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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3-04 17:58
<천주집>이벽의 충격적 죽음 뒤 정약용. 천주학 비난, 남인에 재앙 초래 격론… 남인 영수 채제공은 애매한 태도
 글쓴이 : 게리
 

이벽의 죽음 뒤 정약용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앉았다

<19>이벽의 충격적 죽음

천주교 집회 적발 사건 후 
집안 감금당한 이벽 역병 걸리자 
가족들이 땀 내야 한다며 
이불 뒤집어 씌었는데 질식 
수험생 모드로 돌아온 다산 
천주학 세상 열어 준 스승의 
허망한 죽음에 큰 충격 
이 일 이후 전혀 다르게 변했다 

1979년 이벽 유해 발굴 작업 당시 현장. 초기 천주교 최초이자 최고 이론가였던 이벽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다산에게 
큰 충격이었다. 천주교천진암성지홈페이지
다시 조신한 모범생으로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의 감시 아래 다시 수험생 모드로 돌아섰다. 다산은 상황 판단이 늘 빨랐다. 고집을 부려 경거망동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벽과 이승훈 등 두 주축의 발이 꽁꽁 묶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이 시기 다산은 부친과 함께 ‘주역’을 읽었다. 훗날 천주교 신앙 문제로 평생의 원수가 된 이기경(李基慶)과도 가깝게 지냈다. 용산에 있던 그의 정자로 가서 과거 준비를 위한 변려문 공부에 몰두했다. 이후 다산이 다시 성균관의 각종 시험에서 연거푸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아버지 정재원의 감시도 조금 느슨해졌다.

중심부가 와해된 천주교 집회는 중단되었다. 스스로 이단 선언을 한 이승훈은 운신이 어려웠다. 이벽은 당시 온 집안이 동원된 강력한 감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다산 형제에게도 부친의 보이지 않는 감시가 따라 다녔다. 모든 것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열병보다 강렬했던 신앙의 열정이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평온한 나날이 흘러갔다. 하지만 자형 이승훈의 이단 선언과, 큰형의 처남 이벽의 강제 연금으로 공백 상태에 빠진 지도부의 상황을 지켜보던 다산의 심경은 말할 수 없이 참담했을 것이다.

미사 집회 장소를 제공했던 김범우는 참혹한 형벌 끝에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귀양을 떠나 뒤에 그곳에서 죽었다. 막 꽃봉오리가 맺히던 조선의 천주교회는 다시 눈 속에 파묻혔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므로 다산은 냉각기를 갖고 교회 재건의 기회를 살펴야 했다.

이벽 부친의 자살 소동과 정신 착란 

사돈 간이기도 한 양가 부친의 적극적 노력으로 이승훈과 다산 형제 쪽은 외견상 진정이 되었다. 성정이 과격했던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李溥萬)은 ‘추조 적발’ 이후 아들이 그 수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그야말로 펄펄 뛰었다. 그는 아들에게서 천주교를 떼어내려고 갖은 설득과 위협을 거듭했다. 이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부만은 천주교로 인해 집안이 문 닫는 꼴을 볼 수 없으니, 당장 배교하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죽겠노라며 자식 앞에서 목을 매는 소동까지 벌였다. 그 서슬에 이벽은 그만 주춤했다.

이벽은 키가 180㎝가 넘는 거구로 한 손으로 100근의 무게를 너끈히 들어 올리는 장사였다. 외모로 풍기는 위엄이 있어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던 미남자였다. 어려서부터 고집이 워낙 세서 누구도 그를 꺾지 못했다.

다블뤼의 비망기에는 연금 당시 이벽을 배교하게 만들려고 갖은 책략을 썼다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천주교도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가 이벽에게 부렸다는 재간과 책략은 구체적 설명 없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계략과 거짓말을 죄다 동원했다고만 적었다. 바깥소식이 차단된 이벽에게 함께 했던 동료들의 잇단 이탈과 배교 행동을 부풀려 말한 것일 터였다. 다블뤼의 비망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러한 끊임없는 공격에 이벽은 글로는 묘사할 수 없는 상태 속으로 던져졌다. 그는 기운이 없고, 말이 없고, 침울한 사람이 되었다. 낮이고 밤이고 눈물이 그칠 줄 몰랐고 시시각각으로 그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더 이상 옷을 벗지 않았으며 잠은 멀리 달아났다. 여전히 가끔 먹기는 하였지만 모든 식욕을 잃은 지라 아무 맛도 없었고 몸에 도움도 안 되었다. 이 심한 상태는 지속될 수가 없었고, 불행하게도 본능이 이겼다는 조짐이 드러났다.”

