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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3-08 18:58
<천주집>이벽의 급서 후 다시 일어난 천주교. 다산은 다시 천주교에 빠져들었다
 글쓴이 : 게리
 


이벽의 급서 후 다시 일어난 천주교... 다산은 '익명의 신부'로


<21>교회 재건과 10명의 신부

초기 교회 세례 장면.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았으나 신도들은 최선을 다해 정중하게 치렀다. 
탁희성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
이벽을 애도한 박제가의 만사 

1785년 7월, 이벽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두 사람이 추도시를 남겼다. 하나는 앞서 소개한 다산이고, 다른 한 사람은 뜻밖에도 박제가다. 박제가는 1778년과 1790년, 1801년 등 4차례에 걸쳐 사신행차를 수행했던 중국통이었다. 그는 ‘북학의’를 지어 나라를 개방 모드로 바꿔야 함을 역설했다. 둘의 교분은 신분과 당색조차 달라 뜻밖이다. 이벽이 서학에 대한 관심을 매개로 박제가에게 먼저 접근했을 것이다.

박제가는 1788년 4월 유금(柳琴)이 세상을 떴을 때, 그를 포함해 평생에 가까웠던 네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도시(四悼詩)’를 지었다. 그 중 한 편이 ‘이덕조(李德操)’이다. 덕조는 이벽의 자(字)이다. 이벽의 죽음을 가슴에 묻어두었다가 세 해를 묵힌 뒤에 썼다. 안 알려진 자료여서 길지만 소개한다.

진인(晉人)은 명리를 숭상하여서

청담으로 그 시대 어지럽혔지.

덕조는 천지 사방 논의했으나

어이 실제에서 벗어났으리.

필부로 시운(時運)에 관심을 두고

파옥(破屋)에서 경제에 뜻을 두었네.

가슴속에 기형(璣衡)을 크게 품으니

사해에 그대 홀로 조예 깊었지.

사물마다 본성을 깨우쳐 주고

형상마다 비례를 밝히었다네.

몽매함이 진실로 열리지 않아

훌륭한 말 그 누가 알아들으랴.

하늘 바람 앵무새에 불어오더니

번드쳐 새장 나갈 계획 세웠지.

살던 곳에 남은 꿈 깨어나서는

푸른 산에 그 지혜를 묻고 말았네.

세월은 잠시도 쉬지 않으니

만물은 떠나가지 않음이 없네.

긴 휘파람 기러기 전송하면서

천지간에 남몰래 눈물 흘리오.

晉人尙名理(진인상명리)

淸譚亂厥世(청담난궐세)

德操議六合(덕조의육합)

何嘗離實際(하상리실제)

匹夫關時運(필부관시운)

破屋志經濟(파옥지경제)

胸中大璣衡(흉중대기형)

四海一孤詣(사해일고예)

物物喩性體(물물유성체)

形形明比例(형형명비례)

鴻荒諒未開(홍황량미개)

名言孰相契(명언숙상계)

天風吹鸚鵡(천풍취앵무)

翻成出籠計(번성출농계)

蘧廬罷殘夢(거려파잔몽)

靑山葬靈慧(청산장령혜)

春秋不暫停(춘추불잠정)

万化無非逝(만화무비서)

高歗送飛鴻(고소송비홍)

乾坤暗雙涕(건곤암쌍체)

메아리가 없었다 

앞의 10구는 이벽의 학문적 성취를 말했다. 진인(晉人)의 청담은 세상의 명실을 혼란케 했지만, 이벽이 육합(六合), 즉 동서남북상하의 천지 이치를 논했던 일은 실제에 바탕을 둔 실다운 공부였다. 그는 세상의 변화(時運)를 앞서 읽고 가슴 속에는 서학의 큰 포부를 품었다. 특별히 사물마다 지닌 성체(性體)와 각 형상의 비례(比例)를 환하게 밝힌 것은 그가 거둔 가장 큰 성과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그의 깨달음에 화답하는 메아리가 전혀 없었다.

박제가의 시문집 '정유각집'에 실린 이벽 추모시.

