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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20 09:43
일제말기 기독교의 친일행위~ 2 이어서
 글쓴이 : 게리
 

1)일본교회와의 합동문제

 1938년 10월 3일 제 3회 조선감리교 총회에서 일본감리교회와의 합동을 결의한 후, 1939년 10월 19일부터 열리는 일본감리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양주삼 등 7명이 기차편으로 서울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10월 18일 동경 청산학원안에 있는 해리스館에서와 가마쿠라 목사관에서 모여 합동에 관한 8가지 조상의 결정을 하였다.

 결정한 사항을 요약하면 내선일체, 황도의양을 위하여 양측의 교회가 합동은 하되 곧 추진할 것과 양 교회의 친선에 관한 것들이었다.

 성결교회는 「활천」1940년 5월호에서 이사장의 일본교회와의 합동문제에 관한 결과 보고에서 「일본성교회와 우리 성결교회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보아 형제간이라 할 것인데 지금까지 별반 교통이 없이 지내 왔으나 내선일체가 실현되어 가고 각 교파가 내지와 조선이라는 구별을 잊게 연합 또는 합동문제가 회합 때마다 제출되는 마당에 왔다. 이것은 정치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고 오직 신앙의 입장에서 친밀하게 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전제 한 후, 「동경에 가서 일본성결회와 동일하게 교회명을 변경하는 일, 교역자를 서로 교환하는 일, 년회에 서로 대표를 파송하는 일 등이 체결되었고 제반 문제는 양 교파에서 3인씩 연구위원을 두어 구체적으로 연구중이다.」라고 보고하였다.

 

2) 조선기독교 연합회

 일본교회와의 합동을 통한 예속화와는 별도로 일제 한국교회 안에서의 교파합동을 위에서와 같은 목적으로 추진하였는바, 먼저 1938년 5월 8일 년 후 2시, 서울 부민관에서 총독부 학무국장, 경기도 지사, 경기부윤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인 목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경기기독교연합회 발회식>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임원을 맡은 사람은 정춘주, 김우현, 신재명, 김종우, 원익상, 장홍범이며, 81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황궁요배, 황국신민서사등의 시순을 진행한 후, 성명서를 발표한 바,

「현하 아국시국의 중대성을 감(鑑)하야 국시(國是)를 체(體)하며 국민정신의 진작을 도(圖)함은 가장 긴급사임을 인하고 자에 조선에 있는 기독교 신도는 단결 협력하야 동포의 정신작흥에 자(資)하고 일층 전도에 정진하야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의 성(誠)을 치(致)하기를 기(期)함」

 경성기연(京城基聯)의 성격이 성명서의 내용에서 나타나며 이 모임으로 인하여 교회일각이 굴복하자 지방의 연합회와 각 교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 1938년 7월 7일에는 <조선기독교회합회>가 기독교의 황민화,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조직되었는 바, 김종우, 차재명, 원익상, 이명직, 김우현, 윤치호, 장홍범 등과 경성에서 30명, 지방에서 30명의 목사들이 참여하였다.

 

3)조선기독교 혁신교단

 일제는 1943년 4월, 서울에 있는 친일파 목회자들과 감리교를 주축으로 하여 조선혁신교단을 조직하였다. 이 모임에 장로회의 윤인구, 최석주, 전필순이 참여하였고 전필순이 의장이 되어 교단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런데 경성노회 김영주 목사는 경성노회에서 혁신교단에 참여하기고 결정한 일이 없다며 전필순 목사의 제명론이 거론되자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혁신교단에서는 일제가 눈에 가시같이 역기는 구약의 출애굽 사상과 신약의 예수의 해방적 교훈과 행동을 제거하려 하였다. 또한 위의 내용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을 빼며 묵시록을 제거하였으며, 복음서에서는 산상중훈만이 경전이라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혁신교단의 주축이 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내에서 혁신교단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이 일기 시작했고 결국 혁신교단은 몇몇 친일자의 모임으로 유명무실해졌다.

 

4)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1942년 12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제 2회 정기총회에서 통리자가 된 변홍규 목사는 혁신교단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으므로 일제는 공작 끝에 변목사를 사임케 하고 친일적인 교단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교단명칭을 바꾸고 교단규칙을 제정, 발표하였다.

 규칙 내용에서 「1943년 8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다시 혁신을 단행하여 명실공이 대 일본의 종교임을 밝히게 되었다.」는 선언을 하였다.

 이어 1943년 10월 14일 <교단규칙실시방법 통달의 건>에서 각 교회 명칭을 변경하라고 제시했다.

