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 담론방 > 자유게시판


 
작성일 : 19-02-28 13:58
<천주집>“천주학 유행, 좌시할 수 없다”. “가문의 희망이 천주교에…” 충격받은 아버지 ‘밀착 감시’
 글쓴이 : 게리
 


“천주학 유행, 좌시할 수 없다”… 원로 학자들로 번진 논쟁 대결


<17> 남인 학맥간의 동요와 균열

이벽, 당대 논객ㆍ원로 설득 풍문에 
성균관 유생 등 적극 추종 나서 
젊은층서 서학 공부 급속 유행 
남인서도 천주교 파급력 경계령 
성호학파 좌장 안정복이 첫 포문 
“둘을 꺾어야 이벽 광풍 사라져” 
배후지목 원로 이기양ㆍ권철신에 
수차례 장문 편지로 천주학 공방 

2012년 치러진 탄생 300주년 추모제에 모셔진 순암 안정복 선생 초상. 성호 이익의 제자였던 순암은 역사책
'동사강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변 남인 성리학자들이 겉잡을 수 없이 천주학에 빠져들자 이를 강하게 비판한 
인물이기도 했다. 광주시청 제공
“천주학은 유문(儒門)의 별파” 

1784년 여름 이래 이벽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최고의 논객 이가환이 그의 논리에 무릎을 꿇었고, 그해 9월에는 원로급의 이기양과 권철신 형제마저 이벽에게 설득 당했다는 풍문이 파다했다. 성균관 유생 중에서도 재기명민한 젊은 그룹이 그를 적극 추종하고 있었다. 다산은 그들 중의 선두주자였다.

이는 1776년 정조 즉위 이래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면서, 젊은 그룹 사이에서 서학 공부가 유행처럼 번져갔던 사정과도 무관치 않다. 36세 때인 1797년에 작성해 올린 ‘동부승지를 사직하며 비방에 대해 변백한 상소(辨謗辭同副承旨疏)’에서 다산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신이 서학 책을 얻어 본 것은 대개 20대 초반입니다. 이때 원래 일종의 풍기가 있어, 능히 천문역상(天文曆象)의 주장과 농정수리(農政水利)의 기계, 측량추험(測量推驗)하는 기술에 대해 잘 말하는 자가 있으면 세속에서 서로 전해 해박하다고 지목하곤 하였습니다. 신은 그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가만히 홀로 이것을 사모하였습니다. 하지만 성품이 조급하고 경솔해서 몹시 어렵고 교묘하고 세밀한 내용은 애초에 세세히 탐구할 수가 없어 그 찌꺼기나 그림자도 얻은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사생(死生)의 주장에 얽매이고, 쳐서 이기는 훈계에 귀를 기울이며, 삐딱하고 기이하게 변론을 펼친 글에 현혹되어 유문(儒門)의 별파로만 알았습니다.”

똑똑한 젊은이라면 서양학에 대해 관심을 쏟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 추세였다. 임금도 적극 장려하던 일이었다. 그러다 점차 영혼에 대한 주장, 천당과 지옥에 대한 학설, 그리고 ‘칠극’에서 일곱 가지 죄악을 이겨내는 가르침 등을 읽으면서 유학의 별파로 알고 이 공부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변명한 것이다.

“침묵으로 죄악을 면하겠다” 

기호 남인 집단 안에서 천주교가 무서운 파급력을 보이자, 남인 내부에서도 이 같은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경계경보가 발령되었다. 성호학파의 좌장 격인 안정복(1712-1791)이 처음 포문을 열었다. 당시 73세의 안정복은 양근의 권철신(1736-1801)과는 나이 차이가 24살이나 났다. 둘은 애초에 사제간이었다. 안정복은 아우 권일신(1742-1791)의 장인이기도 했다.

안정복의 문집 '순암집' 가운데 천주교 비판 논문인 '천학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서학이 광풍처럼 번져나가는 것에 
대한 우려의 뜻에서부터 글을 시작한다. 실학박물관 소장

안정복과 권철신은 전부터 공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소모적인 논쟁을 계속해왔다. 한계를 느낀 권철신은 1772년 안정복에게 편지를 보내 더 이상 학문적 토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랬던 권철신이 1784년 11월에 안정복에게 문득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가운데 이상한 내용이 있었다.