제 11구에서 천풍(天風)이 앵무새에게 불어와, 앵무새가 새장을 뛰쳐나갈 계획을 세웠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이제껏 그는 새장에 갇힌 앵무새였다. 앵무새는 아름다운 자질을 갖추고도 말 흉내나 내며 귀한 대접을 받지만 자유가 없다. 그런 그가 천풍, 즉 하늘 바람을 쐬고 나서 자신이 누려온 새장 안의 기림을 다 내던지고 바깥으로 훨훨 날아갈 생각을 품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잔몽에서 깨어난 그는 그만 그 신령스런 지혜(靈慧)를 청산 속에 묻고 말았다.

15구에서 18구까지의 네 구절은 이렇다. 세월은 흐르고 사람은 모두 죽는다. 저 하늘 어둠 속으로 날아간 큰 고니 같은 그대를 전송하며, 나는 남몰래 두 줄기 눈물을 흘린다. 시 속의 천풍(天風)은 말 그대로 천주학의 바람이었을 것인데, 워낙 예민한 시점이어서 박제가는 모호하게 뭉뚱그려 이벽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했다. 시로 보아 두 사람은 속내를 터놓고 대화를 나누던 사이로 보인다.

정중동의 교회 재건 

이벽의 급서로 중심이 와해된 조선 천주교회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1786년 봄의 일이다. 1년이 지나는 사이, 집안의 감시망이 느슨해졌고, 서학에 대한 반대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이기양이 다짜고짜 안정복을 찾아가 일격을 가한 것도 효과가 있었다. 다산 형제도 권일신, 이승훈 등과 회동하여 교회 재건을 위한 정중동(靜中動)의 움직임을 개시했다.

다산이 천주교 활동에 한참 열을 올렸던 1785년과 1786년, 그리고 26세가 되던 1787년 3년간 ‘사암연보’의 기사를 보면 성균관 유생으로 각종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내용 밖에 없다. 천주교 관련 사실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연보 속의 그는 공부 밖에 모르던, 연거푸 우수한 성적을 거둬 정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모범적인 수험생일 뿐이었다. 추조 적발 사건은 물론, 이벽의 죽음조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

1979년 6월 24일 봉헌된 이벽 추모미사. 이벽의 본명축일인 세자 요한 축일대미사로 김수환 추기경과 노기남 대주교의 
공동집전으로 치러졌다. 천주교천진암성지홈페이지
1979년 6월 21일 경기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공동묘지 터에서 진행된 이벽 묘소 발굴 작업 당시 
발견된 지석.

1789년 말에 이승훈이 북경 천주당의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고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토의하려고 1786년 봄에 모임을 가졌습니다. 갑은 을에게, 을은 병에게 고해를 할 수 있지만, 갑과 을이 서로, 혹은 을과 병이 서로 맞고해를 하는 일은 없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같은 해 가을에 다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모임에서 그들은 미사를 집전하고 견진성사를 주는 일을 제가 맡아 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다른 열 명에게도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신자들끼리 맞물려 돌아가며 고해성사를 행했다. 이승훈이 북경 천주당에서 본대로 흉내를 낸 것인데, 나름의 규칙은 분명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누군가에게 고백하여 그 잘못을 용서 받는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사 전례와 성사 시행 이후 교인의 숫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가성직 제도와 10명의 신부 

그들은 이승훈을 교회의 책임자로 세워 이벽의 빈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이승훈은 미사 전례와 견진성사를 집전하였다. 1786년 가을에는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면서 각 지역의 신자들을 관리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역할을 담당할 10명의 신부(神父)를 이승훈이 직접 임명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인 없이 자기들끼리 임의로 신부를 임명하면서 교단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를 교회사 용어로는 ‘가성직(假聖職) 제도’라 하는데, 이때 가(假)는 ‘가짜’가 아닌 ‘임시’의 뜻이다.