 

5)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장로회 역시 혁신교단 문제로 진통을 겪다가 1943년 5월 4일 피어선 성서학원내에 있는 장로회 총회사무실에서 당시 총회장 김응순에 의하여 제 31회 총회에서 선출된 상치위원(上置委員) 및 그리고 헌법개정위원, 교파합동위원들이 모여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초안을 심의하는 줄 알았으나 이본기독교조선교단안이 나오자 논란이 심하였다. 그러나 김응순이 규칙초안은 총독부 보안과의 검인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찬반이 엇갈려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결국 다음 날 제 2차 회의에서 규칙안을 수정없이 통과시켰고, 다만 채필근이 제안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명칭만은 수정하자는 것으로 가결하였다.

 1943년 5월 7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총회 임원과 의장이 선출되었는바, 통리(通理)에 채필근, 부통리(副通理)에 김응순, 총무에 김종대 목사가 되었다.

 교단 총회 임원에는 의장에 조승제가 선임되었다.

 이날 오후에 이들의 취임예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종교정책에 잘 길들여진 교단으로 변절하였다.

 1941년 심명섭(감리교 본부위원)은 「교파합동에 기함」이란 감리교보사설에서 「교회내 분파적 항쟁을 자성 회개해야 한다.」고 전제한 후, 「교파마다 특색과 습관이 있겠지만 겸양의 태도로써 노력하면 난(難)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제시했다.

 1943년 9월 부전(富田, 일본기독교단 대표)은 조선호텔로 각 교파 간부들을 초대하여 한국교회의 합동을 강조하였는바, 이 모임에 참석한 각 교파대표들은 박연서, 이동욱, 최지화,정인과, 전필순, 이명직 등이었다.

 이들의 회동 이후, 장로회단은 1942년 10월 16일부터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열린 제 31회 총회에서 <조선내 기독교 교파합동의 건>을 가결하고 그 교섭위원 선정은 중앙상치위원에게 일임한다고 결정했다.

 감리교단도 동년 12월 2일에 열린 제 2회 총회에서 교파합동을 가결하였는 바, 합동에 관한 명분을 「그리스도 정신에 기인하여 조선기독교 각파를 합동하여 단일교단을 조직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 교파합동 전권위원 8인을 선임하여 타 교파와 교섭할 것을 결의했다.

 1943년 1월 12일 조선기독교 교파 각파 합동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제 1회 모임을 중앙교회에서 가졌는바, 모인 교단은 다섯 교단(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일기(日基)조선교구회)으로 김자종대(金子鐘大)의 사회와 국민의례, 기도(이명직 목사)로 시작하였다. 다섯 교파들이 합동키로 하여 다음 사항을 결의하였다.

 ① 합동의 범위

 ② 준비위원 비례 : 장로회(9명), 감리교(9명), 성결교(4명), 일기조선교구회(4명), 구세군(4명)

 ③ 제 1차 준비위원 모임 : 1월 26일, 새문안 예배당

 ④ 합동 임시군무소 : 정목장로교회 사무실

 이 준비 모임에서 결의한 대로 1943년 1월 26일과 3월 16일에 열린 두 번에 걸친 회합을 새문안 교회에서 모였으나, 각 교파마다 역사가 다르고 교리적 배경이나 교회법이 달랐기 때문에 합동문제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교단의 상황속에서도 일제는 재차 교파합동을 요구한 바, 1945년 7월 19일 교파합동 찰핍위원회를 정동교회에서 열어 장로회 대표 27인, 감리교 대표 21인, 구세군 대표 6인이 참석하여 교파합동을 추진한다는 합의가 이루워 졌고, 1945년 8월 1일에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위임진은 투표에 의해 선출하려 하였으나 총독부가 요구하는 대로 김관식 목사를 통리로 동의하였고, 총독부 정무총감 고오도의 치리(治理)를 받게 되었다.

 

3.전쟁동원과 기독교

 

a. 징병, 징용에서의 역할

 1) 징병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부터 전쟁 인력의 부족을 느껴 지원병의 형태로 한국 청년을 전쟁에 이용하기 위하여 육군특별지원병령을 1938년 2월 2일 칙령 제 95호로 공포하고 동년 4월 3일부터 시행했다.

 지원병 실시에 윤치호는 지원병제도를 실시히여 조선인들을 믿어 주신데 대하여 크나큰 감격과 감사를 느낀다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면서, 다만 염려되는 것은 당국의 신뢰에 관연 조선 청년들이 만족할 만한 성적을 올릴까 걱정이라면서 청년들에게 분투할 것을 호소하였다.