“지난 날에는 글의 의미에만 얽매이는 바람에 실제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이 큰 죄만 입었습니다. 혼자 생각해보니 아침 저녁으로 제 허물을 구할 겨를조차 없는데 어찌 감히 다시 글에 대해 논하겠습니까? 이제껏 어리석은 견해로 메모하여 기록한 것들을 한꺼번에 모두 없애버리고, 아직 살아있을 때 오직 침묵으로 스스로를 닦아 큰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 구경(究竟)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유학을 버리고 천주학으로 전향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안정복은 권철신의 느닷없는 편지가 몹시 낯설었다. 편지 속의 그는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닌 듯 했다. 1784년 11월 22일에 다급하게 발송한 안정복의 답장은 이랬다.

“공의 편지를 받았소. 전날의 규모와 크게 다른 데다, 자못 이포새(伊蒲塞)의 기미를 띠고 있었소. 공은 어찌하여 이 같은 말을 하는 게요? 편지에 또 ‘죽기 전에 침묵으로 스스로를 닦아 큰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 궁극의 방법일 것’이라고 했더군. 이 어찌 달마가 소림사에서 면벽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아미타불만을 외워 전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부처님 전에 간절히 빌기를, 천당에서 태어나고 지옥에 떨어짐을 면하고자 하는 뜻과 다르겠는가? 나는 그대가 이 같은 말을 하는 까닭을 참으로 알 수가 없소.”

이포새는 우파새(優婆塞)와 같은 뜻으로 집에서 계율을 수행하는 재가 불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권철신의 편지는 속세를 초월한 고승의 말투에 가까웠다. 더 이상 유학의 논설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단지 침묵하며 그간의 내 잘못을 속죄하겠다. 말끝에 단호한 결심이 묻어났다.

“이벽을 그다지도 아꼈건만” 

며칠 뒤 마지못해 쓴 권철신의 답장이 돌아왔다. 상관 말라는 투였다. 안정복은 편지를 받자마자 12월 3일에 권철신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이기양이 찾아와 천주교 수양서인 ‘칠극’을 빌려가더라는 영남 선비의 전언을 거론하는 사이에, 안정복의 감정은 차츰 거칠어졌다. 그의 편지를 듬성듬성 건너뛰며 읽는다.

“그 뒤로 여기저기서 양학(洋學)이 크게 일어났는데, 아무개와 아무개가 우두머리이고, 아무개 아무개는 그 다음이며, 그 나머지 좇아서 감화된 자는 몇이나 되는 지도 모른다고 합디다. 이벽이 여러 권의 책을 안고 그대를 찾아갔다고 들었소. 이벽은 내가 평소에 아끼고 중히 여겼는데, 이제 이곳을 지나면서 들르지도 않으니 그 연유를 모르겠구려. 가는 길이 달라 이제 서로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겠소.”

앞 편지까지만 해도 돌려 얘기하던 것을 이제는 내놓고 말했다. 안정복은 이재남(李載南)과 이재적(李載績)에게 ‘칠극’을 빌리고, 유옥경(柳玉卿)에게도 편지를 보내 ‘기인십편(畸人十篇)’과 ‘영언여작(靈言蠡勺)’을 더 빌렸다. 그들과 본격적인 일전을 치르자면 이편에서도 상대의 공부 내용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이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요즘 듣자니 우리 무리 중에 연소하고 재기가 있는 자들이 모두 양학을 한다는 말이 낭자하여 덮어 가릴 수가 없구려. 그대도 틀림없이 들었을 것이오”라는 내용이 보인다.

“천주가 능히 구해줄 수 있겠는가?” 

1784년 12월 14일에 안정복은 다시 권철신에게 세 번째 편지를 썼다.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다는 결기를 담은 장문의 편지였다.