달레는 또 “이벽은 마침내 시달림에 지치고 배교자에게 속고, 실망에 빠진 아버지를 보고서 정신이 착란되어, 그 사람의 말에 넘어가게 되었다. 명백하게 배교하는 것은 주저하여, 두 가지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다”고 당시 이벽이 처한 정황을 부연했다.

초기에 이벽의 영혼은 불안과 우울에 침식당했고, 극도의 불면증에 시달리며 식음을 전폐해 착란의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후 그는 차차 평온을 되찾아 건강을 회복했다. 신앙의 열병은 겉보기에 없었던 일처럼 되었고, 심지어 그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기까지 해서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이때 이벽이 실제로 배교의 상태로 빠져든 것인지, 탈출을 위해 가족들을 방심케 하려는 의도된 행동이었는지는 이제 와서 가늠할 길이 없다.

이벽의 돌연한 죽음 

이 와중에 1785년 7월초 이벽의 갑작스럽고도 비극적인 죽음이 다산에게 전해졌다. 이 소식을 접하고 다산이 받았을 엄청난 충격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6월말 역병이 돌았던 듯하다. 다블뤼와 달레는 페스트로 표현했지만 역사 기록에는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장티푸스나 콜레라 같은 질병이었을 것이다. 쇠진한 육신에 역질이 스며들자, 가족들은 이벽에게 땀을 내게 하려고 이불을 뒤집어 씌웠다. 이불 속에서 이벽은 땀구멍이 열리지 않은 채 질식하여 그만 삶의 맥을 놓았다. 병을 앓은 지 8일만의 일이었다.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천주교 신앙 집단은 최고이자 거의 유일한 이론가를 잃었다.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 표지와 내용. 그는 초기 천주교회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면서 다산의 서술을 참고로 했다고 
밝혔다. 다산은 초기 천주교에 대해 자신이 증언해둘 필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교천진암성지홈페이지.

다블뤼와 달레는 ‘조선순교자비망록’과 ‘조선천주교회사’에 당시 이벽의 상황과 심리 상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를 마치 곁에서 지켜 본 것처럼 세세하게 묘사했다. 특히 이벽에 대한 다블뤼의 너무나도 상세한 묘사는 다산이 만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조선복음전래사’란 책에 수록된 내용임에 틀림없다. 다산이 아니고는 이벽의 마지막을 이렇듯 핍진하게 묘사할 수 없다. 다블뤼도 직접 자신의 비망기 내용 중 천주교회사의 초기 부분은 정약용이 수집해 기록한 것에 전적으로 의지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블뤼의 비망기 중에서도 이벽 관련 내용의 소개는 다른 대목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길고도 상세하다.

이벽의 사망 시기는 기록에 따라 얼마간의 혼선이 있다. 다블뤼와 달레는 이벽의 사망이 1786년 봄이라고 썼다. 하지만, 다산이 쓴 ‘우인 이덕조 만사(友人李德操挽詞)’가 편년 순인 다산 시집에 1785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실렸고, 제 7구에 “가을 타고 홀연히 날아 떠나니(乘秋忽飛去)”라 했으니, 1785년 7월의 일이 분명하다. 족보에도 그렇게 나온다.

신서파(信西派)를 대변한 ‘조선복음전래사’ 

다산이 썼다는 ‘조선복음전래사’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자세히 논할 기회를 갖겠다. ‘조선복음전래사’란 책 제목은 다산이 지은 원래 명칭이 아니라, 다블뤼가 자신의 ‘조선순교자 비망기’에서 ‘Les notes manuscrites sur Ľé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nne en Corée’로 번역한 것을 우리말로 다시 옮길 때 번역자가 임의로 붙인 제목이다. 다블뤼의 명칭을 직역하면 다산이 지었다는 책의 제목은 ‘조선천주교 설립에 관한 비망기’다. 나는 ‘조선복음전래사’의 원래 제목이 ‘대동서학고(大東西學攷)’거나 ‘서학동전고(西學東傳攷)’쯤이었을 것으로 본다.