 지원병 모집 내용은 지원병을 전후기 합쳐 400여명을 선발해서 훈련시킨다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발표에 의하면 1938년 8월까지 약 3,500여명의 지원자가 살도(殺到)해서 6.7 : 1 이란 높은 지원율을 기록했고, 징병령이 실시되기 이전인 1943년까지 약 1만 8천 가량의 한국 청년이 일분군에 지원 입대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시적 흥분으로 철없이 지원한 경우도 있었지만

 ① 농촌 피폐에 못 견디어 살길을 찾아 지원한 경우

 ② 일제의 교묘한 술책에 현혹되어 지원한 경우

 ③ 지원병 제도를 찬양한 이른 바, 지도자들의 강력한 권유로 지원한 경우였다.

 ①의 상황은 농촌 생활의 궁핍으로 노동 이민으로 가는 것보다 차라리 군대에 간다라는 생각을 하여 지원을 하는 사람들로서 증가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②의 경우는 ㄱ.지원병 축하회등 분위기를 형성하는 작업 ㄴ.신문등을 동원하여 선전케한 바, 지원병에 입대하여 최초로 전사한 이인석에게 훈장을 추서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③항은 대개 지식인들이 참가했는데, 강연회 개최, 선동적 활동 등을 통해서 지원병 모집에 광분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시국강연반을 구성하여 전국을 돌며 시국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동아안정 세력으로써 일본의 지도적 위치를 인식시켰는 바, 약 1주일 또는10일 정도의 일정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주로 강연을 한 자들은 김영섭(감리교 목사), 김우현(장로회 목사), 양주삼(감리교 총리) 등이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은 1940년 1월 이후, <1정(丁)연맹 1명>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강연회, 좌담회등을 통해서 지원병 권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감리교회에서는 1940년 9월에 발표한 <기독교조선감리회 혁신조항>에서 「교도들이 지원병에 다수 참가할 것과 교도들에게 병역의무를 철저히 인식케 할 것」을 각 교회주관자들에게 협조 요청을 하였다.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미국과 관련이 깊은 교회에 대하여 먼저 미국을 증오토록 유도케 한 바,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교계 대표들이 모여 미, 영 타도 좌담회를 개최케 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양주삼외 17명이었으며 좌담회 내용은 미, 영에 대한 비방일색이었다. 미국과 영국에 대한 비방은 일본의 전쟁정책에 의한 협조적 색채가 강하게 난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몇 안되는 진실한 선교사들의 사랑과 희생을 오히려 미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공격하는 모순도 보이고 있다.

 

                  <표1. 미·영 타도 좌담회 참가자 및 화제내용>

    <최원규 엮음. 일제말기 파시즘과 한국사회. 서울: 청아출판사, 1988 p291-341>

 

 1941년 12월 10일,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결전보국대강연회가 열렸는 바, 신흥우는 「세계의 교란자는 누구인가」라는 강연 중 「한번 결전하는 이상 제국 행로에 종(腫)으로 있는 적성국가는 분쇄시켜 세계 인류의 참된 평화와 신동아 건설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전제 한 후, 여기 모인 제군들은 세계의 교란자가 누구인가를깊이 인식하여 그 책임자를 격멸(擊滅)하자고 결론을 지었다.

 또 한동년 12월 27일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열린 <부인대회>에서 김활란은 <여성의 무장>이라는 강연을 하였는 바, 「흑노(黑奴) 해방의 싸움을 성전이라 했고 십자군 싸움도 성전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은 정말로 내려진 것이다. -생략- 희생(犧牲)의 투구를 쓰고 적성(赤性)의 갑옷을 입고 긴장과 자각으로써 허리띠를 매고 제 1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하여 미·영을 격퇴하여 버리자」고 호소했다.

 전쟁이 확산되고 전선에서 전황이 치열해 지자 일제는 결전 비상조치를 취했는 바, 1942년 5월 8일 총독부는 조선동포에 대하여 1944년부터 징집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한다는 결정이 보도되자 친일자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 그리하여 앞을 다투어 자신들의 견해표명, 감사예배, 결의대회, 감사전문 보내기 등을 대규모로, 계속적으로 해 나갔다. 사실 이러한 제도가 생길 때마다 친일자들은 감격해 하였다.

 윤치호는 징병제 실시에 대한 축하 메시지에서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와 각오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 얼마나 감격적인 소식입니까 -생략- 오늘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니 오늘부터 우리는 내지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보조하여 대동아 전선에서 싸우게되는 감격을 새롭게 가지게 되며 온 반도인들은 오직 감격해 사모(思募)칠 것이다.」 라고 축하의 변을 토했다.

 1942년 5월 11일 각 교파 연합으로 승동예배당에서 <징병제감사기독교 신도대회>가 1,000여명의 신도들과 창무(創茂) 조선군 보도부장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신도대회 내용은 국민의례, 감격사, 결의(수상 이하 관계당국에 감사전문을 타전), 강연(보도부장 :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경위, 고미(高尾) : 일제의 이상), 성명서 낭독, 성수만세(聖壽萬歲) 등으로 이어졌다.