“지금 듣자니 아무 아무개의 무리가 서로 약속을 맺어 신학(新學)의 주장을 힘써 익힌다는 말이 낭자하게 오가고 있소. 또 접때 들으니 이기양이 문의(文義)에서 보낸 한글 편지 중에 자기 집안의 두 젊은이가 모두 천주학 공부를 한다고 칭찬해마지 않았다더군. 이 어찌 크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 책을 대략 살펴보니 문제가 너무 많고, 책 속의 이야기는 허탄하여 성현을 비방하는 뜻이 한 둘이 아니었네. 일전에 권우사(權于四)가 와서 자다가 서학에 말이 미쳤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 ‘중국에서도 일찍이 서학을 금하여 천 사람 만 사람을 넘게 죽였어도 끝내 금할 수가 없었고, 일본 또한 서학을 금하여 수만 명을 죽였답니다.’ 어찌 우리나라에도 이 같은 일이 없을 줄 알겠소? 설령 일망타진의 계책을 세운다 해도 몸을 망치고 이름을 더럽힌 욕스러움을 받게 되면, 이때 천주가 능히 구해줄 수 있겠소?”

오가는 말이 점차 가팔라지고 있었다. 안정복은 그 사이에 자신이 천주학에 대해 공부해 정리한 ‘천학설문(天學設問)’이 있는데 다음에 보내주겠다며 확전(擴戰)을 예고했다.

반격 

이왕에 뽑은 칼이었다. 안정복은 이기양에게도 편지를 썼다. 안정복이 보기에 천주학의 가장 배후에는 권철신과 이기양이 버티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둘의 뒷배 없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둘을 꺾어야 이벽의 광풍은 비로소 사그라질 것이었다.

“지난번 권일신이 와서 힘써 천주학을 내게 권하더군. 나는 그저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려니 했었소. 그 뒤 또 편지를 보내 내게 이를 권하면서, 천주학이 참되고 실다워(眞眞實實) 천하의 큰 근본이요 통달한 도리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소.”

경기 광주 이택재 전경. 안정복이 공부하며 제자를 키운 곳이다. 안정복은 우리 역사서 '동사강목'의 저자로 유명하지만, 
천주교에 빠진 남인들과 거센 논쟁을 볼인 인물이기도 하다.

사위 권일신이 장인을 찾아가 천주학을 함께 믿어보자고 적극 권유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때를 고비로 권철신 형제와 이기양 측의 반격도 조금씩 수위가 높아졌다.

다시 해가 바뀌었다. 1785년 2월, 안정복은 이기양에게 한번 더 붓을 들었다.

“지난번 종현(鍾峴)에서 보낸 답장을 보니 앙칼진 말이 많았소. 내 생각에 그대가 내 말을 늙은이의 잠꼬대 같은 소리로 보는 것이 분명하구려. 어이 깊이 허물하겠는가? 다만 지난번 권일신이 들렀다가, 내가 어리석은 견해를 지녀 깨닫기 어려움을 걱정한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갔다네. 이제껏 어둡고 앞뒤 막힌 생각을 종내 깨치지 못하니, 이야 말로 앞서 말한 지옥의 고통을 받는 것에 불과할 것일세 그려.”

권일신은 연거푸 장인을 찾아가 천주교의 논리를 설득하기 위한 적극적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이번 글에 실린 안정복의 편지들은 문집에는 빠진 것이 더러 있고, 친필 초고인 ‘순암부부고(順菴覆瓿稿)’ 제 10책에 날짜순으로 실려 있다. 권철신과 권일신, 이기양의 당시 편지는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가문의 희망이 천주교에…” 충격받은 아버지 ‘밀착 감시’


<18> 의금부에 들킨 명례방집회

노름판으로 알고 현장 덮친 포교 
푸른 두건 등 낯선 풍경에 당황 
명동 김범우 집서 함께 미사보던 
이벽ㆍ이승훈ㆍ정약용 형제 등 체포 
명문가 자제 많아 곳곳서 아우성 
서학책 불태우고 반성 시 쓰고… 
“천주교 포기를” 가족들 압박 거세 

남인 명문가 자제들 사이에서 천주교는 급히 세를 불려나갔다. 교인들은 중인 김범우의 명례방 집에 모여 미사를 거행했다.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에 1898년 지어진 것이 지금의 명동성당이다. 천주교서울대교구 제공
검거된 종교 집회 

1785년 3월, 의금부에 속한 기찰포교들이 명례방(지금의 명동)의 장례원(掌禮院)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 중 한 집 앞에 유독 신발이 많아 분위기가 수상쩍었다. 포교들은 노름판이 벌어진 것으로 여겼다. 가만히 염탐해 보니 방안의 광경이 사뭇 기괴했다. 수십 명의 사내들이 ‘분면청건(粉面靑巾)’, 즉 모두 얼굴에 분을 바른 채 푸른 두건을 쓰고 있었다. 손을 움직이는 동작이 해괴했다. ‘벽위편(闢衛編)’에 나온다.

