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行’을 개념화 하는 정약용의 전략
선악은 일을 행한 후의 평가라고 하게 되면, 행동하기
전, 행동 하는 중, 그리고 행동 후의 단계를 구별해서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행동하기 전 단계에서는 주체의 행동이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성과 권
형’ 의 개념이 구상된다. 이제 행동을 하고 있을 때와 행동 후의 단계를
살펴본다. 이 단계에서는 구체적으로 행동을 수행하는 몸, 또 주체가
한 행동을 선이라고 평가할 기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하는 과제가
있다.
도구[具]로서의 몸
'심경험'의 ‘구具와 행사’ 이 용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살펴
본다. 몸을 구具로 표현한 의도는 무엇일까?
선유가 항시 기질 청탁을 선악의 근본이라 말한 것은 잘못된 점이 없지 않
다. 진실로 이것으로 선악이 구분된다면 요순 그 자체가 원래 선한 것이니
내 사모할 바 없고 걸주 그 자체가 원래 악한 것이니 내 경계할 바 없다. 오
직 기질을 받아 태어나는데 행, 불행이 있을 뿐이다.
선악의 문제에 있어 기질이 결정적 요인이라고 성리학은 주장하는데,
정약용은 이를 비판했다. 그가 성리학의 해석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몸[形]에서 일어나는 호흡, 혈액순환 등 생명활동을 할 수 있게 하
는 작동자로 기氣를, 그리고 몸의 기인 체질[形氣]을 기질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기와 기질을 유기체의 생명활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재해석하면서 기질은 선악의 행동에 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인, 악의
원인이라고 하는 부정적 평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도덕실천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한다. 실천을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몸이다. '심경험'에서 ‘행사’와 ‘도구具’는 실천과 실천
을 수행하는 몸을 대응한 것이고, 도구라는 표현은 몸의 역할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어서 가능했다. ‘구具’ 용어의 쓰임을 텍스트에서 좀
더 살펴본다. '논어고금주'의 아래 구절을 보면, 신과 형으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는 기질적인 면이 없을 수 없다고 하면서, 몸[形軀] 때문에 악
에 빠진다고 한다.
신과 형이 오묘하게 합하니 사람의 성 가운데 기질적인 면이 따라 나오는
것이 없을 수 없다. 비록 그러하나 사람이 악에 빠지는 것은 총괄하면 이
형形으로부터 나오니, 이는 성인과 범부가 모두 두려워하는 것이다.
형구形軀가 얽어매어 선을 막고 악에 함몰케 하는 도구가 된다.
더구나 이 구절은 형구가 악에 함몰케 하는 도구라고 하여 부정적인
맥락에서 구具를 쓰고 있다. 그래서 구具를 선악과 무관한 중립적인 의
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지 이 용어가 쓰인 맥락을 검토할 필요가 있
다. '논어고금주'의 또 다른 곳에서 ‘구具’의 쓰임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선하지 않을 수 없다면 사람은 공이 없을 것이다. 이에 또 선을 할 수
도, 악을 할 수도 있는 권(형)을 부여하여 스스로 주도하는 대로 맡기어 선
을 향하고자 해도 놔두고 악을 쫓아가고자 해도 놔두니 이것이 공과 죄가
일어나는 까닭이다. …… 진실로 인성이 선하지 않을 수 없(어 선하)다면, 원
숭이가 효도하지 않을 수 없고 벌이 충성하지 않을 수 없고 원앙이 정조를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천하에 어찌 다시 선인이 있을 수 있겠
는가. 이에 다시 선을 할 수도 악을 할 수도 있는 도구를 부여하여 그로 하
여금 선을 따르기를 (산에) 오르는 것 같이 하고 악을 따르는 것을 (산이) 무
너지는 것 같이 하니 곧 이 형구가 이것이다.
권(형)에 해당하는 서술내용과 도구에 해당하는 내용이 ‘선을 할 수
도 악을 할 수도’ 있다고 해서 같다. 형구가 비록 악한 행위를 하는 쪽
으로 더 많이 작용할 가능성은 있지만, 선한 행동을 하기 어렵게 만드
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할 수도 악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것이 몸을 ‘도구’라는 용어로 쓸 수 있는
이유다. 도구는 도구를 쓰는 자가 사용하기 나름이지 그 자체 선하거
나 나쁘다고 할 것은 아니다. 도구라는 용어에서 정약용의 인성론이 행
동, 실천에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