 성명서에서는 「30여년간 조선 시정(施政)중 최대의 업적이며 내선일체 이념에 현실적 요소를 넣은 것이며 황국신민의 대도가 열린 것이다. -생략- 이 감격에 울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황국신민의 감격을 표했다.

 감사전문은 「조선 청년에 대해서 징병제 실행의 결정에 아등은 감사 감격한다. -생략- 황은에 대하여 맹세코 받들어 보답 할 각오이며 일사순국(一事殉國)의 결의를 나타낸다.」는 의지를 전문에 담아 보냈다.1942년 5월 16일 야소교성결회(耶蘇敎聖潔會) 이사장 이명직의 이름으로 각 교회주임교역자에게 보내는 <반도에 징병제도실시 축하의 건>이란 공문에서 「천황폐하의 일시동인(一視同仁) 하시는 성지를 인하여 징병제 실시를 강조하면서 축하회를 개최하되 당국에 문의하여 지도를 받아 형편에 따라 식순을 가질 것, 축하예배 순서는 경계, 국가봉창, 궁성요배, 성명서 낭독, 감사전보, 황국신민서사 제창, 천황폐하 만세」를 넣도록 하였다.

 뒤이어 1942년 5월 17일 경성지역 성결교회 연합으로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성결교신도대회를 열고 징병제 축하강연회를 갖고 성명서를 채택하였는 바, 요약하면 「반도에서 징병제 실시 방침확립은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2천 4백만 동포는 기쁨과 감격에 달했다. 성결교 신도들은 신명을 바쳐 대동아건설에 만전을 기하며 무궁한 황은에 감사하여 봉공하며 진충보국을 결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재경(在京) 구세군단원 연합회에서도 징병제 실시 감사 강연의 밤을 열고 감사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각 지역별로도 징병제 실시에 대한 대회들을 개최하였는 바, 진남포 지역에서는 구세군 서선지방 본부 주최로 1942년 5월 17일 중앙회관에서, 동년 6월 8일 해주에서도 강연회와 국방헌금, 그리고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6월 10일 용강에서는 평서로회 주최로 징병제도 축하식을 거행하였고, 6월 17일 청송군 현동면 도평 장로교회에서도 징병제 실시 감사회를 열었다.

 장로교 제 31회 총회에서 총간사 정인과가 보고를 한 바, 「1943년 2월중 본부 주최로 대동아전쟁의 목적과 기독교도의 의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연사를 파견해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자 하며 징병령 실시를 철저하게 촉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신문 이사 박인덕은 <징병제 실시와 반도여성의 각오>란 사설을 실었고, 조선구세군본부의 회원정의(檜原正義)도 <열혈남아는 결전장으로 나서자>란 촉구문을 실었다.

<표2. 친일자들이 징병을 위한 활동>

 

<임종국,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 p172-217>

 

 

2)징용

 일제가 제 2차대전에 총력을 기울임에 따라 군대의 증강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력 또한 청장년의 대량 진출에 인력난과 군수산업의 폭발적인 노동수요 증가는 1942년부터 '국민동원계획'으로 수정 강화되었고 1943년 10월 8일의 '생상증강노무강화대책요강'은 국민 징용령에 의한 유휴불급(遊休不急)노무의 전면도원의 전용과 근로보국대의 강화, 군 비복무자의 노무동원과 여자노무의 대체이용 강화 등을 규정한 것이었다.

 징용은 현원징용(現員徵用) 및 친규징용(親規徵用)으로 대별되며, 친규징용은 특수징용과 일반징용으로 구분되는바, 한국에서는 일반징용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드 끌어가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강제적 연은 상부로부터 일정한 숫자를 할당받은 면사무소의 노무계 담당자와 마을 구장(區長)등이 계획을 세워서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곧바로 징용으로 보내졌다. 이러한 일을 일본인도 아닌 말단의 부일한국인의 행패가 더욱 심하였다.

 강제로 연행하기 위한 집단적이고 조직적 방법인 국민동원 계획에 의한 동원을 하였다. 하지만 목표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원인이 조선총독부 보고서에 나타나고 있는 바, 「최근에 일반징용의 실시가 발표되자 일부 지식층 및 유산계급 중에서 재빨리 도피하거나 혹은 주거를 전전하는자, 그리고 병(病)에 걸리게 하여 자기의 수족에 상처를 내어 불구자가 되어 징용을 기피하는 자들이 생겼다.」는 보고를 한 사실에서도 파악된다.