확실히 조선의 천주교회는 그 출범부터 달리 유례가 없을 만큼 기이했다. 가톨릭의 역사에서 선교사가 파송되기 전에 자기들끼리 교리책을 공부해서 영세 주고 신부를 임명해 미사까지 봉헌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중국 교구는 조선에서 막 태동한, 이 서툴지만 열성에 넘치는 이 공동체를 경이에 차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승훈이 임명한 신부 10인의 명단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권일신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주교로 지명되고, 이승훈 베드로, 이존창 루도비꼬 곤자가, 유항검 아우구스띠노, 최창현 요한, 그 밖의 여러 사람이 신부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지역에서 설교하고 영세를 주고, 견진성사를 행했다. 신자끼리 행하던 고백성사는 이후 사제가 전담하게 되었다. 미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영하게 하는 등 신부로서의 직임을 각 지역에서 개시하였다.

미사를 준비하는 신도들의 열성도 대단했다. 이들은 화려한 중국제 비단으로 미사 집례 때 신부가 입을 제의(祭衣)를 지어 입히고, 정성껏 미사에 임했다. 1786년 가을, 신부를 결정하던 모임에는 권일신, 이승훈, 정약용 형제가 참여했다. 임명한 신부가 10명이라 했는데, 확인된 명단은 권일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 5인뿐이다. 별도의 기록에 홍낙민과 최 야고보가 더 보인다. 나머지 확인되지 않은 3명은 누구일까? 적어도 이 중 두 사람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이다. 두 사람은 조선 교회의 출범 당시부터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 어째서 빠졌을까? 달레가 애초에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 이 기록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산은 이 부분을 기술하면서 자기 형제의 실명을 빼고 ‘그 밖의 여러 사람’ 속에 숨어버렸다.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은 이승훈이 임명한 10명의 신부 속에 포함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다산은 신부였다.

과거시험 잇단 낙방에 실의... 다산은 다시 천주교에 빠져들었다


<22> 성균관 어귀의 교회 본부

#1 
천주교 재건에 힘 보태느라 
공부 전념 못해 번번이 낙방 
10인의 사제에 임명된 걸 계기로 
서학의 바다로 다시 뛰어들어 
#2 
천주교 활동은 점차 대담해져 
회현동과 성균관 어귀 2곳에 
서울지역 집회공간 만들어 
가성직 제도 하의 미사 장면. 초기 조선 천주교는 자생적이어서 사제없이 미사를 꾸려야 했다. 
탁희성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
다시 가동된 천주교 조직 

1786년 봄부터 천주교 조직은 조금씩 다시 가동되었다. 이벽의 사망으로 천주교회는 구심점을 상실했다. 최고의 이론가였던 이벽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 시급했다. 신앙과 교리 전반에 대한 이승훈의 이해는 이벽만큼 투철하지 못했다. 이승훈이 공개적인 배교 선언까지 했던 것은 그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이후로도 이승훈은 위기 때마다 배교를 공언했다. 나중엔 처남 다산도 등을 돌려, 남매 사이마저 틀어지고 말았다. 이승훈은 북경의 서양 신부에게서 정식 절차를 밟아 영세를 받아온 조선 유일의 입교자였다. 그를 배제한 교회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반면 권일신은 양근(지금의 양평) 일대에서 대단한 위세로 교세를 확장해가고 있었다. 멀리 충청도에서 이존창 같은 사람이 찾아와 머물며 공부를 했다. 전국에서 천주교 영재들이 모여 들었다. 양근은 조선 천주교회의 온상이요 못자리였다. 달레가 ‘조선천주교회사’에서 10명의 신부 중 권일신이 주교였다고 한 것은 그의 실제적인 영향력과 위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1786년 당시 다산은 과거 시험 준비에 힘쓰는 한편으로 자형 이승훈과 권일신 등이 주축이 된 천주교 재건에 드러나지 않게 힘을 보태고 있었다. 과거 공부에만 온전히 몰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번번이 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시는 결과로 이어졌다.

돼지처럼 씩씩대며 

1786년 2월 3일 별시 초시에 합격하고, 사흘 뒤인 2월 6일의 복시, 즉 2차 시험에서는 불합격했다. 당시 심경을 다산은 ‘감흥(感興)’ 2수에 남겼다. 제목에 ‘이때 과거에 낙방했다(時下第)’라는 풀이가 달려 있다. 둘째 수만 읽는다.

세상살이 술 마시는 일과 같아서

처음에는 따져가며 잔에 따른다.

