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왕은 이념적으로 전 국토와 인민의 주인이었다. 왕의 생활
에 필요한 의· 식· 주 기타 비용은 국가의 공적 기구에서 담당했다.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모든 것이 왕의 것이기 때문에 왕 개인재산이나
비자금이 필요 없다. 조선시대의 관료들은 이런 주장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우선 공적인 기구를 통한 왕의 경비지
출은 제한을 받게 된다. 한정된 국가재정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할 때 왕
도 그 제한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다음으로 왕이 정치를 하다 보면 비자금이 필요한 때가 없을 수 없다.
이념적으로는 일월과 같이 투명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치현실
이 늘 그럴 수많은 없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돈을 써야 할 때 공적
인 기구를 통해 자금을 충당할 수는 없었다.
그 외에 국가의 공적기구에서 왕실가족들을 위해 배당한 예산이 부족
하기도 했다. 왕비· 대비· 그리고 왕자· 부마 등 왕족들이 품위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돈이 필요했다. 국가에서 배정한 예산이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사사로이 이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비자금을 운용했다.
조선시대 왕의 비자금은 태조의 개인재산에서 비롯되었다. 태조는 입
신출세하기 이전부터 동북면에 막대한 재산을 가진 재력가였다. 고려말
의 무공으로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되면서 태조가 형성한 재산은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조금 과장하여 말한다면 함경도 지역 토지의 3
분의 1을 태조가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 태조가 소유한 노비의
수도 적지 않았다.
태조가 조선을 창업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개인재산을 국유로 할지
아니면 사유로 할지 의론이 분분했다. 그러나 태종이 이성계의 재산을
사유로 하고 이를 왕실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했는데, 이것이 왕의 비자금의
원천이 되었다.
조선시대 왕의 재산을 관리한 곳은 내수사內需司라는 곳이었다. 내수
사는 비록 「경국대전」에 정5품아문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제는 내시들이
관장하는 기구였다. 즉, 왕의 개인 노예들이라 할 수 있는 내시들로 하여
금 왕의 비자금을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왕의 은밀한 자금을 관장하기
에는 내시들이 적합했던 것이다. 따라서 양반관료들은 왕의 재산이 얼마
나 되는지 또 그 자금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내수사는 전국에 걸쳐 있는 왕의 재산을 관리, 증식시켰다. 조선시대
의 재산은 주로 토지와 노비였는데, 내사사의 환관들은 왕권을 배경으로
토지와 노비를 무제한으로 늘려갔다. 예컨대 내수사 소속의 토지를 경작
하는 농민들에게는 다른 곳에 비해 세금을 경감시키거나 소작료를 낮게
책정하는 등의 특혜를 베풀었다. 이에 따라 관리로부터 온갖 침탈을
당하는 농민들이 너나없이 내수사 소속의 토지를 경작하려 했다. 이에서
나아가 아예 자신의 토지를 내수사에 헌납하고 그 대신 싼 세금을 내며
관료들의 횡포에서 벗어나려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내수사에서 늘린 재산은 토지뿐만이 아니다. 내수사에 소속된 수많은
노비들도 다른 노비들에 비해 의무가 가벼웠다. 사노비나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들도 서로 내수사 소속의 노비가 되고 싶어 했다.
게다가 내수사에서는 이자놀이, 즉 장리長利활동도 했다. 내수사 소속
의 토지에서 산출되는 곡식을 본전으로 하여 곡식 또는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아 재산을 증식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왕권을 배경으로 한
내수사의 재산 불리기는 사실 한정이 없었다. 또한 누구보다도 유리한
입장에서 재산을 불리기 때문에 경쟁상대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내수사를 통해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한 왕은 이것을 사적으로 운영했
다. 자신의 아들이나 딸들에게 토지나 노비를 하사하기도 하고, 맘에 드
는 신료들에게 사적으로 상을 내리기도 한다. 또한 개인적으로 불사佛事를
일으키거나 국가에 재난이 들 때도 내수사 자금을 이용했다.
특히 노년의 대비들이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불도가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대비는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사찰을 중창하기도 하고 거액의
돈을 시주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 뒷돈을 대주는 사람은 주로 왕이었다.
물론 그 돈은 왕의 비자금에서 나온다.
비자금을 갖고 있기는 왕비나 대비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전기까지의
상속 관행은 아들, 딸 할 것 없이 공평하게 재산을 분배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명문대가의 출신들인 왕비나 대비들은 으레 막대한 상속재산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왕비 또는 대비가 되면 공식적으로 국가로부터도
예산배당을 받았다.
이렇게 형성된 자금을 가지고 왕비와 대비는 상궁 또는 내시들을 심복
으로 만들 수 있었다. 왕비와 대비로서는 명실상부한 권위와 체면을 갖기
위해서 상궁과 내시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출가한 자식들에게 가끔씩 인심을 쓰기 위해서도 돈
이 있어야 했으며, 친정식구들이나 고관대작들이 부인들에게 체면을 세
위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다. 이런저런 일로 돈 들어갈 곳이 많기는 왕
이나 왕비, 대비 모두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왕· 왕비· 대비의 개인 비자
금을 운영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