 이 보고서에서 징용의 처참한 현상이 나타나는 바, 민심의 이러한 동향을 외면하면서 친일자들은 국민개로(國民皆勞) 산업보국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징용동원에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교회내에서도 나타나는 바, 기독교신문은 1944년 1월 25일과 2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국민징용령이란 무엇인가? 라는 내용을 연재한 바, 「징용은 병역에 다음가는 중요하고도 영광스런 의무이기에 징용된 사람은 충성을 다하여 명한 바 일에 충실하여야 되는 성스러운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징용의 대열에 설 것을 촉구하였다.

 이어 1944년 6월 1일자 사설 <징용과 부인(婦人)>에서는 「결혼이 징용을 피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라면 전시하 국민이 옳치 못한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항문(港門)의 사태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후, 국가봉사를 위해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고 여자의 징용참가를 권유하였다.

 일제는 1944년에 접어들면서부터 12-40세 미만의 처녀를 <자녀정신대>라는 이름 아래 병사들을 위한 위안부로 강제 징용하였는 바, 특히 여학교에 대하여 2명씩의 여학생을 정신대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일제의 강요에 소위 여성지도자란 사람들이 앞장을 섰는데, 김활란, 박마리아, 박순천, 박인덕, 박은혜, 유각경, 황신덕, 임숙재, 모윤숙, 최이권, 서은숙, 배상명, 박승호 등은 민족의 딸들을 강제 징용하는데 충실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행위는 동족으로써, 같은 여성으로써 영원히 씻지 못할 죄악이라 할 수 있다.  

 

2. 국방헌금, 군수품 헌납

 1) 국방헌금 및 기타 활동

 일제는 1938년에 '물자동원내용'을 발표하였는 바, 그 내용은

 ①군수물자의 확보 ②비상시 국민생활양식의 확립 ③주요 물자의 증산 ④폐품회수의 조직화 ⑤군수공업의 능률화 등이다.

 이러한 일제의 방침에 의해서 강행된 것들은 국방헌금, 위문금품, 저축증대, 금제품 헌납 강요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제의 방침에 의하여 국방헌금을 강제적으로 요구한 바, 제일 먼저 1938년 11월 수원지구 각파 교역자들이 수원읍내 종로 예배당에서 <시국인식좌담회>를 열고 15원 14전을 모아 헌금한 것을 필두로 하여 계속적으로 각 교파별, 지역별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감리교회는 1942년 3월까지 양덕교회외 72개 교회에서 241원 84전을 헌금을 하였다.

 이는 국방헌금이 교단이 주도하여 개교회(個敎會)와 총회부속기관에게 협조를 요구하여 이루워 졌으며, 교단행사에서도 행해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표3. 국방헌금>

<장로회 27, 30회총회록, 감리교 3회년회록, 감리교보 1942년 1월 1일자, 기독교신문 1942년 9월 22일자 외>

 

 전시하 한국교회는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 위문품 전달, 출정군인가족들을 위한 일들을 하였는 바, 감리교는 황군위문품을 윤천읍교회외 222개 교회에서 교단의 이름으로 헌물하였다.

 

 2)군수품 헌납

 일제는 1941년 칙령 제 835호 '금속호수령'에 의한 시행규칙을 시해함으로써 철제품, 고철류의 회수에 안간힘을 다하여 동상, 철문, 철책, 가정의 쇠난간까지 요구했다.

 이에 1942년 2월 13일 기독교조선감리교단 통리자 정춘수가 각 교구장 앞으로 보내는 <황군위문 및 철물헌납의 건>이란 공문에서 교회당에 부설된 철물, 철책들을 자진 헌납했으며, 교회종도 헌납하여 성전에 협력하고 승전기념이 되도록 할 것을 지시했다.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총연맹 이사장 최지화가 각 노회이사장 앞으로 노낸 <헌종상황(獻鐘狀況)긴급조사의 건>이란 공문에서 4월말 현재로 조사표에 의하여 5월 5일까지 보고해 달라고 지시했다.

 

조사표

①노회별 ②종(鐘)소유 교회수 ③4월말현재 완납종수 ④헌납종 총액   ⑤4월말 헌납키로 결의한 종수 ⑥헌납할 의사가 있으나 아직 미결 종(鐘)수 ⑦전연 헌납 할 의사가 없는 종(鐘)수 등 이었다.

 1942년 10월 15일까지 헌납한 종 수는 1540개로써 119,832원이나 되었다.

 1942년 8월 25일 기독교신문은 사설 <금속회수에 힘을 다하자>에서 「현재 국민으로서 손쉽게 할 수 있는 봉공의 하나는 금속류의 공출이다 당국이나 지도층의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힘을 다하여 금속류의 공출에 또는 헌납에 성의를 다하자.」라고 촉구했다.