다산은 강진 유배시절 해남 대둔사의 역사를 정리한 ‘대둔사지’를 엮을 때, 뒤편에 부록으로 ‘대동선교고(大東禪敎攷)’를 포함한 바 있다. 말 그대로 조선불교전래사에 해당하는 저술이다. 다산은 불교 신자로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 역대 문헌에서 불교 전래와 신앙에 관한 내용을 편년체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을 뿐이다.

만년의 다산은 공서파(攻西派)인 이기경이 엮은 ‘벽위편(闢衛編)’과 이재기(李在璣)의 ‘눌암기략(訥菴記略)’ 등 척사의 시각에서 기술된 책자의 논리에 맞서 천주학이 전래 도입되던 초기의 상황과 중심인물들의 행적에 대해 객관적으로 기록해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신서파(信西派)를 대변해 이른바 ‘조선복음전래사’를 집필하고, 주변의 일화들은 ‘균암만필’ 등의 기록으로 남겨, 저들의 공세에 대응코자 했던 것으로 판단한다.

178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이벽의 죽음으로 초기 천주교 신앙집단은 배를 이끌 선장을 잃었다. 다산은 이벽에 대해 말할 때면 늘 우인(友人) 즉 벗이라고 했지만, 다산에게 이벽은 벗보다는 스승에 더 가까웠다. 그에게 이벽은 학문적 사유의 힘을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천주학의 황홀한 은하계를 활짝 열어 보여주었던 스승이었다.

유해발굴 작업 뒤 천진암으로 옮겨진 이벽의 묘소. 천주교천진암성지홈페이지

그랬던 그를 적발 사건 이후 얼굴 한 번 못 본 채 지내다가 석 달 만에 참혹한 부고를 들었다. 이벽의 죽음은 다산의 젊은 시절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다산의 청년시절은 한 매듭이 지어졌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강진 시절에, 다산은 이벽과 젊은 시절 함께 작성했던 ‘중용강의’를 새로 정리해 ‘중용강의보’로 마무리 한 뒤, 서문에 이렇게 썼다. “위로 이벽과 토론하던 해를 헤아려보니 어느새 30년이 되었다. 그가 여태 살아 있었다면 덕에 나아가고 학문에 해박함을 어찌 나와 견주겠는가? 옛 글과 지금 글을 합쳐서 본다면 틀림없이 놀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은 살아남았고 한 사람은 죽었으니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랴.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한다.” 1814년 7월 말에 썼다. 그 행간에 고인 회한이 맥맥하게 느껴진다.

1785년의 잔인한 여름은 이렇게 지나갔다. 다산의 연보나 시문집만 봐서는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던 아주 평온한 여름이었다. 연보 속의 그는 임금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성균관의 주목 받는 수험생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 다산은 전혀 다르게 변했다. 속 깊은 곳에 다른 사람이 들어 앉아 있었다.

“천주학 비난, 남인에 재앙 초래” 격론… 남인 영수 채제공은 애매한 태도

<20>안정복과 이기양의 일합

아들이 신자였던 이기양 
안정복의 천주학 비판이 
자기 집안을 위태롭게 할까봐 
32세나 연상인 안정복에 항의 
공격받은 안정복이 움츠러들자 
남인 내부의 서학 공격도 주춤 
채제공은 젊은층 눈치 보고 
다산은 천주학 재건을 암중모색 

번암 채제공의 초상. 사도세자의 스승이자, 정조의 무거운 신임을 받았던 남인의 영수였다. 
그런 채제공마저 천주교 논쟁에 대해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갑작스런 항의 방문 

1785년 10월 10일, 문의현감으로 있던 이기양(李基讓ㆍ1744~1802)이 천주학에 쏠린 남인 젊은 층의 움직임에 지속적으로 제동을 걸어오던 안정복을 불쑥 찾아왔다. 앞서 소개한 1784년 12월 14일 안정복이 권철신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이기양이 문의에서 보냈다는 사적인 한글 편지에 대해 안정복이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 사단이었다.

집으로 들어서는 이기양의 서슬이 보통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기양은 자신보다 32살이나 연장인 안정복에게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선생님! 편지 속에 ‘문의언찰(文義諺札)’이란 네 글자는 제 어머님의 편지인데, 그걸 어째서 남에게 말씀하십니까?”

