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8 <속裏>
조감도鳥瞰圖, 건축용어다. 사전을 찾아봤더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상태의 그림이나 지도라고 나온다. 다시 말하면 설계해서 지을 집인데 시공 전에 완공된 후의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 본 듯이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조감도를 보면 완공될 건물의 전체적은 모양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신앙을 하면서 상제님께서 설계한 천지집의 조감도를 그려보고 싶었다. 수많은 상제님 말씀을 한데 묶을 말씀은 무엇일까, 한 때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러나 상제님 천지집의 조감도를 그려보기엔 내 신앙 이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지식은 너무나 얕았다. 바램은 쉬이 그 그림을 내게 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 이것이다’ 할 만한 문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입도하던 날 축하 선물로 받은 책이었다. 처음엔 투박한 제목이 맘에 들지 않아 혼자 투덜대기도 했었다. ‘제목이 뭐 이래’. 그러나 신앙이 해를 거듭하면서 그 것은 꽃이 되어 내게로 다가왔다. 안 종정님이 1987년에 대원출판사를 통해 발행한 책 <강증산과 후천개벽>은 그렇게 나의 꽃이 되었다. 그래서 한 때 이 향기에 취해 혈기 방장한 청춘이 시들어가는 줄도 몰랐다.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개벽화
갓 피어난 어여쁜 그 향기에 탐나서
정신없이 보네 개벽화야 개벽화
들에 핀 개벽화
<강증산과 후천개벽>이라는 문구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개벽이란 역학 단체에서 말하는 것처럼 저절로 개벽이 아니라 강증산이란 분과 함께 하는 개벽이란 뜻을 담고 있다. 여기까지는 굉장히 훌륭한 그림이다.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셨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전율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보면 모든 문제를 ‘후천개벽은 병겁’이라는 등식을 도정운영의 기본원리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본원리는 사람의 정신을 병들게 만들었다. 모두가 시두와 지축정립과 병겁의 공포 속에 함몰되었다. 이 속에서 정심正心의 싹은 자라나지 않았다. 모두가 조급하기만 하였다. 개벽의 환란 속에서 구원받아 살고 싶었고 더 나아가 도통도 받고 싶었다.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를 읽어보면 부도 맞은 개벽 때문에 일그러진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애잔히 그려진다.
시 제1호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중략)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낫소)
이 오감도는 1934년 7월에 조선 중앙일보에 수록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시를 불안과 절망에 허덕이는 인생의 단면을 그린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무서운 아해는 가해자, 무서워하는 아해는 피해자, 13인의 아해는 불길스러움, 타락한 무리라 설명한다. 막다른 골목은 절망적이고 암담한 현실적 상황으로 해석한다.
우리 신앙인이 보았을 때 막다른 골목이란 개벽에 올인하다 망가진 삶이다. 가진 것만 없는 것은 그나마 낫다. 가진 것도 없는데 빚더미에 앉았다는 것이 절망이다. 개벽으로 치닫는 선천의 끄트머리에서 희망을 붙잡았다 생각했지만 그것은 더 큰 절망을 낳았다. 개벽은 늘 그렇게 부도수표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내버리고 싶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절망이다. 개벽이 유일한 희망이지만 현실은 그저 암담할 뿐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놓아버리면 될 텐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강증산과 후천개벽>이란 문구는 상제님이 설계한 천지집의 조감도鳥瞰圖가 아니다. 이것은 오감도다. 조鳥와 비슷한 까마귀 오烏자의 오감도烏瞰圖도 아닌 말午 자의 오감도午瞰圖인 것이다. 서나파에서는 새 조鳥자를 놓고 굳이 안 종정님이라 말할 필요는 없다. 용봉龍鳳은 상제님 태모님이질 않던가. 그러니 오감도午瞰圖는 조감도鳥瞰圖와는 많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상제님 태모님의 이상향과 일치하지 않은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손가락에 물을 찍어 튕기는 것만큼이나 쉬운 것이 개벽이니 개벽을 기다리지 말라고 하셨다. 마음을 잘 닦으라 하셨을 뿐이다. 그러나 오감도午瞰圖는 개벽을 중요시 여겼다.
그런데 왜 그동안 상제님 신앙인들은 개벽을 신앙의 모토로 삼았을까?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먼저 겉껍질이 썩어야 비로소 싹이 올라온다. 특히 잔디 씨앗을 땅에 파종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잔디 씨앗은 일반 씨앗과 달라 겉껍질이 쉬이 잘 썩어 벗겨지지 않는다. 어설프게 공을 들였다간 파종한 잔디밭을 갈아엎을지도 모른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려면 겉껍질이 푹 썩어야 하는 것이다. 상제님 대도의 겉껍질은 잔디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단단하여 잘 썩지 않은 양이 견줄만한 씨앗이 없다. 이 껍질이 썩는 데만 자그마치 105년이나 걸린다.