얼굴에 분은 왜 발랐고, 푸른 두건은 왜 썼을까? 특별히 아랫목 중심에 사려 앉은 사내는 푸른 두건으로 이마를 가리고 어깨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그 둘레에 선비 복색의 수십 명이 둘러 앉아 그가 하는 말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저마다 책을 들었고, 행하는 예법과 태도는 유가의 사제 간보다 한층 엄격하였다.

투전 판으로 알고 현장을 덮쳤던 기찰포교들이 예상 밖의 낯선 광경에 오히려 당황했다. 현장을 수색하면서 그들은 더 놀랐다. 듣도 보도 못한 서양인의 화상이며 십자가, 수상쩍어 보이는 책자 및 물품들이 압수되었다.

천주를 믿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 

그 곳은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의 집이었다. 가운데 앉았던 사내는 이벽이었다. 자리에 함께 있던 인물들은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용 형제 및 권일신과 그의 둘째 아들 권상문이었다. 권일신의 매부인 이윤하(李潤夏)와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李寵億), 이기양의 외종인 정섭(鄭涉)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들 권철신 형제와 이기양을 정점으로 하는 남인 명문가의 쟁쟁한 집안 자제들이었다. 중인층도 여럿이 있었다.

이들은 나이를 떠나 이벽에게 깍듯한 스승의 예를 표했다. 조사 결과 이들은 벌써 여러 달째 날짜를 정해 모이고 있었다. 날짜를 정해 모였다는 말은 주일을 지켜 미사의 의식을 행했다는 의미다. 이벽이 썼던 푸른 두건은 북경 천주당의 사제들이 미사 때 쓰던 제건(祭巾)을 본떠 만든 것이었다.

급작스런 보고를 들은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더 놀랐다. 압수해온 물품은 한 눈에도 천주교의 교리 책과 예수의 화상, 그리고 집회 의식에 필요한 물품들이었다. 자칫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었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을 우려한 김화진은 장소를 제공한 중인 김범우만 옥에 가두고, 나머지는 방면하는 것으로 이 일을 덮으려 했다. 이것이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 조직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을사년 추조적발 사건’의 시작이었다.

쉬 가라앉을 것 같던 상황은 예측을 빗겨나 이상하게 돌아갔다. 김화진이 김범우에게 서학을 어째서 믿느냐고 추궁하자, 그는 “서학은 좋은 점이 너무 많은데, 이를 믿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하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사학징의(邪學懲義)’에 나온다. 그 대답으로 인해 그는 매서운 형벌을 받았다. 아무리 심한 고문을 하면서 배교를 재촉해도 김범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확신범이었다. 하지만 형벌은 그에게만 국한되었다.

물건을 돌려주시오 

해괴하고 맹랑한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날 방면한 자들이 이튿날 형조로 찾아와 앞서 압수해간 성상(聖像), 즉 예수의 화상을 돌려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던 것이다. 권일신이 앞장을 서고, 이윤하와 이총억, 정섭 등 다섯 사람이 함께 왔다. 이윤하는 성호 이익의 외손자였다. 이때 다산은 동행하지 않았다. 형조판서 김화진이 화를 벌컥 내며 이들의 무모한 행동을 꾸짖었다. 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눈에 뭔가 씐듯했다.

