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토록 이상한 안티고네의 정체는 무엇인가
버틀러는 이 대사에서 안티고네의 매장 행위가 오빠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여기에서 오빠는 폴뤼네 우케스와 동일시된 오이디푸스라고 읽어낸다. “안티고네는 이미 오 빠의 위치를 차지해 버렸다.” 안티고네는 오빠들을 대신해 아버지를 돌보았으며, 아버지 대신 오빠에게 테베의 먼지를 뿌렸으며, 폴뤼네우케스와 에테오클레스가 했던 결별을 이스메네와 반복했으 며, 오빠를 대신하여 지하 바위 동굴로 걸어 들어갔다. 안티고네는 가족 내의 거의 모든 남자의 위치를 다 차지해 본 셈이다.
이미 오 이디푸스는 “지금 딸들이 지금처럼 나를 보호하고 있으니, 그 딸들 이야말로 나의 보호자이고,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다.”라고 말하 고 자신의 두 아들이 마치 이집트의 남자들처럼 집 안에 앉아, 집 안의 권력 다툼에 몰두해 있는 반면 두 딸은 아버지를 돕기 위해 집 밖에 있다고 말하여 딸과 아들의 젠더를 역전시켰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안티고네의 유일한 남자로 지정했다. 오이 디푸스의 저주 또는 명령은 결국 실현되었다. 안티고네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오빠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면서 이 저주를 실현하는 동시에 불복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저주를 완성하면서 동시에 배반함으로써 아버지의 명령에 “난잡하게promiscuously 복종” 했다. 뿐만 아니라 아들들은 근친살인을 저질렀고, 딸 안티고네 는 남성 젠더를 획득할 뿐만 아니라 근친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되 어 버렸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 자신의 운명 역시 반복되었다.
요컨대 이 모든 비극은 근친상간으로 이루어진 친족 관계에서 비 롯되어 반복된 것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안티고네는 아버지와 오빠 를 사랑한 근친상간자, 더 이상 여자가 아닌 남자, 그러므로 동성애 자 등의 복잡한 정체성을 띈다. 안티고네의 혼란스러운 죄는 혼란 스러운 친족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안티고네는 친족 관계의 그 무엇에 대해 암시하는 것이 틀림없다. 정신분석학의 독법으로 안티고네를 읽자면 근친상간의 금기가 생 물학적인 재생산과 가족의 이성애적 성애화를 기반으로 해서 친족 을 합법적인 것, 정상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가정에 대해 문제를 제 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그런 정상화가 규제적인 규 범에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친족형태의 대안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가 없다. 오히려 정신분석학은 보편질서로서의 상징계와 우연적인 사회계를 분리함으로써 대안적인 친족의 변화가 능성을 봉쇄하고 있다. 이것이 버틀러의 정신분석학 특히 라캉에 대한 비판이다. 버틀러는 안티고네 ―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 를 정신분석학의 출발점으로 삼아보자고 제안한다. 안티고네가 뚜렷하게 이성애가 아닌 다른 섹슈얼리티를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이성애를 재설정하 는 것으로는 보인다.”
안티고네는 약혼자 하이몬은 안중에도 없 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되기를 거절하고, 흔들리는 젠더로 공적 영 역을 추문에 휩싸이게 하고, 자신의 무덤을 ‘깊이 묻힌 집 kataskaphes oikesis’, ‘신방’이라고 부름으로써 말이다. 이 무덤은 곧 결혼의 파괴가 아니겠는가? 헤겔은 안티고네가 무의식 없이 행 동한다고 주장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안티고네는 그녀의 행위는 흔적을 남기는 무의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무의식은 불가능한 애도로부터 비롯되었다. 무엇보다도 애도 를 금지하는 칙령 때문에 그의 공개적인 애도는 그 자체 범죄가 된 다. 그러나 문제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의 대상이 분명한 경우에는 문제가 없지만, 주체가 상실한 대 상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경우 우울증을 앓게 된다. 누구나 아끼던 사람을 잃게 되면 슬픔에 빠지게 되는데 특수한 경우, 상실 로 인한 슬픔이 지나쳐 분노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분노할 대상이 부재한다는 것이다(죽었으므로). 그래서 무의식적으 로 그 분노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 심한 자책이나 폭력 행사를 하는 병리학적 증세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를 프로이트는 우울증의 일종인 “멜랑콜리아”라고 부른다. 안티고네는 그 특수한 상황 때 문에 자신의 애도 대상이 정확히 오빠인지 아버지인지 알 수 없는, 애도에 실패한 우울증 환자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안티고네는 자신이 상실한 것이 오빠 폴뤼네이 케스라고 오빠의 특이성을 주장하지만 앞서 살핀 것과 같은 이유로 이 주장은 의심스럽다. 안티고네의 두 오빠에 대한 애도는 근본적 으로 불가능하다. 안티고네는 공적인 애도를 하겠다는 고집을 부리 면서 오만함hubris와 남성적인 과잉excess로 자신을 몰고 간다. 버 틀러는 프로이트를 인용하여,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애도를 언어화 하여, 말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선까지 자신을 끌고 간다고 말한다.
대체 말해질 수 없는 것으로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친족구조에는 인간사회에서 한 남자는 딸 이나 누이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자기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양보하는 그 남자로부터만 여자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근친혼의 금지라는 보편적 법칙이 존재한다. 안티고네의 비극은 이 법칙에서 벗어난 그의 친족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버틀러는 여기 에서 근친상간의 금기 이전에 이미 배제되어 있는 동성애를 문제시 한다. 버틀러는 “‘원래’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은 영원히 억압되고 금 지되므로, 결과적으로 그것의 금지로 작동하는 법의 생산물이 된 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레비스트로스와는 대조적으로 섹슈얼 리티와 관련된 금지는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것으로 본다. 근친상간의 금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가 밝히듯 근친상간의 금지가 분명한 이항대립의 구조에 입각해있고, 그것은 “근친상간의 금기가 분명한 젠더 정체성의 생산을 규제”하 는 것이다. 이 생산을 위해 “동성애는 억압되기 위해 생산되어야 하는 욕망으로 등장한다.” 동성애는 배제된 영역에서 등장하지만 부정된 것이 아니며, 죽은 것도 아니면서 죽어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공적 사회의 우울증과도 같다. 동성애를 완전히 애도하지 못 해 이성애 사회 안에 합체하고 있는 공적 영역의 우울증은 사회적 으로 제도화된 우울증으로서, 규율 사회의 그림자 영역이다.
안티고네는 인간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의 언어로서 배제된 것을 행위로 나 타낸다. 이 행위는 단순히 기존의 규범에 동화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행위할 권리가 없으면서 행위하는 그는 인간이 되기 위해 서 전제가 되어야 하는 친족이라는 용어를 전복시킨다. “「애도와 우울증에서」 프로이트는 우울증 환자의 자기 비판적 태도야말로 상실한 애정의 대상을 내면화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다 름 아닌 그 대상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관계는 양가적 상태로 해결 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는 해도, 대상은 에고 안으로 ‘들어오게’ 된 다.” 안티고네는 오빠에 대한 합당한 애도에 실패해서 오빠라는 남성을 자신의 자아에 부분적으로 합체한 우울증 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