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와의 족보전쟁 - 7만냥 뇌물 쓰고 산 족보
조선정부는 왕실족보 때문에 또 한 번의 곤욕을 치러야 했다. 청나라가
들어섰을 때가 그때였다.
청나라는 대륙을 석권한 후 동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했다. 조선의 경우
대명 의리론을 주장하다가 병자호란을 자초하기도 했는데, 전쟁에서 참
패한 후 공식적으로 청과 군신관계를 맺음으로써 청의 패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청나라에서 중국 및 주변국들의 역사와 문물을 정리하는 책
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왕조마다 관행적으로 한 것인데, 청나
라는 명나라의 「대명회전」을 본따서 「대청회전大淸」會典」을 만들려 한 것
이다.
조선정부입장에서는 「대청회전」의 원본이 「대명회전」이라는 데 문
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즉, 「대명회전」에는 이성계의 아버지를 이인임으
로 기록한 원본과 이를 수정한 수정본이 있는데, 어느 책을 참조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수정하기 이전의 「대명회전」을 그대로 참조
할 경우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다시 이인임으로 기록되지 말라는 보장
이 없었다.
당시 조선의 왕은 영조였다. 영조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선관련
기록을 수정된 내용으로 해줄 것을 요청하자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될
경우 대국에서 하는 일에 소국이 간섭한다는 책망을 들을 우려가 있다는
반대의견이 제시되었다. 즉,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영조는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대신들이
제시한 방법은 전통적인 방법, 즉 뇌물을 쓰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개적으로 사신을 보낼 것이 아니라 책임자에게 뇌물을 써서 개정내용
으로 수록해달라고 부탁하자는 것이었다. 그 일을 위해 없는 국가재정에
도 불구하고 7만 냥의 거금이 배당되었다.
조선정부의 노력결과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대청회전」에는 개정된 조
선왕실 세계가 수록되었다. 조선시대 족보가 갖고 있던 의미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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