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서 부치는 선지식의 편지
9. 고려 나옹 스님이 누이에게
나는 어려서 집을 나와 그 날짜도 기억하지 않고 친소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오직 도(道)만을 생각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느니. 인의(仁義)의 도(道)에 있어서는 친한 정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지만 우리 불가에서는 그런 생각이 조금만 있어도 큰 잘못으로 일컫는다.
이런 뜻을 알아 부디 꼭 만나겠다는 마음을 아주 끊어버리길 바란다. 그리하여 24시간 동안 옷을 입고 밥을 먹거나 말하고 서로 문답하거나 일을 할 때나 또 어디서나 항상 아미타불을 간절히 생각하되 잠시라도 끊이지 말지니.
생각하여 쉬지 않고 기억하여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각나는 경지에 이르면 나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또 육도에서 헤매는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간절히 당부하고 또 당부하는 바이다. 게송을 하나 전하니 늘 새겨 간직하기 바란다.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생각하여 부디 잊지 말지니/ 생각이 다하여 생각이 없는 곳에 이르면/ 내 몸과 마음에서 언제나 금빛 광명이 끊이지 않으리라’
이 글은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속세를 등지고 떠나버린 오빠를 그리워하며 보낸 편지에 대한 나옹 혜근(懶翁 惠勤, 1320~1376)의 답장이다. 스님은 가장 친했던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며 무엇하나 해 줄 수 없다는 자책감과 함께 큰 깨달음을 얻어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각오로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비록 몸은 떠났지만 어찌 하루아침에 부모님과 누이동생에 대한 그리움까지 지울 수 있을까. 스님이 10여 년간 선지식을 찾아 중국 순례의 길에 나섰을 때 그토록 조국을 그리워했던 것도 어쩌면 그곳에 고향과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스님은 이 편지의 앞머리에서 출가자의 길은 인의를 넘어서는 매정한 길임을 애써 강조한다. 그럼에도 스님이 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는 행간마다 촉촉히 묻어난다. 착하디 착한 누이가 부디 아미타불을 늘 염송해 참다운 행복을 찾고 극락왕생하길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1339년 문경 사불산 묘적암에 있는 요연 선사를 찾아가 ‘삼계를 뛰어넘고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자 함’이라고 출가의 변을 밝혔던 것처럼 스님의 일생은 구도와 중생구제로 일관된다. 숙세부터 이어온 선근(善根) 때문일까. 나옹 스님은 출가 후 제방의 선방과 사찰을 순력, 수도 정진하며 큰 깨우침을 얻는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그 근심도 커져갔다. 스님이 살았던 시기는 500년을 이어온 고려왕조가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불교에 비판적인 신진사대부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민생은 도탄에서 헤어날 길이 없건만 불교계는 이에 대한 어떠한 대안조차 제시하고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불교계는 속세와 타협해 권력을 쥐고 그것을 이용해 사회적·경제적으로 많은 폐단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1347년 스님은 고려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불어넣고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중국으로 생명을 건 구법여행을 떠난다. 스님이 먼저 찾은 곳은 일곱 살 때 자신에게 무생계를 주었던 인도인 대선사 지공 스님이 머무는 연경 법원사. 지공 스님은 나옹 스님을 보고 ‘서천(西天)의 20인과 동토(東土)의 72인이 있으나 그 중에도 일등인이요, 찾기 힘든 인물’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일생을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듯 스님은 중국에서도 구도의 발길은 멈추지 않는다.
특히 당시 중국의 대선지식으로 알려진 평산처림 선사와의 만남은 그 깨달음을 더욱 깊게 하는 계기가 된다.
10여 년간의 중국 구도순례를 마치고 고려에 돌아온 스님은 공민왕의 왕사로 불교의 부흥에 앞장선다. 특히 스님은 전국 각지를 돌며 지식인들에게는 선을 지도하고 민중들에게는 염불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스님의 노력에도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스님은 마지막 원력으로 스승 지공 스님의 사리를 중국에서 모셔와 양주 회암사를 봉안하고 이곳 사찰을 중창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하지만 이 일도 결국 일부 유학자들의 항의에 부딪히고 밀양 영원사로 추방되어 가는 도중 길에서 결국 입적하고 만다.
나옹 스님은 당시 민중들에게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떠받들어졌음을 역사서는 전하고 있다.
이 한 장의 편지에서 나타나듯 스님의 끊임없는 구도정신과 중생에 대한 진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10. 백운 스님이 스승 지공스님에게
제자는 향을 사르고 백 번 예배합니다. 제자는 일찍 훌륭한 종자를 심어 스승님이 나오신 때를 만나 이렇게 뵈올 수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어느 한 종(宗)의 이념을 뛰어 넘고 격식을 벗어나 활구(活口)를 온통 들어보이셨습니다. 이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다음 몇 구의 게송을 대화상의 법좌 아래 올립니다. 바라옵건대 스승님께서는 보시고 한 번 웃으소서.(중략)
‘벙어리가 높은 소리로 묘한 법을 설명하매/ 귀머거리가 멀리서 작은 그 말을 듣는다/ 마음 없는 만물들이 모두 찬탄하면서/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밤에 와서 참석한다’
제가 말한 이 4구 중 1구는 곧 화로에 놓인 한 점의 눈과 같고 또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확실히 깨달은 조사께서는 원래 훌륭한 지음(知音)일 것입니다. 그러나 청컨대 스승께서는 3000천리 밖에서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돌(?)