사건 직후 성균관 유생 이용서(李龍舒)와 정서(鄭漵) 등 여러 사람이 연명으로 올린 통문(通文)에 당시 이들이 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들은 형조판서에게 자신들도 김범우와 똑같이 처벌해 달라면서, “다만 원하기는 육신을 속히 버리고 영원히 천당에 오르고 싶을 뿐(惟願速棄形骸, 永上天堂)”이라고 했다. 그들은 다음날도 오고 그 다음날도 또 왔다. 돌려줄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기세였다. 부형이 금해도 듣지 않았고, 벗들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들에게 예수의 화상은 단지 소중한 물건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통문에는 그들뿐 아니라 성균관 유생 중 공부깨나 한다 하는 명성이 있는 자들마저 그들과 동학이라 말하면서 여러 번 글을 올렸다고 적혀있다. 다산을 지칭한 말일 터였다. 다산은 당시 성균관에서 임금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기대주였다.

1784년 4월 15일, 이벽이 다산 형제들을 대상으로 편 첫 선상 포교 이후 이가환, 이익운, 권철신 등 쟁쟁한 남인계 학자들과의 연쇄 토론과 포교 과정을 거치면서, 1784년 말에 천주교는 파죽지세로 신앙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은 연말 언저리부터 모임을 가지기 시작해, 1785년 3월에는 이들은 푸른 두건과 서책 등 집례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여 얼굴에 분까지 바른 채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다.

얼굴에 분은 왜 발랐을까? 거룩한 의식에 앞서 몸과 마음을 정결히 갖기 위한 정결례(淨潔禮)의 절차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검거 당시 포교들이 목격한 해괴한 손놀림은 성호를 긋는 행동, 사람마다 손에 들었던 책은 미사의 기도문과 순서를 적은 경본이거나 교리서였을 터였다.

발칵 뒤집힌 세 집안 

집단으로 모여 집회를 갖다가 의금부에 적발된 일이 알려지자, 이벽과 이승훈, 정약용의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들의 부친은 저마다 즉각 강력한 제지 행동에 돌입했다.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과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자식이 사학에 깊이 빠진 것을 모르고 있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자식들에게 친지의 집을 돌며 제 입으로 사학을 끊겠다는 다짐을 공표하게 했다.

북경으로 가는 이승훈. 그는 천주교를 들여왔으나 명례방 집회가 탄로난 뒤 '벽이단'이란 글을 지어야 했다. 탁희성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

나아가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은 가족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뜰에서 서학 관련 서적을 불 질렀다. 그것들은 1년 전 자신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 구해온 것들이었다. 이때 이동욱은 분서(焚書)의 심경을 담은 7언 율시 두 수를 지었다. 그 시는 남아있지 않다. 아들 이승훈에게도 앞으로 천주교와 결별하겠다는 각오를 담은 벽이단(闢異端)의 시문을 각각 짓게 했다.

당시 이승훈이 썼다는 ‘이단을 물리치다(闢異)’란 시는 이랬다.

하늘과 땅의 윤리, 동과 서로 나눠지니

저문 골짝 무지개다리 구름 속에 가렸구나.

한 심지 심향 피워 책을 함께 불태우고

저 멀리 조묘(潮廟) 보며 문공(文公)께 제 올리리.

天彛地紀限西東(천이지기한서동)

暮壑虹橋晻靄中(모학홍교엄애중)

一炷心香書共火(일주심향서공화)

遙瞻潮廟祭文公(요첨조묘제문공)

시에 담긴 뜻은 이렇다. 한때 무지개다리로 알았던 꿈은 저녁 무렵 구름 노을 속에 잠겨 사라졌다. 애초에 동양과 서양의 윤기(倫紀)란 같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무지개다리만 건너면 피안으로 건너갈 수 있으려니 나는 믿었다. 이제 미망에서 깨어나 한 심지의 향을 태우며, 나를 미혹케 했던 천주교 관련 책자를 다 불에 사른다. 그런 뒤에 조주(潮州)에 있는 당나라 한유(韓愈)의 사당을 향해 우러러 큰 절을 올리면서 사죄하겠다고 적었다.

한유는 ‘불골표(佛骨表)’를 지어 당나라 때 세력을 떨치던 불교를 이단으로 강력하게 배격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니까 한유가 정학(正學)인 유학으로 이단인 불교를 배척하였듯, 자신도 천주교를 버리고 유학으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한 시다. 그는 정말로 배교할 마음이 있었던 걸까? 그렇지 않다.