 금속류 뿐만 아니라 전쟁용 무기를 구입하기 위한 헌금과 헌납이 무르익어 갈 때, 1942년 9월 20일 장로회에서는 교단을 대표해서 지도자들이 해군대신, 해군소장 등 약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운동장에서 <장로회헌납 해군기인도식>을 하였는 바, 전필순 등 9명의 지도자들이 해군기를 헌납하자 해군대신은 이름을 조선 장로호로 명명했고 감사장과 헌납서를 주었다.

 동년 11월에도 육군환자용 자동차 3대 (시가 23,221원 28전)를 조선신궁 봉찬정에서 헌납하였는 바, 이와 같은 헌납사항을 31개 교회에서 최지화는 보고하였다.

 1944년 1월 12일 조선예수장로회 평북노회장 김성수의 이름으로 보낸 <긴급 실행되어야 할 애국사업에 관한 건>이란 공문에서 애국기 헌납기금을 위한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평북노회에서 모금 할 금액이 일만이 목표이니 관내 교회들이 적극 협력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감리교회에서도 1944년 7월 7일 일본기독교감리교단 총리 정춘수의 이름으로 교회주관자들에게 보내는 교회주관자들에게 보내는 <애국기헌납 및 교회병합실시의 건>이란 공문에서 군용기 헌납에 관한 사항과 이를 위한 교회병합실시 교회를 발표했다.

 1944년 4월 15일 기독교신문은 <거듭 보국기 헌금운동에>라는 사설에서 「--그러나 비행기 헌금을 만든다고 하면서 교회재산을 팔아 버린 후, 목사 퇴직금이나, 주택이니 무슨 경비니 이름 지어서 다 제하고 나머지 부스러기만 비행기 헌금을 내놓는 것은 반대한다.」고 전제한 후, 국가에 바칠 때는 모두 바치는 것이 옳다고 강변하였다.

 그 밖에 회양군의 신안리 교회, 회양읍의 방어리 교회, 현리 교회, 금화군의 금화읍 교회, 진남포지방의 신덕 교회등의 예배당도 처분되었고 이 교회에게 속하였던 대지 2만여평, 부속전답 5만여평, 양총리의 사재로 기증하여 사급기금(思給基金)으로 삼으려고 황해도 연백에 사 두었던 논 2만여평과 공주 영명학교에 소속되었던 전답 1만여평도 처분하였다.

 

<표4. 친일단체에서의 활동>

<임종국,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 p187-243>

 

Ⅴ.결어

 본 연구는 일제말기 한국교회의 친일활동을 구체적으로 실증하였는 바, 이에 따라 Ⅱ장에서는 친일파에 대한 규정과 구한말과 일제초기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한국인식을 Ⅲ장에서는 황국신민화의 첫 걸음으로써의 한국교회가 행한 신사참배 과정을 살폈고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들이 어떤 내용과 방법으로 황국사상을 고취시켰는가를, 일본교회와의 합동과 각 교파의 연합이 일제에 얼마만큼의 협조가 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또한 한국교회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하여 인적, 물적자원을 어떻게 공급하였는가를 고찰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확인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신사참배는 일제의 강압만으로 이루워진 것만이 아니고, 교계와  지도자들의 협력에 의하여 이루워 졌으며, 신사참배자들의 대부분이 그후, 갖가지 친일행위를 거듭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순수(純粹)한 신앙행위'라는 소위 교회를 비정치화의 명분으로 신사참배등을 수용케 하면서 점차 친일화해 가는 것을 살폈다.

 2. 한국교회의 황국신민화 현상에서 황국사상 고취는 신문, 신앙지 등의 언론을 통해서와 예배, 집회에서 황국신민화로의 내용변경 등으로 의식을 마비시키는 작업 등 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이 동원되었으며 또한 일본교회와의 합동과 각 교파간의 연합은 친일세력의 조직화 과정으로 파악되었다.

3. 침략전쟁을 위한 징병, 징용의 역할에서는 개인과 단체를 막론하고 호별방문, 권유 등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다는 점과,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 위문품 전달, 출정군인가족에 대한 격려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 국방헌금, 군수품 헌납은 주로 교단 차원에서 주도되었다는 사실이다.

4. 건국 이후에도 사회 및 종교계에 많이 알려진 유명인사들의 확실한 친일 행동이다. 건국이후에도 영향력을 많이 미쳤던 김활란이 그 예이다.

