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휘몰아 선통제 푸이를 퇴위 시키는 위안스카이遠世凱
청조의 온갖 패악을 말소하기 위해서 결성된 혁명군은 있었으나 각성의 혁명대표는 독립되어 있었고 남북으로 갈리어진 연합체 내분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쑨원은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에 선출 한 후 ‘중화민국 임시약법’을 재정하고 3월 11일 공포했다.
약법은 일종의 임시헌법으로“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 한다”는 제2조를 포함해, 서양자유민주주의국가의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에 관한 조항들을 마련했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 임시약법은 상당히 민주적인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쑨원은 여전히 정식정부를 구성하지 못한 임시 혁명정부의 총통이라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게 된다.
우선 자체 힘이 약했다. 거기에 더해, 남북대치는 점점 노골화됐고 재정난도 심해졌다. 이것을 간파한 제국주의국가들은 내분을 조장해 마침내 입헌파로 하여금 위안스카이를 지지하게 했다. 또 제국주의국가들은 남북화해를 요구하는 방식을 통해 혁명세력에 정권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위안스카이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쑨원과 260년 만주족이 세운 청조의 종말
쑨원은 임시정부의 총통으로 대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군벌 위안스카이의 적수가 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청조를 종식시키겠다는 열망이었고 앞으로 다가 올 미래를 위해서 자신이 현재까지 추구한 목표가 달성됐다고 판단한 쑨원은 모든 것을 위안스카이에게 이양하기 위해서 협상을 제의했다.
황제가 퇴위하여 왕정체제를 끝내고 공화체제를 출범시켜야 하며 특히 위안스카이가 공화체제의 출범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야 한다는 전제를 내걸고, 첫째 난징을 공화정부의수도로 정하고, 둘째 위안스카이 스스로 난징에 내려오며, 셋째 임시약법을 준수한다는 세 가지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은 임시대총통을 위안스카이에게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첫째 조건과 둘째 조건을 제시한 이유는 구세력이 자신들의 집결지인 베이징을 중심으로 반동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개연성을 막으려는 데 있었다.
▲ 베이양군벌. 일명 북양군벌로 독일 교관의 안내로 참모들과 함께 신건육군 新建陸軍을 열병하는 위안스카이(가운데 작고 통통한 사람)
쑨원의 세 가지 협상제의를 조용히 받아들인 위안스카이는 지휘 칼날을 뽑아들고 군대를 동원하여 권력야욕을 채우기 시작한다. 먼저 청조를 종식시키기 위해, 청조의 유지를 목적으로 조직된 종사당宗社黨의 간부들을 암살했다.
종사당이란 청조 선통제 말기에 황족과 대신들이 공화제를 반대하고 황제 중심의 청나라로 복귀하고 만든 단체이다. 아울러 군대를 휘몰아 조정을 겁박해, 일곱 살이 채 안 된 선통제 푸이가 퇴위하도록 만들었다.
이 선통제 푸이가 바로 영화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의 주인공이다. 1912년 2월 12일 260여년에 걸친 만주족 지배가 끝을 내리면서 2천여 년 동안 중국을 지배한 봉건적 황제(왕)중심의 군주제는 무대 속으로 사라졌다.
위안스카이 약속 파기로 인한 반半식민 반半 봉건사회로의 복귀
쑨원이 추구한 목표는 오직 부패한 청조인 군주제하의 황족과 대신들에게 더 이상 중국의 운명을 맡긴다면 외세의 침탈로 인해서 망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쑨원은 자신이 생각한 혁명이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해서 임시대총통에서 물러나 위안스카이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쑨원의 이러한 결정은 중국 안팎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력을 양보한 큰 정치가라는 칭송을 받았고 미국의 한 유력지는 그를 “중국혁명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곧바로 감추어 두었던 속셈을 드러냈다. 쑨원과의 약속인 난징을 수도로 정하겠다던 약속을 파기하고 3월 10일 베이징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뒤이어 대지주세력과 대매판세력 및 베이양군벌北洋軍閥을 뼈대로 하는 수구적 반동정권을 세원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에서는 베이양군의 군벌 통치 시대가 열렸다.
대매판大買辦세력과 베이양군벌北洋軍閥은 무엇인가
▲ 베이양군벌. 일명 북양군벌로 관우의 '청룡언월도'와 유사한 모양 무기를 소총과 함께 휴대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던 1970-80년대 시점 운동권 학생들이 주로 사용했던 용어가 ‘매판자본 물러나라’ 혹은 ‘매판자본 타도하자’는 구호였다. 이 매판買辦이라는 용어는 원래 중국의 유교사상인 직업적 신분에 따라 차별되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정신에서 출발했다.
가장 하층 신분인 상인들이 1770년대 즈음 중국에 자리 잡은 외국 영사관에 업무를 보는 자국인에게 본국에서 공수된 생활필수품과 공물을 선박에 하역하는 인부노릇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초기에는 순수한 상인활동에 머물렀지만 청조 말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열강인 영국의 아편 밀수부터 값비싼 영국의 물품을 값싼 중국의 원료와 맞바꾸면서 많은 이득을 취했고 아편 판매 중계무역을 하면서 청조 백성들의 생활을 파탄 시키는 행동을 자행했다. 즉 이들은 외세 열강제국주의의 하수인 중계 역할을 수행하면서 수많은 이득과 함께 국가를 도탄에 빠트리는 짐승 같은 일을 서슴없이 자행한 것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이들이 저지른 행위는 유교적 신분사상인 사농공상의 가장 하층 신분임을 스스로 보여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 조선 별기군 모습
베이양군벌은 위안스카이가 만든 서양식 신식육군부대로 베이징정권을 장악한 군대를 말한다. 제국 열강들은 위안스카이를 혁명군과 싸울 대리인으로 선정해서 최신식 서양무기를 건네주고 그들에게 신식훈련을 전수해 주었다. 마치 일본이 조선 말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신식무기를 제공하고 80명의 건장한 남자들을 뽑아서 별기군別技軍이라 이름 붙이고 일본교관 호리모도가 훈련을 시킨 것과 흡사하다. 이들 별기군은 구식군대보다 피복, 급료등 대우가 좋았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식군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구식군대에게는 급료를 제때 지급하지 않았고 몇 달 밀려서 지급한 쌀에 모래를 섞어서 지급했기에 구식군대가 폭동을 일으키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일본군 장교 호리모도이하 일본인이 살해되고 대원군이 재집권 하면서 신식군대는 해체되어 원래 군을 통제하는 오군문五軍門의 본대로 돌아가게 된다.
중국이 위안스카이의 약속 파기로 신식군대로 무장한 베이양군벌의 통치시대를 열었다면, 조선 말 신식군대는 구식군대의 임오군란으로 신식군대가 해체됐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쇄국정책을 쓰던 대원군이 구식군대의 폭동으로 재집권했고, 중국은 쑨원이 자산계층의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조를 뒤엎기는 했지만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착취와 압박을 제거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즉, 민주공화국으로의 중화민국은 불과 5개월 정도 유지되다가 붕괴됐다는 뜻이고 여전히 반半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로 되돌아갔다는 것이 중국과 조선말의 같은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