머쓱해진 안정복이 “우리가 남인가? 일가나 한 가진데 그게 무슨 잘못인가?”하자, 이기양이 정색을 하고 쏘아 붙였다. “그러시면 안 되지요. 그 한글 편지를 손님이 올 때마다 보여준 것은 또 어째서입니까?” 안정복이 바깥사람에게 보인 적이 없다고 하자, 이기양이 말허리를 자르며 또 말했다. “어째 이런 법이 있습니까?” 궁지에 몰린 안정복이 대답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노망이 들어 그런 것인데, 어찌 이다지 심하게 말하는가?”

이기양은 물러서지 않고 매섭게 쏘아 붙였다. “절대로 이럴 수는 없습니다. 지난 번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를 두고 사람들이 모두 재앙을 만들려는 화심(禍心)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디다.” 천주학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안정복의 행보가 장차 남인 내부에 큰 재앙을 불러들이려는 의도된 행동이라고 찔러 말한 것이다.

말이 아주 살벌했다. 놀란 안정복이 대답했다. “금번 서학(西學)이 어찌 사군자가 배울만한 것이란 말인가? 내가 크게 염려가 되어 경계의 말을 했던 것인데, 이것이 어찌 화심으로 그런 것이겠는가? 성격이 급해 곧이곧대로 말하다 보니 이런 뜻밖의 일이 생긴 것일세.” 말투에 기세가 급격히 꺾였다. 이기양이 한 번 더 안정복을 몰아세웠다. “평소 어르신의 꼼꼼하심은 남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말씀하셨다니요?” 말실수가 아니라, 모두 계산된 행보가 아니냐는 추궁이었다. ‘벽위편’ 중 ‘안순암(安順庵) 을사일기’ 속에 나온다.

세상 길이 참 어렵다 

74세의 안정복이 제자 뻘인 42세의 이기양에게 느닷없는 봉변을 당했다는 소문이 남인들 사이에 금세 쫙 퍼졌다. 이틀 뒤인 10월 12일, 씁쓸해진 안정복은 ‘행로난(行路難)’이란 시를 지었다. 긴 시라 일부만 싣는다.

눈앞에 바른 길이 평탄하게 열렸건만

어이해 서로 끌어 굽은 길을 뚫고 가나.

그 누가 곧은 마음 옛 도라 하였던고

아첨의 방편됨을 이제야 알겠도다.

영장산의 늙은이가 애초에 분별없어

망령되이 바로잡아 충고를 하렸더니,

도리어 내 성품이 너무 꼼꼼하다면서

교묘히 화심(禍心) 얽어 깊이 숨겨 놓았다네.

目前正路坦蕩蕩(목전정로탄탕탕)

胡乃相携曲徑穿(호내상휴곡경천)

誰言直諒是古道(수언직량시고도)

乃知諛侫爲方便(내지유녕위방편)

靈山老叟本疎狂(영산노수본소광)

妄許忠告相規匡(방허충고상규광)

反謂翁性太縝密(반위옹성태진밀)

巧織禍心深包藏(교직화심심포장)

앞서의 대화를 다시 시로 적은 것이었다. 당당한 정도를 버리고 굽어 도는 뒷길로 서로를 이끄는 현실을 통탄하고, 진심의 충고를 흉계로 내모는 후학에 대한 분노를 담았다. 시 제목 ‘행로난’는 세상 살아가는 길이 참 험난하다는 의미다.

변명하지 않겠다 

안정복은 그것만으로는 분을 삭힐 수가 없었다. 같은 날 다시 벽에다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경문(自警文)’을 따로 지어 붙이기까지 했다.

붉은 마음 화심으로 지목하다니

내 어이 이를 하여 덕 바랐으리.

도리어 원망으로 되갚아오니

그대 또한 어질지 못한 것일세.

심판하심 하늘에 달려 있나니

모름지기 그 누굴 허물하겠나.

하나하나 변명할 방법이 없어

다만 그저 혼자서 수양할 밖에.