 하지만 많은 목회자들과 신도들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 그들의 신념에 따라 항일의 태도를 취한 것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에 천주교에서는 대 국민성명의 형태로써 일종의 고해성사를 하였다. 근·현대사에서 그들이 선교라는 미명하에 소홀히 하였던 민족과 국가에게 잘못을 고했던 것이다. 비록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살인'이라고 말한 것을 뉘우치는 표현이 보일 정도로 자세하지는 않았으나 종교계에서 처음으로 자기의 잘못을 시인 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 나라에서 영향력이 매우 큰 개신교는 그러한 일에는 정말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과거를 미화하려는 행위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차라리 과거를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고찰하여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아름다운 과거만 있는 역사는 없다. 어느 나라도, 어느 사람도 과거 전체가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나라 3대 종교에 들어가는 개신교는 그러한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과거를 미화하려는 욕구는 소수인들만이 할 수 있는 자기방어이다. 다수인을 차지하면서 소수인들만이 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확실히 개신교가 과거에 대한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는 것이라는 반증이다.

 ●참고문헌

일제말 한국개신교의 부일에 대하여  나석주,          건국대학원, 1989

한말 일제하 기독교 민족운동        최진숙,                     1996

한국사회 친일지배집단에 관한 연구  신병준,          전북대학원, 1999

한국기독교는 민족주의적이었나      강돈구,          역사비평,   1994

한말 근대화와 기독교               노치준,          역사비평,   1994

해방전후사의 인식                  송건호외         한길사,     1995

친일파 99인                        반민족연구소     돌베개,     1993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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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생폼사 15-03-20 13:08
 
조선기독교 연합회
「현하 아국시국의 중대성을 감(鑑)하야 국시(國是)를 체(體)하며 국민정신의 진작을 도(圖)함은 가장 긴급사임을 인하고 자에 조선에 있는 기독교 신도는 단결 협력하야 동포의 정신작흥에 자(資)하고 일층 전도에 정진하야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의 성(誠)을 치(致)하기를 기(期)함」
학동 15-03-20 15:05
 
일본교회와의 합동문제

1. 1938년 10월 3일 제 3회 조선감리교 총회에서 일본감리교회와의 합동을 결의'
2. 1939년 10월 19일부터 열리는 일본감리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양주삼 등 7명이 기차편으로 서울을 출발
3. 이들은 10월 18일 동경 청산학원안에 있는 해리스館에서와 가마쿠라 목사관에서 모여 합동에 관한 8가지 조상의 결정
4. 결정한 사항을 요약하면 내선일체, 황도의양을 위하여 양측의 교회가 합동은 하되 곧 추진할 것과 양 교회의 친선에 관한 것
학동 15-03-20 15:10
 
조선기독교 연합회

1. 이들은 황궁요배, 황국신민서사등의 시순을 진행한 후, 성명서를 발표
 「현하 아국시국의 중대성을 감(鑑)하야 국시(國是)를 체(體)하며 국민정신의 진작을 도(圖)함은 가장 긴급사임을 인하고 자에 조선에 있는 기독교 신도는 단결 협력하야 동포의 정신작흥에 자(資)하고 일층 전도에 정진하야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의 성(誠)을 치(致)하기를 기(期)함」
2.  경성기연(京城基聯)의 성격이 성명서의 내용에서 나타나며 이 모임으로 인하여 교회일각이 굴복하자 지방의 연합회와 각 교회들에게 큰 영향
3.  1938년 7월 7일에는 <조선기독교회합회>가 기독교의 황민화,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조직
4.  김종우, 차재명, 원익상, 이명직, 김우현, 윤치호, 장홍범 등과 경성에서 30명, 지방에서 30명의 목사들이 참여
학동 15-03-20 15:12
 
조선기독교 혁신교단

1. 일제는 1943년 4월, 서울에 있는 친일파 목회자들과 감리교를 주축으로 하여 조선혁신교단을 조직
2. 혁신교단에서는 일제가 눈에 가시같이 역기는 구약의 출애굽 사상과 신약의 예수의 해방적 교훈과 행동을 제거하려 함.
3.  또한 위의 내용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을 빼며 묵시록을 제거하였으며, 복음서에서는 산상중훈만이 경전이라는 결의
4. 그러나 혁신교단의 주축이 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내에서 혁신교단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이 일기 시작했고 결국 혁신교단은 몇몇 친일자의 모임으로 유명무실
학동 15-03-20 15:14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1. 1942년 12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제 2회 정기총회에서 통리자가 된 변홍규 목사는 혁신교단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으므로 일제는 공작 끝에 변목사를 사임케 하고 친일적인 교단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교단명칭을 바꾸고 교단규칙을 제정, 발표
2. 규칙 내용에서 「1943년 8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다시 혁신을 단행하여 명실공이 대 일본의 종교임을 밝히게 되었다.」는 선언을 하였음
3.이어 1943년 10월 14일 <교단규칙실시방법 통달의 건>에서 각 교회 명칭을 변경하라고 제시
학동 15-03-20 15:16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1. 장로회 역시 혁신교단 문제로 진통을 겪다가 1943년 5월 4일 피어선 성서학원내에 있는 장로회 총회사무실에서  교파합동위원들이 모여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초안을 심의
2. 김응순이 규칙초안은 총독부 보안과의 검인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찬반이 엇갈려 회의를 진행하지 못함
3. 제 2차 회의에서 규칙안을 수정없이 통과시켰고, 다만 채필근이 제안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명칭만은 수정하자는 것으로 가결
4. 1943년 5월 7일 이날 오후에 이들의 취임예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종교정책에 잘 길들여진 교단으로 변절
학동 15-03-20 15:18
 
