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연세대 교수
신유학의 이(理), 기(氣), '지각(知覺)' 등의 개념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유학이, 공자의 서(恕)의 정신을 옹호하기 위해, 제시한 근거로서만 그렇다. 이런 점에서 다른 모든 신유학적 개념보다 '지각(知覺)'이라는 개념은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공자의 서(恕)가 요청하는 감수성을 존재론적 감수성으로 정당화하는 작업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유학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물래이순응(物來而順應)'에서 이들의 이런 정신을 확인하게 된다.
횡거(橫渠)가 '지각'을 부정적인 것으로 다루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자는, 상채(上蔡)와 횡거[혹은 龜山]와 싸우면서, 이 지각 속에서 유한성의 계기와 무한성으로의 비약의 계기가 동시에 있음을 본다. 그에게 있어 지각(知覺)=발(發)은 '인(仁)'이 실현되는 자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이곳은 '내(內)'와 '외(外)', 그리고 이 양자의 '합일(合一)'이 실현되는 자리이다. '인(仁)'은 바로 이 자리에서 깃들어야 하고 확충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발(發)'의 모든 계기에서 실질적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처럼 주자에게 있어 존재론적 감수성으로서의 '지각'은 타자의 말 건넴을 듣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타자와 나를 규정하는 매개 원리[性=理=太極]의 실현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자가 탁월한 철학자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지점은 다른데 있다. 즉 주자는 성인(聖人)을 규제적 이념으로 생각하고 있고, 이것과 같은 맥락에서 그는 자신의 철학을 현실적 개체[人心․私]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현실적 인간 개체의 유한성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비록 그 기준․규제적 이념에 현실적 개체는 귀를 귀울여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그는 귀를 기울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가 전적으로 인심(人心)의 결단에 놓여 있음 알고 있었다. 이런 그의 감각은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 나오는 '인심매청명언(人心每聽命焉)'라는 테제 속의 '매(每)'라는 구절에서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 '인심'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소멸되거나 철저하게 도심(道心)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죽어서야 끝나는 '계신공구(戒愼恐懼)'는 결국 이런 인심의 자리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게 된다. 이 점에서 주자는 신유학 일반의 자리를 단순히 정립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리를 공자의 서(恕)의 자리에까지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피조물인 한,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아마도 다산의 사상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철저하게 유한자로 파악하는 다산은 그래서 '우리는 과연 성인(聖人)이 될 수 있을까?'라면서 미발(未發)의 공부를 끝없는 계신공구의 공부라고 정의하는 주자와 공명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적 체계에 있어 다산과 주자는 많은 차이점들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 사상가들에게 있어 '미발'의 상태에 대한 규정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주자에게 있어 '사려(思慮)는 아직 싹트지 않았지만 지각(知覺)은 활동하는' 영역이 '미발'이라면, 다산에게 있어 '타자와 조우하지는 않았지만 신=상제와 직면해서 계신공구하는 마음[大體]이 활동하는' 영역이'미발'의 영역이다.
간단히 우리는 주자의 미발을 존재론적 감수성의 상태로, 다산의 미발을 신학적 감수성의 상태로 명명할 수 있다. 그러나 주자나 다산 모두에게 있어 이 '미발'의 영역은, 구체적인 관계 맺음의 상황에서 촉발되는 현실적 마음이 진정으로 윤리적 마음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 퇴계(退溪) 이래로 계속된 사변적이고 지적이었던 조선조의 주자 이해에서 인간을 철저한 유한자로 파악하는 주자의 계신공구의 철학이 이제 다산에게서 공명하고 있는 것은 철학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공명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양자가 모두 공자의 '서(恕)'가 가지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한한 내가 타자로 건너갈 수 있을까? 이런 보편적인 윤리적 문제의식을 두 사람은 각자의 상이한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회복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상이한 철학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공명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서(恕)를 자신의 문제로 껴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서(恕)란 나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통찰과 그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결단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해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단지 朱子는 타자로의 건너감의 가교로 '성(性)=이(理)'라는 존재론적 원리를 설정했고, 다산은 이 가교로 '신=상제'라는 신학적 원리를 설정했다는 차이밖에 없다.
이처럼 다산과 주자는 인간개체의 유한성에 대한 통찰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는 모두 두려움(戒愼恐懼)의 공부를 핵심적인 것으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만일 우리 자신이 무한하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두려움의 여지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양 사상가를 통해 유한성의 통찰이 우리 자신이 윤리적 인간으로 태어나는 첩경임을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