赤心目以禍心(적심목이화심)

余忍爲此德報(여인위차덕보)

反以怨報(반이원보)

君亦不仁(군역불인)

審判有天(심판유천)

不須他咎(불수타구)

分䟽無地(분소무지)

但當自修(단당자수)

정성스런 붉은 마음(赤心)을 화심이라 하고, 덕을 베풀었는데 원망만 돌아왔다. 심판은 하늘이 한다. 굳이 더 변명하지 않겠다. 나는 다만 내 길을 닦겠다.

이기양은 안정복에게 어째서 이렇게 무례하게 대들었을까? 그의 아들 이총억이 1785년 3월 의금부에 적발된 명례방 모임에 참석했던 천주교 신자였고, 이총억은 권일신과 함께 형조판서를 찾아가 성상을 돌려달라고 했던 네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안정복의 공개적인 행보는 이기양의 집안을 일거에 위험에 빠뜨릴 덫이 될 수 있었다.

이기양의 강력한 항의로 안정복이 움츠러들면서 남인 내부에서 서학을 공격하는 분위기는 일단 진정되었다. 이후 천주학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차츰 시들해졌다. 이때 다산은 부친의 감시 아래 과거 시험 준비에 몰입하는 한편, 천주학 재건을 위한 암중모색에 돌입하였다.

입조심이란 세 글자를 써 붙여두고 

이듬해인 1786년 윤 7월 16일에 9개월 이상 침묵하던 안정복이 채제공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안정복이 천주교를 배척하는 것을 보니 노익장이 따로 없더라고 했다는 채제공의 말과, 임금이 안정복에게 내려준 ‘불쇠헌(不衰軒)’의 당호로 기문을 지었으니 사람을 보내 찾아가라 했다는 전언을 듣고 보낸 편지였다.

정조가 안정복에게 내린 당호 '불쇠헌'에 맞춰 채제공은 '불쇠헌기'란 글을 지었다. 천주교에 쏠리는 젊은 남인들을 질타한 안정복에 대한 칭송이 들어 있다.

안정복의 어조는 한결 같았다. “근래 우리 당의 젊은이로 평소에 재기가 있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신학(新學)으로 많이 돌아, 참된 도리가 여기에 있다 하며 휩쓸리듯 좇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그 뒤집혀 빠져든 형상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대략 간곡하게 경계의 가르침을 폈더니, 붉은 마음에서 나온 것을 도리어 화심이라 말하며, 감히 끊을 수 없는 사이이지만 감히 끊겠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용감하긴 하오만은 또한 하나의 변고인 셈입니다. 원래 우리 남인이 복이 박한데 한 집끼리의 싸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처럼 당론이 횡행하는 때에 어찌 곁에서 틈을 타서 돌을 던지는 자가 없을 줄 알겠소이까? 그 형세가 반드시 망한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지금은 그저 내버려두고, 벼루 뚜껑에 ‘마두견(磨兜堅)’ 즉 입조심이란 세 글자를 써서 스스로를 경계할 뿐이라오.”

글 속에 단단히 맺힌 것이 있다. 편지 끝에 안정복은 채제공이 자신을 위해 지었다는 ‘불쇠헌기(不衰軒記)’ 중에 천주교를 배척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라, 젊은 층들에게 공연한 시비를 당하게 될까 염려해 글을 보내지 못한다는 말이 들리는데, 우리 두 사람이 나서서 천주학을 물리치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하겠느냐며 함께 공동의 보조를 취하자고 촉구했다.

미심쩍은 채제공의 태도 

이로 보아 이기양의 항의 방문이 여파가 상당했고, 남인 청년층에서 당시 안정복의 행동에 대해 반감을 품은 그룹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안정복은 이 일로 노망든 늙은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한편 채제공이 지은 ‘불쇠헌기’ 안에 안정복이 말한 천주학에 대한 비판 내용이 실제로 들어 있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얼마 뒤 공이 연소한 무리들의 구설에 크게 곤경을 치렀다는 말을 들었다. 떠들썩하니 노망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대개 서양의 이마두(마테오 리치)의 무리가 지은 책이 근자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왔는데, 나이 젊고 배움에 뜻을 둔 사람들이 묵은 얘기에 싫증을 내며 신기한 것을 좋아해 휩쓸리듯 그 학문을 버리고 이것을 좇는다고 했다. 부모를 천주에 견주는 것쯤이야 도외시한다 해도, 임금은 딸린 일가붙이가 없어야만 세울 수가 있다거나, 음양의 두 기운으로는 만물을 만들 수 없다는 얘기, 천당과 지옥이 틀림없이 진짜로 있다는 말이며, 태극도(太極圖)란 짝을 맞춰 한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 천주가 참으로 예수를 내려 보냈다고 하는 말 같은 것은 아득하고 허무맹랑해서 그 단서가 수도 없었다.”

