광활한 중국이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사통팔달 먼 지역까지 물자를 운반하고 인적교류가 용이한 철도가 쑨원에게는 실업實業을 일으키는데 가장 중요한 기초토대였던 것이다.
이제 쑨원은 민생주의 실현을 위해 철도사업에 여생을 바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것은 민생주의 실현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인 것이다.
‘교활한 음모가’라는 혹평을 받던 위안스카이는 그러한 혹평에 걸맞게 쑨원의 순수한 뜻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그는 쑨원을 중국 전체의 철도를 관장하는 ‘전국철로 독판’에 임명하고 엄청난 원급과 특권을 주어 호화생활을 즐기도록 유도했다. 쑨원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서태후가 쓰던 사치스러운 전용열차를 물려받아 기차가 달릴 수 있는 모든 지역을 호화스럽게 여행했다. 그의 추종자들과 심지어 매춘부에 가까운 여성들이 전용열차의 많은 침대석을 메웠다. 이때 그를 수행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기자 도너드W . H Donald 는 그를 ‘미친 사람’으로 보았다.
쑨원을 정치세계로 불러들인 시대의 흐름
철도파업이 원인이 되어 혁명무장 세력에 의해 일어난 신해혁명과 쑨원이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어 아시아 최초의 공화체제를 만든 중화민국을 계기로 중국은 ‘정당정치’가 열리게 된다. 쑨원이 물러나고 위안스카이가 비록 정권을 잡았지만 혁명의 바람은 잠시 숨죽이고 있었을 뿐 이다.
산등성이 봉화 불이 점화되듯 중국 전역에서는 서서히 수많은 정당들이 경쟁적으로 출범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정당들은 서로 생존하기 위해 연합하면서 정당통합운동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쑨원을 정치세계로 시대가 불러내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 국민당을 창당한 쑹자우런宋敎仁(앞줄 오른쪽 둘째). 앞줄 왼쪽 첫째 황싱 .앞줄 가운데 후잉, 1905년 일본 도코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동맹회의 창립회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열렬한 민주혁명가인 쑹자오런宋敎仁이 다른 동맹회 동지들과 더불어 동맹회를 뼈대로 삼아 다른 정당들을 합병한 뒤 국민당을 결성하면서 쑨원을 이사장으로 추대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반청사상을 지녔던 쑹자오런은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며 민주공화제 이념을 더욱 열렬히 받아들였으며 쑨원을 추종했다. 그는 조선의 독립에도 관심을 갖고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을 지원했다.
쑨원을 정치세계로 불러내는 원인 제공자는 위안스카이에게도 있었다. 그는 임시대총통에 취임하자마자 임시약법을 무시하고 민주세력을 탄압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이에 맞서 임시약법을 탄생시키는데 앞장섰던 동맹회세력은 위안스카이를 공격하게 됐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쑨원이 그 공격의 선봉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이제 1913년 2월 실시된 선거를 통해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압승을 거둬 제1당으로 진출한 국민당은 내각책임제를 구현하고자 했다. 위기감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자객을 시켜 국민당의 실질적 1인자인 쑹자오런을 1913년 3월 20일 암살한다. 그의 나이는 겨우 31세 젊은 나이였고, 상하이역에서 연설 하던 중 암살당한다.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을 암살하면 국민당이 분열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계산이었고 국민당을 위축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격발시켰다. 위안스카이의 무리한 조치는 훨씬 더 강도를 더했다. 외국 다섯 곳으로부터 거액을 차관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당시 중국은 상당한 외채압박에 시달리고 있을 때라 이 조치는 망국적인 결정이었고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끝까지 굽히지 않고 정식대총통에 올랐으며 마침내는 국회를 해산하고 임시약법을 폐지했다.
일본 망명길에 오른 쑨원
1913년 7월 쑨원은 위안스카이 타도를 외치면서 제2혁명의 선두에 섰다. 쑨원의 주장에 호응해서 여기저기에서 ‘위안타도’를 외치는 반란의 기세가 드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매수공작으로 반란군을 분열시켰고 강력한 휘하부대를 휘몰아서 이들을 공격했다. 외세도 위안스카이를 도왔다. 결국 반란군은 약 2개월 만에 와해되고 쑨원은 재차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 1914년 7월 8일 도쿄 중화혁명당 창당 사진
참담한 심정을 가진 쑨원은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동맹회 동지들과 손을 잡고 1914년 7월 도쿄에서 중화혁명당을 창당하게 된다. 쑨원의 생각은 위안스카이로 축약되는 중국수구세력과 외세의 공동합작 때문에 국민혁명이 실패 했다고 보았기에 중화혁명당을 중심으로 국민혁명에 다시 불을 지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국민당이 너무 개방적인 정당이라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레닌이 내세운 음모가적 비밀정당 원칙에 충실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