마신 뒤엔 문득 쉽게 술이 취하고

취한 뒤엔 본디 마음 혼미해지네.

정신 놓고 술 백 병을 들이키면서

돼지처럼 씩씩대며 계속 마시지.

산림에는 드넓은 거처가 많아

지혜론 이 진작에 찾아간다네.

마음에만 품을 뿐 갈 수가 없어

하릴없이 남산 그늘 지키고 있네.

涉世如飮酒(섭세여음주)

始飮宜細斟(시음의세짐)

旣飮便易醉(기음편이취)

旣醉迷素心(기취미소심)

沈冥倒百壺(침명도백호)

豕息常淫淫(식식상음음)

山林多曠居(산림다광거)

智者能早尋(지자능조심)

長懷不能邁(장회불능매)

空守南山陰(공수남산음)

처음엔 조금만 마셔야지 하고 잔 수를 세다가, 결국에는 에라 모르겠다하며 죽기 살기로 마셔 인사불성이 되어야 끝난다. 세상살이가 음주와 비슷하다고 했으니, 결국 쳇바퀴 같은 악순환을 끊으려면 과거 시험을 내던지고 하루라도 일찍 산림 속의 거처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늘 마음에 품고만 있을 뿐 막상 실행에 옮길 용기가 없어 답답하다.

뜬 인생의 위로 

이 시를 짓고 다산은 지금 남양주의 초천 고향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때 지은 ‘봄날 배로 초천에 돌아오며(春日舟還苕川)’이란 시의 3,4구에서 다산은 “자못 능히 경박한 세속 떠나니, 뜬 인생에 위로됨이 이미 족하다.(頗能離薄俗, 已足慰浮生)”라고 노래했다. 신앙생활과 과거 시험 준비의 교착으로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차라리 과거를 포기하고 서울을 떠나 전원에 은거하고픈 마음을 담았다. 고향 집 근처 양근의 천주교회 확산 소식이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다산 친필의 '초천사시사'. 계절별 고향집 인근의 풍경점을 하나하나 불러내서 그곳에서의 삶을 꿈꾼 내용이다. 개인소장

얼마 후 상경한 다산은 4월 중순께 가족과 함께 오래 머물 생각으로 초천에 내려갔다. 이때의 심경은 시문집에 수록된 ‘초천사시사(苕川四時詞)’ 13수에 잘 담겨있다. 고향 마을에서 자신이 꿈꾼 삶을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세세하게 스케치했다. 그러던 중 5월 11일 동궁이 급작스레 서거했다. 다산은 그날로 서울로 올라왔다. 초천에서의 전원생활이 한 달 만에 끝이 났다.

낙방의 실의와 정체성 회복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다산은 5월과 6월에는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연명으로 세자의 의약을 담당하던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6월 21일에는 같은 문제로 성균관 유생들의 권당(捲堂), 즉 파업 시위까지 있었다.

이후 다산은 성균관 유생의 본분으로 돌아와 시험 준비에 다시 매진했다. 그 결과가 1786년 8월 6일, 창덕궁 춘당대에서 열린 제술전강(製述殿講)에서 지차(之次) 즉 2등 합격이었다. 대과(大科) 전시(殿試)에 곧장 응시하려면 수석을 했어야 했다. 등수 하나 차이로 대과 응시의 기회가 다시 한 번 물 건너갔다.

속되지 않음이 귀하다 

정조가 다산을 위로했다. “네가 지은 글은 숙종조 때 여러 사람의 문체와 아주 흡사하여 속됨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귀하다 할만하다. 성취가 조금 늦어진다 하여 시속을 따를까봐 염려스럽다. 다른 것을 표방해서는 안 된다.”

정조는 다산에게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다산이 2등으로 전시에 곧장 오르지 못한 것이 애석했기 때문이다. 다산이 남인이고 채점관이 노론계였던 것이 1,2등의 자리를 바꾸게 했던 듯하다. 임금의 속뜻은 이랬을 것이다. “나는 네 글이 1등이라고 생각한다. 문체도 훌륭하고 뜻도 좋다. 이번엔 아쉽게 되었지만, 시류에 맞춰 지금의 네 모습을 바꿔서는 안 된다. 지금 그대로 노력하거라.”