세상 속에 떨어진 상제님 대도씨앗의 겉껍질은 무엇일까. 무엇으로 상제님 대도의 고갱이를 싸놓았을까. 그것은 개벽이다. 상제님 대도의 참 빛은 종말적 개벽문화라는 겉껍질에 쌓여 100여 년을 지났다.
시운이 그랬다. 그 시절 민중의 생활이 어려웠다. 그래서 개벽으로 상제님 일이 한순간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행복해지리라 여겼다. 지상천국이 그렇게 간단히 오리라 단순하게 믿었다. 개벽만 되면 조선이 일등국이 되어 전 세계를 지배하리라 생각했다. 이 속에서 왕후장상을 꿈꾸기도 했다. 그 어려운 세상을 살던 민중들은 개벽이 나름의 피안 처였다. 만약 그 때부터 이것을 우리 손으로 역사 속에 이루어야 한다고 알았다면 민중들은 상제님 신앙에 힘들었던 삶을 의지하려 들지 않았을지 모른다. 지금 당장 내 한 몸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새 세상을 내 손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면 듣는 순간 질려버렸을지 모른다. 7080 때에도 개벽은 통했다. 그 시절도 암울했다. 어려운 시절에 개벽을 총정리한 안 종정님의 책은 이 시대를 풍미했다. 이로부터 개벽의 겉껍질은 더 푹 썩어 벗겨져 갔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 개벽은 민중의 가슴에 북이 되지 못한다. 개벽이라는 한탕 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개벽으로 상제님 일이 일시에 이루어진다고 얘기를 하면 그저 웃을 뿐이다. 허황되다는 말이다.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접한 이들은 더 이상 개벽의 도깨비 방망이를 꿈꾸지 않는다. 혹자는 이 세상이 이대로 유지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개벽이라는 말에 화답을 한다. 육임군 군령에 참여하기보다 소주 한 잔하며 정담 나누는 것을 더 원한다. 세상은 이 처럼 변했다. 세상은 이제 상제님의 알갱이 깊은 속내가 드러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상제님 대도의 속 알맹이는 무엇인가. 만인함열萬人咸悅이다. 다시 말하면 땅위의 모든 사람이 기뻐하며 행복할 수 있는 지상천국인 선경건설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사재인하여야 한다. 인간의 평등원리를, 노예제도의 부당성을 인간의 혁명을 통해서 이루었듯이 사람이 개혁하고 혁명하여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지상에 사는 만인이 기뻐할 제일의 조건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지상천국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육신을 갖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녹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것이 아니다. 안빈낙도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태모님께서 사형선고를 내리신지 오래다. 지상의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녹이 부족하지 않아야 한다. 오직 녹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뿐이다. 돈이 없어 빚에 찌든 삶이란 지옥과 다를 바 없다. 차라리 죽는 것이 행복할지 모른다. 육신은 녹 떨어지면 죽는 것이 만고의 진리다.
상제님께서는 ‘천지 녹지사가 모여들어 선경을 건설한다.’ 하시었다. 우리가 후천 지상선경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성구를 외우고 주문만 읽고 앉았다가 개벽의 의통목만 집행해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하면 의통목도 집행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의통목이 오기 전에 세상의 녹을 상제님 일꾼들이 지배하여야 한다. 지상에서 녹을 지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녹을 지배하여 정신을 개벽할 수 있는 것이다. 일꾼들이 지배한 녹을 상제님의 정신으로 고루 분배하는 것이 육신을 갖고 사는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는 제 1의 법칙이다. 지상천국은 곤덕인 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제님의 일꾼 된 자 녹 창출에 성심을 다해야 한다.
이순신님의 <SNS 난법일기 24-천하사는 통일문화이다>라는 글을 읽으며 난 아래와 같은 말을 발췌하여 댓글에 올릴 바 있다.
<수신의 바탕위에 직업이란 집을 지어야 천하통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직업은 너무나도 고귀한 것이며 이상이며, 하느님 모시 듯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아에 허덕이는 저들을 누가 무엇으로 구원할 것인가 오직 녹으로 할 뿐이다. 녹 속에 진리의 알맹이가 다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최소 비용 최대 이윤’이라는 인간차별의 경제 원리를 만인함열萬人咸悅의 경제 원리로 이화시킬 수 있는 것도 오직 녹으로 할 뿐이다. 역사회복도 오직 녹으로 할 뿐이니 역사가 대세를 돌려 잡지 못한다.
안 종정님을 중복살림의 주인이라 한 것은 다분히 이 때문이다. 책을 편찬해 상제님의 세상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므로 안 종정님은 천지 녹을 경영할 새로운 사명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녹을 창출해 상제님 진리를 성사재인 할 수 있는 인물에게.
그렇다고 종정님의 공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종정님의 공덕은 도사에 길이 빛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상제님께서 경만장 경만장 경만장이라 하시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