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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15 10:54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 ~ 이어서
 글쓴이 : 게리
 

이 시기에는 기독교와 사회주의 간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글을 쓰던 논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평양 숭실대학의 교수로 근무하던 채필근이었다. 그는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가 상대에 대한 이해가 없음을 비판하였다.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가 모두 약자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점이 유사하나 기독교 신자로서 신봉하는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의 일면의 정신만을 취하고 그 다수의 수단방법을 거부하는 것이 광의의 사회주의에 포함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사회주의가 반드시 종교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며 종교신자는 의례히 사회운동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사회운동가들이 현실적 종교를 반대하는 것도 진리가 있겠지마는 종교자체에도 진리가 있는 것이다"라고 밝혀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에 대한 깊은 관심과 폭넓은 이해가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이 시기의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의 특징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의 영향과 기독교 내부 비판 등의 대내외적 자극에 영향을 받고 식민지 민족현실에 더욱 철저한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기독교사회주의·사회복음주의·민중종교론 등 기독교 사회운동의 지향점들에 대해 활발한 의견들이 주장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극복하려는 움직임들이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사회주의사상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보다는 기독교 자체 내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발견하고자는 경향들이 크게 특징을 이루었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와 사회주의간의 이해가 너무 부족함을 반성하고, 양자간의 이해와 존중의 정신을 추구하는 경향들이 나타났다.

3) 제3기(1929 ~1930년대 초)