밀착 감시 

다산의 부친 정재원은 즉각 상경하여 아들의 거처부터 옮기게 했다. 다산은 1783년 봄 이후 회현방의 누산정사에서 살았다. 이곳이 천주학의 한 온상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적발 사건 직후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의 종용으로 처가인 회현방의 담재(澹齋)로 이사했다. 장인 홍화보가 1784년 겨울 강계도호부사로 부임해 본가를 비운 터였다.

사건 직후인 1785년 4월에 다산이 지은 시에 ‘담재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주역을 공부하다(陪家君於澹齋講周易)’란 시가 있다. 정재원은 다산을 붙들고 앉아 ‘주역’을 직접 가르쳤다. 일종의 밀착 감시가 시작되었다. 다산이 지은 시 가운데, “성인도 때로는 잘못 있나니, 회린(悔吝)은 밝고 어두움에 말미암는다(聖人時有過, 悔吝由明昏)”고 한 구절이 있다. 회린은 뉘우침과 인색함이다. 잘못을 해도 뉘우치면 흉함이 변해 길함으로 바뀌고, 자만하여 뻗대면 길함은 다시 흉함으로 변한다. 그러니까 회와 린 두 태도는 마음의 밝음과 어두움의 차이를 반영한다.

명례방 집회가 들킨 뒤 다산 또한 종교를 포기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아버지 정재원은 아들을 이사시킨 뒤 함께 주역을 
읽어나갔다. 공부보다는 감시가 목적이었다. 당시 다산 또한 천주교를 배격한다는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어유당전서’에 실려 전한다.

다산의 이 구절은 한 때 자신이 잘못된 길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그 잘못을 깊이 뉘우쳐서 바른 길로 돌아오겠노라고 말한 것이다. 이 또한 이단 배격을 선언한 시였다. 정재원에게 다산은 집안을 일으킬 희망이었다. 그런 그가 삐뚠 길로 가는 것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이때 다산은 정말 천주학을 버렸을까? 그럴 리 없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 밀알가입은 hmwiwon@gmail.com (개인신상은 철저히 보호됩니다)
※ 군자금계좌: 농협 356-0719-4623-83안정주
※ 통합경전계좌 : 국민은행 901-6767-9263노영균sjm5505@hanmail.net
※ 투자금 계좌: 하나은행 654-910335-99107 안정주

게리 19-02-28 14:00
 
성균관 유생 등 적극 추종 나서
젊은층서 서학 공부 급속 유행 ;;;
게리 19-02-28 14:04
 
명동 김범우 집서 함께 미사보던
이벽ㆍ이승훈ㆍ정약용 형제 등 체포 ;;;
게리 19-02-28 14:05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에 1898년 지어진 것이 지금의 명동성당이다;;;.
산백초 19-02-28 15:46
 
성균관 유생 중에서도 재기명민한 젊은 그룹이 그를 적극 추종하고 있었다. 다산은 그들 중의 선두주자였다.
산백초 19-02-28 15:49
 
안정복은 권철신의 느닷없는 편지가 몹시 낯설었다. 편지 속의 그는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닌 듯 했다.
산백초 19-02-28 15:54
 
다산의 부친 정재원은 즉각 상경하여 아들의 거처부터 옮기게 했다. 다산은 1783년 봄 이후 회현방의 누산정사에서 살았다.
늘배움 19-02-28 16:55
 
똑똑한 젊은이라면 서양학에 대해 관심을 쏟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 추세였다. 임금도 적극 장려하던 일이었다.
늘배움 19-02-28 16:56
 
사위 권일신이 장인을 찾아가 천주학을 함께 믿어보자고 적극 권유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때를 고비로 권철신 형제와 이기양 측의 반격도 조금씩 수위가 높아졌다.
늘배움 19-02-28 16:57
 
사건 직후인 1785년 4월에 다산이 지은 시에 ‘담재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주역을
공부하다(陪家君於澹齋講周易)’란 시가 있다. 정재원은 다산을 붙들고 앉아 ‘주역’을 직접 가르쳤다.
겨울 19-03-01 08:12
 
이벽, 당대 논객ㆍ원로 설득 풍문에
성균관 유생 등 적극 추종 나서
겨울 19-03-01 08:14
 
권일신은 연거푸 장인을 찾아가 천주교의 논리를 설득하기 위한 적극적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겨울 19-03-01 08:15
 