전쟁과 기독교

1.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미국과 관련이 깊은 교회에 대하여 먼저 미국을 증오토록 유도
2.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교계 대표들이 모여 미, 영 타도 좌담회를 개최
3.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양주삼외 17명이었으며 좌담회 내용은 미, 영에 대한 비방일색
4.  미국과 영국에 대한 비방은 일본의 전쟁정책에 의한 협조적 색채가 강하게 난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몇 안되는 진실한 선교사들의 사랑과 희생을 오히려 미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공격하는 모순도 보이고 있슴
학동 15-03-20 15:20
 
기독교와 징용

1. 기독교신문은 1944년 1월 25일과 2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국민징용령이란 무엇인가? 라는 내용을 연재한 바, 「징용은 병역에 다음가는 중요하고도 영광스런 의무이기에 징용된 사람은 충성을 다하여 명한 바 일에 충실하여야 되는 성스러운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징용의 대열에 설 것을 촉구
2.  1944년 6월 1일자 사설 <징용과 부인(婦人)>에서는 「결혼이 징용을 피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라면 전시하 국민이 옳치 못한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항문(港門)의 사태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후, 국가봉사를 위해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고 여자의 징용참가를 권유
학동 15-03-20 15:21
 
국방헌금 및 활동

1. 감리교회는 1942년 3월까지 양덕교회외 72개 교회에서 241원 84전을 헌금을 함
2. 이는 국방헌금이 교단이 주도하여 개교회(個敎會)와 총회부속기관에게 협조를 요구하여 이루워 졌으며, 교단행사에서도 행해졌다는 사실을 발견
3. <장로회 27, 30회총회록, 감리교 3회년회록, 감리교보 1942년 1월 1일자, 기독교신문 1942년 9월 22일자 외>
4. 전시하 한국교회는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 위문품 전달, 출정군인가족들을 위한 일들을 하였는 바, 감리교는 황군위문품을 윤천읍교회외 222개 교회에서 교단의 이름으로 헌물
학동 15-03-20 15:23
 
군수품 헌납

1. 1942년 2월 13일 기독교조선감리교단 통리자 정춘수가 각 교구장 앞으로 보내는 <황군위문 및 철물헌납의 건>이란 공문에서 교회당에 부설된 철물, 철책들을 자진 헌납했으며, 교회종도 헌납하여 성전에 협력하고 승전기념이 되도록 할 것을 지시
2.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총연맹 이사장 최지화가 각 노회이사장 앞으로 노낸 <헌종상황(獻鐘狀況)긴급조사의 건>이란 공문에서 4월말 현재로 조사표에 의하여 5월 5일까지 보고해 달라고 지시
몽마르뜨 15-03-20 18:44
 
일제의 강요에 소위 여성지도자란 사람들이 앞장을 섰는데, 김활란, 박마리아, 박순천, 박인덕, 박은혜, 유각경, 황신덕, 임숙재, 모윤숙, 최이권, 서은숙, 배상명, 박승호 등은 민족의 딸들을 강제 징용하는데 충실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행위는 동족으로써, 같은 여성으로써 영원히 씻지 못할 죄악이라 할 수 있다. 
Best of luck to you! 행운을 빕니다!
혁명밀알 15-03-21 01:39
 
최근에 천주교에서는 대 국민성명의 형태로써 일종의 고해성사를 하였다. 근·현대사에서 그들이 선교라는 미명하에 소홀히 하였던 민족과 국가에게 잘못을 고했던 것이다. 비록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살인'이라고 말한 것을 뉘우치는 표현이 보일 정도로 자세하지는 않았으나 종교계에서 처음으로 자기의 잘못을 시인 한 것이다.
사오리 15-03-22 19:49
 
아기가 태어나려 할 때는 어머니가 수시로 산고의 위험을 겪고, 돈 꾸러
미가 쌓여갈 때는 도적들이 수시로 틈을 노리니, 어느 기쁨인들 근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가난은 씀씀이를 절약하게 만들고 병환은 몸을 아끼
게 만드니, 어느 근심인들 기쁨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은 일이 잘되고 안됨을 매한가지로 보아 슬픔과 기쁨
을 모두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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