최선을 다한 결과가 좌절로 끝나자, 다산은 크게 갈등했다. 이것이 다산으로 하여금 천주교로 다시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해도 안 된다. 이 의미 없는 일에 인생을 걸어야 하나? 그 즈음에 이승훈의 주도로 10명의 사제가 임명되었고, 다산은 그 한 축을 맡아 다시 서학의 바다로 풍덩 뛰어들었다.

대범해진 행보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 역사 비망기’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서울에서도 규정에 따라 모임을 가졌다. 우리는 별명이 관천(冠泉)인 최요한이 신부들을 영접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줄 수 있도록 일부러 집 한 채를 세낸 것을 보았다. 그는 활동적이고 유능한 성격으로 신부들을 영접하고 모든 일을 처리하고, 교우들을 적절하게 준비시켰고, 귀찮아하거나 피곤함을 마다하지 않고, 밤낮으로 신부와 교우들에게 헌신하기에 바빴다.”

최요한은 당시 조선 교회의 평신도 총회장으로 불렸던 최창현이었다. 그는 이승훈이 임명한 10인의 신부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달레의 기술을 보면, 그는 같은 신부라도 보좌 신부 정도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가 역관 집안 출신의 중인이었기에 엄연한 신분의 위계를 뛰어넘기 힘들었을 법하다. 최창현은 별도의 집 한 채를 세 내어 성사와 집회 장소로 제공했다. 이곳은 명례방 집회 이후 서울 지역에 두 번째로 마련된 천주교 집회용 전용 공간이었다. 행보가 점점 대범해지고 있었다.

그 집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유항검(柳恒儉∙1756~1801)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1787년 경 이승훈에게 보낸 편지가 로마 교황청 포교성 고문서고에 남아있다. 한문 원문은 없고 번역문에 표기된 발신자의 이름이 현젠(Hiuen-chen)이다. 항검의 중국음이 헝지안(Heng-jian)인데 중국 지역음의 표기가 섞일 경우 비슷하게 들린다. 이 편지 중에 당시 서울 지역의 집회 공간으로 란동(Lan tong)과 판코우(Fan kou)란 두 지명이 나온다.

란동과 판코우 

란동은 난정동(蘭亭洞) 또는 난동(蘭洞)으로 불리던, 오늘날 서울 회현동 2가 어름에 있던 공간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이곳은 다산이 이전에 살던 재산정사와, 당시 거주하던 담재가 있던 동네이기도 하다. 남인들이 밀집해 살던 이 지역에 최창현은 집 한 채를 통째로 세내어 집회와 회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판코우는 반교(泮橋) 또는 반구(泮口) 쯤으로 추정된다. 반교는 명륜동 어귀 성균관이 있던 반동(泮洞)으로 가려면 건너야 하는 다리다. 반교는 중국음으로 판치아오(Pan qiao)이고 반구는 판코우(Pan kou)다. 반동 어귀란 의미다. 이민보(李敏輔)의 ‘풍서집(豊墅集)’에 “화석상전반구촌(花石相傳泮口村)”의 싯귀가 있다. 반구촌은 바로 반교 어귀의 마을이란 뜻이다.

판코우가 반교 또는 반구를 지칭한 것이라면, 난동 외에 성균관 어귀에 또 하나의 천주교 공간이 있었던 셈이다. 이곳은 이듬해인 1787년 11월,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성균관 유생 몇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놓고 강습하다가 이기경에게 들켜 물의를 빚었던, 중인 김석태(金石太)의 집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대담하게도 성균관의 턱 밑에 아지트를 마련해두고, 포교와 신앙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던 셈이다. 안정복의 앞선 우려는 이 같은 사정을 꿰뚫어 알고 있던 데서 나온 것이었다. 란동과 판코우, 이 두 곳은 실로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헤드쿼터였다. 이곳에서 교리서 보급과 의례의 절차 등 교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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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19-03-08 19:04
 