다산의 이 구절은 한 때 자신이 잘못된 길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그 잘못을 깊이 뉘우쳐서 바른 길로 돌아오겠노라고 말한 것이다.
가을단풍 19-03-01 19:27
 
똑똑한 젊은이라면 서양학에 대해 관심을 쏟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 추세였다. 임금도 적극 장려하던 일이었다.
가을단풍 19-03-01 19:28
 
남인 집단 안에서 천주교가 무서운 파급력을 보이자, 남인 내부에서도 이 같은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경계경보가 발령되었다. 성호학파의 좌장 격인 안정복(1712-1791)이 처음 포문을 열었다. 당시 73세의 안정복은 양근의 권철신(1736-1801)과는 나이 차이가 24살이나 났다. 둘은 애초에 사제간이었다.
가을단풍 19-03-01 19:31
 
설령 일망타진의 계책을 세운다 해도 몸을 망치고 이름을 더럽힌 욕스러움을 받게 되면, 이때 천주가 능히 구해줄 수 있겠소?”
가을단풍 19-03-01 19:32
 
투전 판으로 알고 현장을 덮쳤던 기찰포교들이 예상 밖의 낯선 광경에 오히려 당황했다. 현장을 수색하면서 그들은 더 놀랐다. 듣도 보도 못한 서양인의 화상이며 십자가, 수상쩍어 보이는 책자 및 물품들이 압수되었다.
가을단풍 19-03-01 19:33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을 우려한 김화진은 장소를 제공한 중인 김범우만 옥에 가두고, 나머지는 방면하는 것으로 이 일을 덮으려 했다. 이것이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 조직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을사년 추조적발 사건’의 시작이었다.
가을단풍 19-03-01 19:35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과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자식이 사학에 깊이 빠진 것을 모르고 있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자식들에게 친지의 집을 돌며 제 입으로 사학을 끊겠다는 다짐을 공표하게 했다.
가을단풍 19-03-01 19:37
 
잘못을 해도 뉘우치면 흉함이 변해 길함으로 바뀌고, 자만하여 뻗대면 길함은 다시 흉함으로 변한다. 그러니까 회와 린 두 태도는 마음의 밝음과 어두움의 차이를 반영한다.
가을단풍 19-03-01 19:37
 
다산은 정말 천주학을 버렸을까? 그럴 리 없다.
사오리 19-03-06 05:13
 
우리가 살다 보면 허송세월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늘이 내려준
귀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아깝게 흘려보내는 경우가 참
많다. 기회는 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섬광처럼 왔다가 섬광처럼 지
나가는 것이다. 이 섬광 같은 기회를 잡느냐 놓치느냐는 온전히 자신
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기회주의자는 이 기회를 놓치고 늘 후회한다
호반도시 19-03-07 05:32
 
기호 남인 집단 안에서 천주교가 무서운 파급력을 보이자, 남인 내부에서도 이 같은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경계경보가 발령되었다.
호반도시 19-03-07 05:32
 
성호학파 좌장 안정복이 첫 포문
“둘을 꺾어야 이벽 광풍 사라져”
배후지목 원로 이기양ㆍ권철신에
수차례 장문 편지로 천주학 공방
 
 