글 끝에는 안정복에 대한 이런 찬양도 들어 있었다. “공은 궁벽한 산 속의 깊은 밤에 남몰래 근심하고 길이 탄식하며 혈혈단신으로 일어나, 막 움터 나오는 기세에 대해 말을 엄히 하여 이를 배척하고, 혹 따뜻한 말로 일깨우기도 했다. 우리 유학의 도를 지킬 수만 있다면 비난과 조롱도 걱정하지 않았고, 삿된 주장을 막을 수만 있다면 환난과 해로움이 있어도 돌아보지 않았다.”

채제공의 이 같은 말이 안정복에게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을 주었을 테지만, 안정복은 채제공의 태도에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채제공은 ‘불쇠헌기’를 써놓고도 안정복에게는 보내지 않으면서 그들 남인 젊은 층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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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19-03-04 18:00
 
수험생 모드로 돌아온 다산
천주학 세상 열어 준 스승의
허망한 죽음에 큰 충격 ;;;
게리 19-03-04 18:01
 
신서파(信西派)를 대변한 ‘조선복음전래사’;;;
게리 19-03-04 18:02
 
채제공은 젊은층 눈치 보고
다산은 천주학 재건을 암중모색;;;
겨울 19-03-05 08:01
 
중심부가 와해된 천주교 집회는 중단되었다. 스스로 이단 선언을 한 이승훈은 운신이 어려웠다. 이벽은 당시
온 집안이 동원된 강력한 감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다산 형제에게도 부친의 보이지 않는 감시가 따라 다녔다.
겨울 19-03-05 08:03
 
다블뤼의 명칭을 직역하면 다산이 지었다는 책의 제목은 ‘조선천주교 설립에 관한 비망기’다. 나는 ‘조선복음전래사’의
원래 제목이 ‘대동서학고(大東西學攷)’거나 ‘서학동전고(西學東傳攷)’쯤이었을 것으로 본다.
겨울 19-03-05 08:12
 
이로 보아 이기양의 항의 방문이 여파가 상당했고, 남인 청년층에서 당시 안정복의 행동에 대해
반감을 품은 그룹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안정복은 이 일로 노망든 늙은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산백초 19-03-05 11:55
 
이벽은 키가 180㎝가 넘는 거구로 한 손으로 100근의 무게를 너끈히 들어 올리는 장사였다.
산백초 19-03-05 11:57
 
1785년 10월 10일, 문의현감으로 있던 이기양(李基讓ㆍ1744~1802)이 천주학에 쏠린
남인 젊은 층의 움직임에 지속적으로 제동을 걸어오던 안정복을 불쑥 찾아왔다.
산백초 19-03-05 11:59
 
채제공의 이 같은 말이 안정복에게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을 주었을 테지만, 안정복은 채제공의 태도에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채제공은 ‘불쇠헌기’를 써놓고도 안정복에게는 보내지 않으면서
그들 남인 젊은 층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늘배움 19-03-05 17:57
 
미사 집회 장소를 제공했던 김범우는 참혹한 형벌 끝에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귀양을 떠나 뒤에
그곳에서 죽었다. 막 꽃봉오리가 맺히던 조선의 천주교회는 다시 눈 속에 파묻혔다.
수양버들 19-03-05 17:58
 
다산은 상황 판단이 늘 빨랐다. 고집을 부려 경거망동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벽과 이승훈 등 두 주축의 발이 꽁꽁 묶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늘배움 19-03-05 17:59
 
1785년의 잔인한 여름은 이렇게 지나갔다. 다산의 연보나 시문집만 봐서는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던
아주 평온한 여름이었다. 연보 속의 그는 임금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성균관의 주목 받는 수험생일 뿐이었다.
수양버들 19-03-05 18:00
 
