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공산주의가 탄생한 배경
▲ 근, 현대 중국의 대표 지식인 12인
우리는 앞에서 중국에서 필연적으로 공산주의가 태동할 수밖에 없었고,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알게 되었다. 청조가 건국한지 200년에 가까운 시일이 흐른 1800년대 들어서면서 부정부패와 무능의 결과로 유럽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첫째 1840년대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이고, 청나라는 이 전쟁에서 패배해 홍콩을 영국에 떼어주게 된다. 둘째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 유럽의 국가들과 미국, 셋째 뒤늦게 합류한 일본까지 가세하여 ‘청나라 뜯어먹기’에 나섰다. 넷째 1900년대 민족주의 색체가 강한 의화단의 투쟁이 좌절 된 뒤 중국은 유럽제국국가들에게 식민직 혹은 반半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캉유웨이가 시도한 개혁운동과 쑨원이 시도한 개혁운동의 차이점
청 왕조의 무능과 부패로 풍전등화의 길로 치닫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속에는 필연적으로 국가를 개조 시키려는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 캉유웨이가 시도한 개혁의 방향과 쑨원이 시도한 개혁의 방향은 비록 그 차이점은 있지만 누란에 빠진 국가를 위한 길이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는 운동이 나타났다. 캉유웨이와 같은 학자형의 관료는 1898년에 광서제를 받들어 청나라를 유럽식으로 개조해 부국강병의 근대국가로 전환시켜 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치는 수구파에 밀려 실패했다. 반면,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시도하는 운동 역시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쑨원이 일으킨 ‘만주족을 타도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도만흥한倒滿興漢 또는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멸만흥한滅滿興漢 운동이었다.
이 당시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국가가 뿌려놓은 서방세계의 다양한 산물이 있었다. 마치 로마제국이 침탈을 한 후 그들의 우수한 문화를 알리기 위함과 동일한 것이다. 로마제국은 과학적으로 진보된 건축술을 동원해서 수로를 건설하고 원형극장을 짓고 마을을 재설계 하면서 침략국의 민심을 얻음과 동시에 로마제국의 우수성을 알려서 로마의 강력한 힘을 과시했다.
중국도 유럽제국주의가 뿌려 놓은 것은 아편뿐만이 아니었다. 동시에 서방 세계에서 들어온 문화사조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뿌려졌다. 청 왕조의 전근대적인 권위와 부패한 왕조 중심의 인습을 타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젊은이들은 유럽이나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르는 이들이 많았다. 유학생 뿐 아니라 선진화된 공업을 배우러 근로자로 나간 일반 백성의 인원도 상당한 숫자에 이르렀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의식은 썩어빠진 중국을 개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으로 흘러나간 젊은이들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이론을 습득하면서 중국의 지식인사회에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된다. 이들이 추구하는 하나의 공통된 의식은 청 왕조를 가능한 하루빨리 무너트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간절한 바램이었다.
천두슈와 리다자오는 누구인가.
천두슈는 1879년 태어났는데, 그의 경우에는 태어난지 몇 달 안 되어, 아버지가 별세해서 편모슬하에서 성장했고, 리다자오는 1889년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날 때 그의 부친의 나이가 19세 였다. 리다자오가 첫돌을 맞이하기 전에 부친이, 그 몇 개월 뒤 모친이 세상을 떠나게 됐다.
천두슈는 마음 착하고 여린 모친의 성격을 닮아서 뒷날 자신이 어머니의 이러한 성격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정적들에게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주로 당하기만 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라다지오는 비록 일찍 부모가 죽었지만 그의 조부모가 재산이 넉넉해서 일찍부터 좋은 교육을 받은 관계로 성격이 원만했다.
이 둘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영어와 일본어를 습득했고, 천두슈는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했고, 리다자오는 텐진에 있는 일본 신교육을 실시하는 베이양법정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가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등 그 당시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신지식인 들이었다.
이들이 태어나서 자랐던 시기는 1911년 성공한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져 내리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것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 쑨원이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면 이 둘 역시 국가와 민족에 헌신해야겠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순교하겠다는 각오로 중국 혁명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쑨원과 천두슈, 리다자오는 서로 혁명의 방법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었다. 이 둘의 혁명방법과 활동영역은 언론과 출판, 즉 붓을 들고 하는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붓대속에 내제된 사상의 조류는 서로가 전혀 다른 길을 모색했다.
천두슈가 중국의 전통사상을 모두 타파의 대상으로 비판하고 서방세계의 사상을 존중했음에 비해, 그래서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국제주의를 지지했음에 비해, 리다자오는 중국의 전통사상을 선별적으로 비판하고 선별적으로 찬양했으며,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지지했다.
▲ 중국공산당 창당멤버, 사진의 12명과 천두슈 대신 참석한 바오훼이썽과 코민테른 특사
마링과 니콜라예프가 중국공산당 창당의 역사적인 자리에 함께 했다.
쑨원이 1925년 별세할 때까지 천두슈와 리다자오는 같은 혁명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쑨원이 수많은 배신을 통한 행동가적 혁명의 길을 걸어왔다면 이 둘은 붓의 힘을 가지고 많은 신문사 및 잡지사를 차렸고, 주옥같은 글과 논문으로 미개한 중국을 깨어나게 하는데 일조를 한 혁명가들이었다. 이 둘의 징검다리 역할로 인해서 쑨원이 죽은 후 또 다른 혁명가들을 거치면서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장본인들이고 중국공산주의 운동의 창시자들이라는 명성을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