Total 9,905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공지 1• 3 • 5 프로젝트 통장을 드디어 공개합니다. (70) 혁명위원회 09-12
공지 진법일기 70- 1.3.5 프로젝트가 의미하는것은 무엇인가? (61) 이순신 09-19
공지 혁명을 하면서~ <아테네의 지성! 아스파시아와 페리클레스> (12) 현포 07-31
공지 히틀러, 시진핑, 그리고 트럼프 (15) FirstStep 06-23
공지 <한 지경 넘어야 하리니> (21) 고미기 07-28
공지 트럼프, 폼페이오, 볼턴을 다루는 방법들 (32) 봉평메밀꽃 07-18
공지 판소리의 대표적 유파로 '동편제'와 '서편제'가 있습니다. (27) 흰두루미 06-20
공지 소가 나간다3 <결結> (24) 아사달 03-20
9575 꽁시생 기출문제 풀고 쉬어가기...토리토리 펙펙트 스또리 (13) 공시생기출문제 03-24
9574 한반도 분단에 관한 소련의 사고: 조속한 통일? 친일파 청산의 길! (24) 현포 03-23
9573 Science Fusion - 우린 가이아의 세포들이라구요 (11) 블루베리농장 03-23
9572 소가 나간다3 <결結> (24) 아사달 03-20
9571 우리는 폐족(廢族)이다! / 현능(賢能)한 인재가 구임(久任)케 해야 / 평화로 가는 길 멈출 수 없다 (26) 선유도 03-20
9570 행복하신가요. 사다리 아래도 바라보세요^^ (19) 쑥대밭 03-18
9569 산사서 부치는 선지식의 편지-13. 서산대사가 지리산의 제자에게. 14. 정관 스님이 사명당에게 (27) 호반도시 03-15
9568 『호킹의 빅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 (34) 블루베리농장 03-13
9567 IMF가 진단하고 경고음을 보내는 한국경제 상황 (26) 만사지 03-13
9566 정호승의《광화문 삶과 사랑》 * 고래를 위하여 (27) 사오리 03-13
9565 ‘선생님’이냐 ‘쌤’이냐 / 법희(法喜)를 아내로, 자비를 딸로 삼았네 / 지사(志士)와 애국자를 추모하며 (21) 선유도 03-11
9564 베아트리스 에글리(Beatrice Egli) - Die längste Nacht 2018 (10) 슐러거매니아 03-08
9563 <천주집>이벽의 급서 후 다시 일어난 천주교. 다산은 다시 천주교에 빠져들었다 (28) 게리 03-08
9562 산사서 부치는 선지식의 편지-11.日 천태종 개조 사이초 스님이 쿠카이 스님에게. 12. 태고 선사가 석옥 선사에게 (23) 호반도시 03-07
9561 데이비드 J. 린든의《터치》 * 지문 (22) 사오리 03-06
9560 1.자신감과 리더십,2.가족의 어원,3.강아지,4.뱃사공과 선비,5.황소 머리 (21) 밀알 03-05
9559 <천주집>이벽의 충격적 죽음 뒤 정약용. 천주학 비난, 남인에 재앙 초래 격론… 남인 영수 채제공은 애매한 태도 (26) 게리 03-04
9558 오랑캐가 강 너머에 주둔했다기에 (21) 루나 03-03
9557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신은 있다? 없다? (22) 고기먹는땡중 03-03
9556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박동진 명창 (33) 흰두루미 03-02
9555 간 기능 개선제에 대해 알아보자 - 웅담과 우르소데옥시콜린산, 리버디톡스 (31) 대포 03-02
9554 '사이언스'의 번역. 하나는 격치(格致), 둘은 학문(學問), 셋은 과학(科學) (35) 블루베리농장 02-28
9553 <천주집>“천주학 유행, 좌시할 수 없다”. “가문의 희망이 천주교에…” 충격받은 아버지 ‘밀착 감시’ (23) 게리 02-28
9552 나는 북한 비핵화 전망을 어떻게 정확히 예견할 수 있었을까? (26) 현포 02-27
9551 산사서 부치는 선지식의 편지-9. 고려 나옹 스님이 누이에게.10. 백운 스님이 스승 지공스님에게 (27) 호반도시 02-26
9550 봄봄」김유정의 혈서 '녹주, 너를 사랑한다!' (25) 흰두루미 02-25
9549 켄 시걸의《미친듯이 심플》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라 (35) 사오리 02-25
9548 저소득층 고용참사에 운좋은? 장씨 재산은 날개달고 훨훨 늘어. (26) 휘몰이 02-23
9547 멘델레예프 노벨상 도난사건 (30) 블루베리농장 02-22
9546 아이와 함께 길 건너기 / 베트남 이용상 (17) 고기먹는땡중 02-21
9545 달단이 강남에 들어왔단 말을 듣고 (17) 루나 02-20
9544 <천주집>천주교리 처음 듣고는 “놀랍기가 끝없는 은하수 같아”.정조가 극찬한 ‘중용’ 답변 (25) 게리 02-20
9543 소가 나간다2 <土生金> (32) 아사달 02-2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