이벽이 실제로 배교의 상태로 빠져든 것인지, 탈출을 위해 가족들을 방심케 하려는 의도된 행동이었는지는 이제 와서 가늠할 길이 없다.
늘배움 19-03-05 18:02
 
안정복의 어조는 한결 같았다. “근래 우리 당의 젊은이로 평소에 재기가 있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신학(新學)으로 많이 돌아, 참된 도리가 여기에 있다 하며 휩쓸리듯 좇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수양버들 19-03-05 18:02
 
다산이 썼다는 ‘조선복음전래사’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자세히 논할 기회를 갖겠다. ‘조선복음전래사’란 책 제목은 다산이 지은 원래 명칭이 아니라, 다블뤼가 자신의 ‘조선순교자 비망기’에서 ‘Les notes manuscrites sur Ľé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nne en Corée’로 번역한 것을 우리말로 다시 옮길 때 번역자가 임의로 붙인 제목이다.
수양버들 19-03-05 18:03
 
이벽의 죽음으로 초기 천주교 신앙집단은 배를 이끌 선장을 잃었다. 다산은 이벽에 대해 말할 때면 늘 우인(友人) 즉 벗이라고 했지만, 다산에게 이벽은 벗보다는 스승에 더 가까웠다. 그에게 이벽은 학문적 사유의 힘을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천주학의 황홀한 은하계를 활짝 열어 보여주었던 스승이었다.
수양버들 19-03-05 18:06
 
정성스런 붉은 마음(赤心)을 화심이라 하고, 덕을 베풀었는데 원망만 돌아왔다. 심판은 하늘이 한다. 굳이 더 변명하지 않겠다. 나는 다만 내 길을 닦겠다.
수양버들 19-03-05 18:07
 
이로 보아 이기양의 항의 방문이 여파가 상당했고, 남인 청년층에서 당시 안정복의 행동에 대해 반감을 품은 그룹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안정복은 이 일로 노망든 늙은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수양버들 19-03-05 18:09
 
우리 유학의 도를 지킬 수만 있다면 비난과 조롱도 걱정하지 않았고, 삿된 주장을 막을 수만 있다면 환난과 해로움이 있어도 돌아보지 않았다.”
밀알 19-03-05 19:53
 
1785년 7월초 이벽의 갑작스럽고도 비극적인 죽음이 다산에게 전해졌다. 이 소식을 접하고 다산이
받았을 엄청난 충격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6월말 역병이 돌았던 듯하다.
다블뤼와 달레는 페스트로 표현했지만 역사 기록에는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장티푸스나 콜레라 같은 질병이었을 것이다.
밀알 19-03-05 19:56
 
다산은 강진 유배시절 해남 대둔사의 역사를 정리한 ‘대둔사지’를 엮을 때, 뒤편에 부록으로
 ‘대동선교고(大東禪敎攷)’를 포함한 바 있다. 말 그대로 조선불교전래사에 해당하는 저술이다.
다산은 불교 신자로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 역대 문헌에서 불교 전래와 신앙에
관한 내용을 편년체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을 뿐이다.
밀알 19-03-05 19:57
 
번암 채제공의 초상. 사도세자의 스승이자, 정조의 무거운 신임을 받았던 남인의 영수였다.
그런 채제공마저 천주교 논쟁에 대해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밀알 19-03-05 20:00
 
정성스런 붉은 마음(赤心)을 화심이라 하고, 덕을 베풀었는데 원망만 돌아왔다.
심판은 하늘이 한다. 굳이 더 변명하지 않겠다. 나는 다만 내 길을 닦겠다.
밀알 19-03-05 20:03
 
채제공은 ‘불쇠헌기’를 써놓고도 안정복에게는 보내지 않으면서 그들 남인 젊은 층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오리 19-03-06 05:11
 
우리가 살다 보면 허송세월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늘이 내려준
귀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아깝게 흘려보내는 경우가 참
많다. 기회는 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섬광처럼 왔다가 섬광처럼 지
나가는 것이다. 이 섬광 같은 기회를 잡느냐 놓치느냐는 온전히 자신
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기회주의자는 이 기회를 놓치고 늘 후회한다
호반도시 19-03-07 05:16
 
천주교 집회 적발 사건 후
집안 감금당한 이벽 역병 걸리자
가족들이 땀 내야 한다며
이불 뒤집어 씌었는데 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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