지공(가운데)과 나옹(오른쪽), 그리고 무학(왼쪽)은 삼대화상으로 불리며 조선시대 내내 수많은
사람들의 귀의처가 됐다.
스승에 대한 지극한 공경과 과격한 도전
백운 경한(白雲景閑, 1299∼1374) 스님이 1354년 해주 안국사에 머물며 스승인 지공(指空, ?∼1367) 스님에게 보낸 서신이다. 백운 스님은 고려말 뛰어난 고승으로 많은 업적과 큰 영향을 주었지만 나옹 스님과 보우 스님 등의 빛에 가려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최근 스님의 시와 사상이 새롭게 평가되면서 뛰어난 문장가로, 중국 선불교의 정통 법맥을 이은 인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지난 1972년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책을 펴낸 백운 스님이 오히려 세계적인 인물로 주목받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편지에는 옛 스님들이 스승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또 제자가 스승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 잘 보여준다. 예로부터 불가에서는 온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스승, 도반, 도량의 세 가지 인연이 잘 맞아야 함을 강조해 왔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단연 스승을 꼽고 있다. 마하가섭이 부처님을 만나 참 진리를 알고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을 만나 선의 묘한 이치를 깨달았듯 스승은 구도의 길에 있어 시작이자 끝일만큼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백운 스님에게는 마음의 스승이 두 분 있다.
중국 임제종의 선법을 이은 석옥 청공(1272∼1352) 선사와 서역의 고승 지공 스님이 바로 그 분들이다. 석옥 선사는 임종하면서 백운 스님에게 ‘흰 구름(白雲)을 모두 사서 맑은 바람(淸風)을 팔았더니/ 온 집안이 뼛속까지 가난하다(白雲買了賣淸風 散盡家私徹骨窮)’는 전법게를 제자를 통해 전달한다.
이렇게 당대의 대선사로부터 깨달음을 인가 받은 스님이 지공 스님과의 인연이 언제부터 시작하는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부처님의 현신 혹은 제2의 달마로 추앙 받던 지공 스님은 1326년 3월부터 약 2년 반 동안 고려를 방문했었을 때 백운 스님이 지공 스님을 만났을 가능성이 크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다만 스님이 10여 년간의 중국 구법순례하던 기간 중 지공 스님을 만났던 것만은 확실하다.
편지에서 먼저 스승에 대한 지극한 공경의 예가 나타난다.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인연에 대한 감격, 번뇌의 굴레에 있던 자신을 위해 법을 설해준 데에 대한 감사의 마음 등. 그러나 스님의 편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단순한 안부와 감사의 차원을 넘어 깨달음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탓에 일반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3000리 밖에서 사람을 속이지 않은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까지 스승에게 서슴없이 가하고 있다.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하나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라는 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뛰어난 제자를 길러내고자 하는 욕심은 스승이라면 모두 바라는 바다. 특히 제자로부터 뺨을 맞고 몽둥이로 찜질을 당해도 그것이 깨달음에 있는 한 맞으면서도 행복해 하는 것이 선가(禪家)만의 특이한(?) 전통이다.이런 까닭에 부처님 같은 스승들을 얻은 백운 스님도 행복한 분이지만 스승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실천했던 제자 백운을 둔 지공 스님과 석옥 스님도 행복한 분이리라.
스님이 지공 스님에게 보낸 3통을 편지를 비롯한 법문들은 현재 『백운화상어록』으로 묶여 전하고 있다.
대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마음속에 독한 생각을 품고
입으로 독한 말을 내뱉으며
몸으로 독한 업을 실행하면,
세 가지 마음과 몸과 입에서 돌출된 그것들이
크게 악을 이룩하여 중생들에게 가해진다.
중생들은 그 해독을 입고 곧 원한이 맺혀
마음속으로 기어코 그것을 갚으려고 맹세한다.
혹은 그것을 지금 세상에서 갚기도 하고
혹은 죽은 뒤에 혼백과 영이 천상에 올라갔다가
곧 내려와서 갚기도 한다.
그리하여 인간세계의 축생과 귀신이
태산(太山)에서 서로 싸우고 해치게 된다.
이것은 다 숙명(宿命)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그저 생겨난 것이 아니다.
(자애경)
오직 현재의 한 생각만을 굳게 지켜라.
(법구경)
어리석은 자들을 가까이하지 말라.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숫타니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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