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6편「중국」 31- 삼천만명이 죽은 마오쩌둥의 경제실패와 문화대혁명의 촉발
마오쩌둥의 경제적 실패가 불러온 대참사
1956년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제8기 대표회의에서 ‘사회주의혁명의 개시’를 선포하게 된다. 곧이어 1958년에는 ‘대약진운동’의 개시를 선포했으며 ‘인민공사’ 제도를 채택했다. 이 당시 마오쩌둥의 개혁노선은 시기적으로 대단히 적절하지 못했다. 어촌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물이 빠진 밀물 때를 맞추어 갯벌에서 볼일을 봐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마오쩌둥이라는 어부는 하필 썰물이 들어올 때 경제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즉 중국은 이 당시 소련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국내로 들어오던 물자가 크게 줄어들고 있었던 썰물의 상황이었다. 중국 인민 6억 5 천만의 젓줄이던 원조가 줄어들자 다급했던 마오는 농업과 공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하여 인적자원을 동원한 ‘인해전술’ 경제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인류역사의 경제혁명에서 가장 위대했던 혁명이 바로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그러나 대량생산에 의해서 가격이 떨어졌기에 그 혜택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받고 있는 인류 최대의 물질적 혁명이었다. 마오는 이러한 경제혁명을 무시한 채 ‘인해전술’이라는 사람의 노동력으로 생산성을 일으킨다는 원시적 생각을 가지고 중국경제의 혁명을 단행했다. 마오쩌둥의 원시적 경제 실험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는 스스로 실패를 인정했고 경제정책에 대한 수정을 지시하면서 주석 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대약진 운동이 참혹한 결과
▲ 명릉저수지는 1958년 5월 대약진운동으로 시작된 최최의 집단노동 운동
대약진 운동의 배경에는 소련이 있었다. 1957년 흐루쇼프가 농업과 공업의 <생산증산>으로 15년 이내에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마오가 ‘제 2차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당시 세계 2위의 경제력을 가진 영국을 15년 내로 추월할 것이라는 선언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생각은 중국 경제실정을 철저히 무시한 채 자신의 경제적 업적만을 위한 포장된 무리수였던 것이다. 대약진 운동이 1960년에 공식적으로 종결 됐지만 그 참혹한 결과에 대한 역사적 판단은 마오쩌둥의 중요한 오류로 기록되어 있다.
‘대약진 운동은 1960년에 공식적으로 종결됐다. 그 3년의 기간에 약 3천만 명 또는 3,500만 명이 굶어죽거나 굶주림에 따른 질병으로 죽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은 사망자의 수를 대체로 3천만 명에서 5천만 명 사이로 본다면, 마오쩌둥이 추진한 ’대약진운동‘은 전쟁을 하지 않은 채 그 규모의 사람들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마오쩌둥을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하나의 구분점이 됐다. 쉽게 말해, 마오쩌둥의 업적을 이 운동 개시 이전 시기와 이후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사람들은 앞의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좋게 본다. 그러나 뒤의 시기에 대해서는 덜 호의적이거나 비판적이다. 1981년 6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 11기 제 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래의 당의 몇 가지 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대약진운동‘에 따른 농촌 인민공사의’ 성급한 추진은 마오쩌둥의 오류였다고 공식 선언했다.
마오쩌둥이 경제정책에 실패 할 수밖에 없었던 사상적 배경
▲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계를 외면한 채 오직 인간의 노동력으로 생산하려던 대약진 운동(좌)과 수 천만명이 희생된 채 시작된 '문화대혁명'의 집단광기
마오쩌둥이 수천만 명을 굶주리게 만들어 죽게 만든 원인을 딱 한마디로 요약하면 ‘ 근대화를 부정한 반(反)발전적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이 뜻은 근대화를 통해서 경제가 발전하면 사회 속에 관료주의와 자본가 계층이 군림하게 되고, 이 계층이 경제의 불평등과 부조리, 공산주의 사상의 모순을 가져 온다고 본 것이다. 즉, 인구 6억 5천만을 집단농장화 시켜서 공평하게 잘 살게 만드는 것이 불평불만이 없는 총합의 경제적 생산으로 본 것이다. 당시 수천만에 지나지 않았던 영국 인구와 6억 5천만의 중국 인구를 비교하지 않은 채, 경제 총생산의 합을 가지고 마오는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갈 것이라는 유치원 산수계산에 입각한 경제논리를 선언한 것이다.
문화 대혁명 운동이 일어났던 원인은 무엇인가
마오쩌둥이 가지고 있있던 경제발전 사상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오직 ‘공산주의 사상’ 밖에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경제발전도 공산주의 사상 하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마오의 큰 실책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붉은 색을 뜻하는 홍(紅)이다. 이에 반하여 경제를 현실적으로 살릴 수 있는 전문성과 전문기술을 뜻하는 것을 전(傳)이라 한다. 경제 현실이란 전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이고, 홍이란 경제현실과는 동떨어진 정치적인 사상일 뿐이다. 이러한 정치적 사상을 경제에 대입하려 했던 마오쩌둥의 사상이 결국 ‘대약진운동’으로 추진된 결과 수 천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경제사상에 있어서 문외한 이었던 마오의 정신은 결국 군사문제에 있어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마오는 군의 현대화와 현대적 전략의 중요성울 무시했다. 그는 오직 수억의 중국 인민들을 동원한 ‘인해전술’로 ‘미 제국주의 핵 공갈’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력갱생노선自力更生路線을 제시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장강산투쟁 이후 오랜 전투의 동지였던 우리나라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국무원 국방부장인 팽더화이가 “마오쩌둥 사상으로 비행기가 뜨는 것은 아니다” “현대전은 기술싸움이지 정치싸움이 아니다” “총알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대적인 무기와 장비를 갖춰야 한다.”라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마오쩌둥의 군사노선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러한 과정으로 마오쩌둥의 경제정책을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비현실주의자’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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