1786년 가을에는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면서 각 지역의 신자들을 관리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역할을 담당할 10명의 신부(神父)를 이승훈이 직접 임명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인 없이 자기들끼리 임의로 신부를 임명하면서 교단을 출범시킨 것이다;;;.
게리 19-03-08 19:06
 
달레가 애초에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 이 기록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산은 이 부분을 기술하면서 자기 형제의 실명을 빼고 ‘그 밖의 여러 사람’ 속에 숨어버렸다.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은 이승훈이 임명한 10명의 신부 속에 포함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다산은 신부였다;;;.
게리 19-03-08 19:11
 
최창현은 별도의 집 한 채를 세 내어 성사와 집회 장소로 제공했다.
이곳은 명례방 집회 이후 서울 지역에 두 번째로 마련된 천주교 집회용 전용 공간이었다.
행보가 점점 대범해지고 있었다;;;.
바람의언덕 19-03-10 11:13
 
그는 세상의 변화(時運)를 앞서 읽고 가슴 속에는 서학의 큰 포부를 품었다. 특별히 사물마다 지닌 성체(性體)와 각 형상의 비례(比例)를 환하게 밝힌 것은 그가 거둔 가장 큰 성과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그의 깨달음에 화답하는 메아리가 전혀 없었다.
바람의언덕 19-03-10 11:14
 
시 속의 천풍(天風)은 말 그대로 천주학의 바람이었을 것인데, 워낙 예민한 시점이어서 박제가는 모호하게 뭉뚱그려 이벽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했다. 시로 보아 두 사람은 속내를 터놓고 대화를 나누던 사이로 보인다.
바람의언덕 19-03-10 11:16
 
신자들끼리 맞물려 돌아가며 고해성사를 행했다. 이승훈이 북경 천주당에서 본대로 흉내를 낸 것인데, 나름의 규칙은 분명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누군가에게 고백하여 그 잘못을 용서 받는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사 전례와 성사 시행 이후 교인의 숫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바람의언덕 19-03-10 11:17
 
가톨릭의 역사에서 선교사가 파송되기 전에 자기들끼리 교리책을 공부해서 영세 주고 신부를 임명해 미사까지 봉헌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언덕 19-03-10 11:19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은 이승훈이 임명한 10명의 신부 속에 포함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다산은 신부였다.
바람의언덕 19-03-10 11:21
 
세상살이 술 마시는 일과 같아서 처음에는 따져가며 잔에 따른다.마신 뒤엔 문득 쉽게 술이 취하고  취한 뒤엔 본디 마음 혼미해지네.정신 놓고 술 백 병을 들이키면서 돼지처럼 씩씩대며 계속 마시지.
바람의언덕 19-03-10 11:21
 
세상살이가 음주와 비슷하다고 했으니, 결국 쳇바퀴 같은 악순환을 끊으려면 과거 시험을 내던지고 하루라도 일찍 산림 속의 거처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늘 마음에 품고만 있을 뿐 막상 실행에 옮길 용기가 없어 답답하다.
바람의언덕 19-03-10 11:22
 
최선을 다한 결과가 좌절로 끝나자, 다산은 크게 갈등했다. 이것이 다산으로 하여금 천주교로 다시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해도 안 된다. 이 의미 없는 일에 인생을 걸어야 하나? 그 즈음에 이승훈의 주도로 10명의 사제가 임명되었고, 다산은 그 한 축을 맡아 다시 서학의 바다로 풍덩 뛰어들었다.
바람의언덕 19-03-10 11:24
 
란동과 판코우, 이 두 곳은 실로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헤드쿼터였다. 이곳에서 교리서 보급과 의례의 절차 등 교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겨울 19-03-10 13:34
 
1785년 7월, 이벽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두 사람이 추도시를 남겼다. 하나는 앞서 소개한 다산이고, 다른 한 사람은
뜻밖에도 박제가다. 박제가는 1778년과 1790년, 1801년 등 4차례에 걸쳐 사신행차를 수행했던 중국통이었다.
겨울 19-03-10 13:35
 
