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을 중심으로 본 청조의 전후 역사
10월 10일 일어난 쌍십절雙十節 신해혁명
신해혁명은 돼지해인 신해년辛亥年에 일어나서 ‘신해혁명’이라 불리고 후베이성湖北省 우창武昌에서 반청 무장봉기로 일어났기에 ‘우창혁명’이라고도 불린다. 우창혁명이 일어난 날이 10월 10일, 월과 일이 짝을 이루어서 쌍쌍雙이란 뜻을 가진 ‘쌍십절雙十節’이라고도 부른다.
즉 신해혁명과 우창혁명, 쌍십절은 똑같은 의미이고 이 혁명을 주도한 세력이 부르주아계급이었기에 이 혁명 자체를 부르주아혁명이라고도 부른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계기는 서태후가 죽고 힘없는 푸이가 등극하면서 촉발되었다. 황권을 둘러싼 힘겨루기에서 국가의 재정은 이미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1911년 5월 국가의 혈맥통로인 철도 두 개를 외세에 팔기로 결정한데서 혁명은 예견된 수순으로 들어서게 된다.
▲ 1911년 신해혁명 때 시골농부의 변발을 자르는 혁명군
이 결정은 중국 남부지방에서 대규모 철도보호운동을 유발시켰다. 쓰촨성四川省에서 총독이 발포를 명령함으로써 유혈참사가 빚어지자 이 운동은 곧바로 무장투쟁으로 바뀌었다. 그 연장선 위에 1911년 10월 10일에 후베이성湖北省의 우창武昌에서 반청反淸 무장봉기가 발발했다. 혁명군은 우창을 장악한데 이어 한양漢陽과 한커우漢口를 점령했다. 이른바 우한심진武漢三鎭(우창, 한양, 한커우)을 장악하게 된 혁명군은 청조의 명망가를 자신들의 우두머리로 내세우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해, 천조 신군新軍의 고위지도자였던 뤼위안훙黎元洪을 도독으로 추대하고 ‘후베이군정부湖北軍政府’의 출범을 선언했다. 이 정부는 청조의 연호 선통宣統을 폐지하고 국호를 〖중화민국〗으로 고쳤다.
청조로부터 독립 선언하는 전국의 성省
‘후베이군정부’가 출범을 선언한 후 반청혁명 기운이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약 1개월 쯤 지나서는 전국의 67%에 해당하는 14개성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12월에는 각성의 대표들이 중국 중부지역의 중요도시인 난징을 중화민국의 임시수도로 결정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이 모든 상황전개에 혁명군이 주도권을 장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혁명군의 힘은 제한되어 있었기에 지역에 따라서는 입헌파가 또는 입헌파와 구세력의 연합세력이 각각 반청혁명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세력배분이 지역적 요소와 얽히면서 혁명의 주도권을 놓고 양쯔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군벌 위안스카이遠世凱의 야심과 이중전략
▲ 1911년 신해혁명 당시 위안스카이의 권력 기반이었던 북양군이 훈련받고 있다(좌) 황제 즉위직전의 위안스카이(우)
혁명군이 힘들었던 점은 각성의 대표자들을 집단•통일화 시킬 수 있는 구심점이 없었기에 그들 대표자들의 의견은 중구난방으로 엇갈렸다. 더불어 막강한 군사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위안스카이는 개인적인 야심이 많았고 그 야심을 채우는 데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비한 술수를 사용했다. 이 야비한 술수의 덫에 쑨원도 보기 좋게 걸려들게 된다. 또한 혁명군과 청조를 저울질하는 이중전략을 쓰면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는데 활용했다.
▲ 위안스카이는 슬하에 17남 15녀 모두 32명의 자녀를 두었다. 자녀들과 함께 자리한 위안 스카이(가운데)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삼은 군벌 위안스카이遠世凱의 등장이었다. 즈리성의 총독과 중앙정부의 외무대신 및 군기대신을 지낸 그는 중국 북부지역의 실세였는데, 반외세를 부르짖는 혁명정부의 등장에 두려움을 느낀 서양제국주의자들은 그만이 혁명세력에 맞서 싸울 힘을 지녔다고 보고 힘껏 뒷받침했다. 청조 역시 똑같은 발상에서 그에게 총리대신을 맡김과 아울러 혁명군 토벌의 최고책임을 맡겼다. 그때 50세였던 위안스카이는 야심가였다. 청조가 소생할 수 없음을 이미 간파한 그는 때때로 혁명군을 공격하면서도 청조와 혁명군 사이를 조정하며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전략을 쓰기 시작했다.
망명지 미국에서 귀국한 쑨원의 임시대총통 취임과 중화민국의 성립
▲ 1912년 2월 15일 난징에서 쑨원이(가운데) 임시정부 관원들과 함께 한족(漢族)의 마지막 왕조였던 명(明)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障)의 능을 참배하고 있다. 신해혁명은 만주족 왕조였던 청나라를 무너뜨린 민족혁명이었다.
힘이 미약했던 혁명군과 각 성 대표자들의 연합전선 그리고 군벌 위안스카이가 이중 전략을 쓸 시점에 쑨원이 망명지 미국에서 유럽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다. 이 당시 상하이는 무혈혁명을 통해 도둑에 취임한 동맹회의 간부 천치메이陳其美가 장악하고 있었다.
구심점이 없었던 16개성의 대표들로 구성된 난장의 혁명정부는 12월 29일에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했다. 쑨원은 1912년 1월 1일에 취임하면서 이날을 중화민국 원년 1월 1일로 정했다. 이렇게 성립된 중화민국은 아시아에서 성립된 최초의 공화체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