시 속의 천풍(天風)은 말 그대로 천주학의 바람이었을 것인데, 워낙 예민한 시점이어서 박제가는 모호하게
뭉뚱그려 이벽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했다. 시로 보아 두 사람은 속내를 터놓고 대화를 나누던 사이로 보인다.
겨울 19-03-10 13:39
 
1786년 2월 3일 별시 초시에 합격하고, 사흘 뒤인 2월 6일의 복시, 즉 2차 시험에서는 불합격했다.
당시 심경을 다산은 ‘감흥(感興)’ 2수에 남겼다. 제목에 ‘이때 과거에 낙방했다(時下第)’라는 풀이가 달려 있다.
산백초 19-03-10 15:13
 
그는 ‘북학의’를 지어 나라를 개방 모드로 바꿔야 함을 역설했다. 둘의 교분은 신분과
당색조차 달라 뜻밖이다. 이벽이 서학에 대한 관심을 매개로 박제가에게 먼저 접근했을 것이다.
산백초 19-03-10 15:15
 
그들은 이승훈을 교회의 책임자로 세워 이벽의 빈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이승훈은 미사 전례와 견진성사를 집전하였다.
산백초 19-03-10 15:17
 
판코우가 반교 또는 반구를 지칭한 것이라면, 난동 외에 성균관 어귀에 또 하나의 천주교 공간이 있었던 셈이다.
늘배움 19-03-10 20:10
 
앞의 10구는 이벽의 학문적 성취를 말했다. 진인(晉人)의 청담은 세상의 명실을 혼란케 했지만,
이벽이 육합(六合), 즉 동서남북상하의 천지 이치를 논했던 일은 실제에 바탕을 둔 실다운 공부였다.
늘배움 19-03-10 20:11
 
신자들끼리 맞물려 돌아가며 고해성사를 행했다. 이승훈이 북경 천주당에서 본대로 흉내를 낸 것인데, 나름의 규칙은 분명했다.
늘배움 19-03-10 20:12
 
판코우가 반교 또는 반구를 지칭한 것이라면, 난동 외에 성균관 어귀에 또 하나의 천주교 공간이 있었던 셈이다.
선유도 19-03-11 07:15
 
<<몽매함이 진실로 열리지 않아>>
사오리 19-03-13 02:51
 
"내가 너를 바라보았을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통은 대화와 몸짓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언
의 대화는 눈빛 하나로도 가능하다. 진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소통하다 보
면 무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 무언의 대화로 뜻을 전달하고 멈출 수 있
는 도구가 바로 눈빛인 것이다. 소통부재의 시대. 눈빛만으로 나누는 대화가
더 소중하고 빛날 수 밖에 없다.
호반도시 19-03-15 06:36
 
박제가는 1778년과 1790년, 1801년 등 4차례에 걸쳐 사신행차를 수행했던
중국통이었다. 그는 ‘북학의’를 지어 나라를 개방 모드로 바꿔야 함을 역설했다.
호반도시 19-03-15 06:39
 
천풍(天風)은 말 그대로 천주학의 바람이었을 것인데, 워낙 예민한 시점이어서
박제가는 모호하게 뭉뚱그려 이벽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했다.
호반도시 19-03-15 06:42
 
조선의 천주교회는 그 출범부터 달리 유례가 없을 만큼 기이했다.
가톨릭의 역사에서 선교사가 파송되기 전에 자기들끼리 교리책을 공부해서 영세 주고
신부를 임명해 미사까지 봉헌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중국 교구는 조선에서 막 태동한,
이 서툴지만 열성에 넘치는 이 공동체를 경이에 차서 지켜보고 있었다.
호반도시 19-03-15 06:44
 
최선을 다한 결과가 좌절로 끝나자, 다산은 크게 갈등했다. 이것이 다산으로 하여금
천주교로 다시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해도 안 된다. 이 의미 없는 일에 인생을 걸어야 하나?
그 즈음에 이승훈의 주도로 10명의 사제가 임명되었고, 다산은 그 한 축을 맡아 다시 서학의 바다로 풍덩 뛰어들었다.
호반도시 19-03-15 06:46
 
란동과 판코우, 이 두 곳은 실로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헤드쿼터였다.
이곳에서 교리서 보급과 의례의 절차 등 교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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