 민족협동전선론의 대두에 따라 1926년 중반부터 잠시 중단되었던 반기독교운동은 제6차 코민테른에서 제기된 계급대 계급 전술을 사회주의자들이 받아들이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이후 사회주의자들자에게 형성되었던 혁명적 시기론이 결합되면서 다시 공식적으로 재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가 되면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단체를 민족개량주의 단체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배척운동을 하였다. 특히 이전까지 통일전선의 주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었던 천도교에 대한 대대적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대규모의 종교적 민족동맹(천도교 등)에 속하는 근로대중 가운데서 활발하게 혁명적·계몽적 활동을 행하여, 그들을 민족개량주의의의 지도자로부터 이탈시켜야만 한다. 모든 현존의 혁명적 대중조직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 개인적 자격을 기초로 할 單一民族革命黨 건설의 시도를 대신해서, 공동행동위원회를 만들어서 여러 민족혁명조직의 행동을 협동·통일하고, 프롤레타리아적 공산주의적 지도하에 혁명적 분자의 사실상의 블럭을 수립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에 있어 소부르조아적 민족주의자의 중도반단성과 동요를 비판하며, 대중의 면전에서 끊임없이 폭로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도교와 더불어 기독교 역시 사회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 시기의 종교에 대한 공격은 주로 종교 본질 자체에 대해 이론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종교자체를 현실적으로 거부하고자 하였다는 데 그 특징이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는 일정한 물질적 사회적 근거로 하고 그 곳에 환상적으로 산출된 것이지만, 그 물질적·사회적 근거가 제거되더라도 기계적으로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 사회주의의 건설과 같이 건실한 반종교운동투쟁을 통해서 점차 소멸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와 함께 "최근 종교집단이 민족개량주의의 정치적 도당으로 전화"되었다는 정치적 이유에서도 배척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의 재개 속에서 기독교회와 교인들이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데 다음과 같은 점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첫째, 소련의 반종교운동 과정 중에 탄압을 받는 교회의 소식이었다.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그 기능면에서 긍정적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반종교운동에서 무차별한 파괴와 살상이 계속되자, 기독교인들은 소련의 반종교운동에 대한 우려를 넘어서 이를 적극적으로 반박하였다. 즉 소련의 종교탄압 상황은 국내에서 사회주의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던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갖도록 자극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국외 지역에서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의 피해상황이다. 특히 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간도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한국 기독교인들이 심각한 피해를 당하였고 심하면 살상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즉시 국내에 알려졌고, 국내의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공격자의 진위(眞僞) 여부를 떠나 사회주의자들을 강경하게 인식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종교학과 신학을 체계적으로 전공한 신학자들이 종교적 측면에서 사회주의의 무신론에 대해 집중적으로 반박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들은 주로 사회주의를 종교론 측면에서 인식하고 이를 비판하였다. 이는 "신사조에 일반은 무조건으로 호기적 동감을 느끼고 비판할 여가도 없이 부하뇌동한다. 此에 대한 충분한 비판력이 있어야 하며 특별히 무신론에 대한 철저한 반박론을 기독교인들이 수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렬한 위기감 속에서 대두된 것으로, "사회주의의 근본가치를 철학적으로 철저하게 정해(正解)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한 식별의 의무와 비판의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던 상황과 맞물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이나 일본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박형룡은 이 시기의 활동했던 인물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맑스주의의 종교론은 기괴(奇怪)한 예언으로 파악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의 무신론 주장을 죄악(罪惡)으로 규정하여 한국교회에는 무신론를 대비하는 변증신학(辨證神學)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종교학적으로 무신론을 반박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이론적·철학적인 무신론에 근거하여 종교·기독교 배척운동을 전개하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에서 연유했던 것으로, 이것은 기독교계가 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 및 사회주의에 대해 체계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1920년대 중반만 해도 사회주의 및 반기독교운동을 부분적으로 그 타당성을 인정하던 논자들의 인식변화에서도 이러한 경향들이 입증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재개된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이전에 그 부분적 타당성을 긍정하던 기독교인들 마저 부정적인 태도로 변화되었다.
 예컨대 흥업구락부계열의 신흥우는 이 시기의 반종교·반기독교운동을 "종교도 도덕도 파괴하라 이것이 오직 살 길이다"라고 대중을 선동하고 있으며 사회주의가 근본적으로 사랑보다는 미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긍정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그가 192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을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했던 입장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이제는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 공격과 사회주의에 대해 대립적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1920년대 중반 반기독교운동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윤치호 역시 종교는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마취제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의 무신론에 입각한 기독교 비판을 반박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은 1920년대 반종교운동에 대해 부분적으로 그 긍정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보였던 전영택에게도 보인다. 그는 "현재의 급박한 위기와 역경의 비상시라고 해서 신앙을 버리고 무신운동이 세계를 뒤덮는다고 하나님을 버리라고 함에는 결단코 수긍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최석주는 "반종교운동과 우리의 주장"이라는 글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을 역사적인 고찰과 종교론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반종교운동자의 태도가 어리석고 부자연스럽다고 지적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대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비교·분석을 통해 그 차별성을 밝히고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주의 또는 기독주의에 입각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에서도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에는 두 가지 원칙되는 유물사관과 잉여가치와 합하여 폭력이라는 무기로써 싸우기를 가르쳐왔다"라고 전제하고 사회주의의 이념과 기독교인들의 사랑이라는 정신과는 절대적으로 배치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분배의 기준으로 능력과 업적을 그 기준으로 들고 사회주의는 이를 무시한 균등분배를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나태와 욕망을 조장하고 인간을 물질위주의 투쟁으로 몰아가 결국에 무질서한 사회를 가져오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특별히 사회주의자들의 계급혁명·계급투쟁에 관하여 격렬한 반대를 보였다.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계급혁명·계급투쟁을 인식하였다.  먼저, 계급혁명을 감정적·이기적인 계급전쟁으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상을 뽐내고 타인을 업신여기는 이기적인 것으로 감정적이고 무절제한 가운데 발생하는 것이며 사회를 개선하기보다는 인류와 사회에 큰 해독을 끼쳐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인식하였다. 둘째, 물질적 외부적 개혁으로서만 계급혁명·계급투쟁을 일으킨다고 인식하였다. 계급혁명은 물질위주의 혁명으로 인간의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개혁부분은 무시하고 환경만 개혁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하는 외부개혁에 치중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셋째, 계급혁명·계급투쟁은 폭력적으로 일체의 사유재산을 빼앗아 일괄적으로 평균분배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소개하여 이를 교회의 자기갱신의 작업 속에 반영하려고 했던 흐름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흐름의 특징은 1920년대 보다 체계적으로 논리정연한 입장으로 기독교와 사회주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준성은 사회주의의 여러 종류를 소개하고 공산주의를 포함한 사회주의의 기원과 유래에 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다른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검토는 공산주의 세력의 도전과 비판에 대응하려는 이론적인 노력에서 시작된 것으로 사회주의의 체계적인 고찰을 통해 이를 소개하면서 당시 사회주의가 기독교와는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또한 하경덕은 "사회주의는 너무 개인의 책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본가라 하여 착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벌은 돈을 공리를 위해 쓸 수 있고, 또 중간계급의 등장과 성장은 맑쓰의 자본주의 발달법칙이 과학적 법칙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하여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논리적으로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즉, 사회주의에 대해 심도있게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이를 수용하려고 하던 논자들 역시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이론을 극복하려는 노력 속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이 시기의 특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1932년 7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채택한 12개조의 사회신조(社會信條)에서 결정적으로 잘 드러났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로, 인류를 형제로 신하며, 기독을 통하야 계시된 하나님의 애와 정의와 평화가 사회의 기초적 이상으로 사하는 동시에 일절의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탄압에 반대하고, 진하야 기독교 전도와 교육 급 사회사업을 확장하야 기독속죄의 은사를 받고 갱생된 인격자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사회조직에체 중에 기독정신이 활약케 하고 모든 재산은 하나님께로 받은 수탁물로 알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여 공헌할 것으로 믿는 자이다."

 기독교계의 인식의 변화는 위와 같은 사회신조를 채택하여 "일체의 유물교육·유물사상·계급적 투쟁·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탄압에 반대"하고 기독교적 원리에 입각한 사회운동을 지향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고 있는 데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 기독교계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 신조가 발표된 이후 기독교계의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반기독교운동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사회주의에 대한 의견이 있다 하더라도 소수에 불과할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드러난다. 즉, 이 시기가 되면 1920년대 이래 지속된 기독교계 내부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정리되고 있는 것으로, 이는 1930년대 중반이 되면 기독교계에서의 사회주의에 관한 인식이 거의 일단락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같은 인식의 변화는 기독교계 자체내의 변화된 역사적 조건들을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가 되면 한국의 기독교 성격이 유산자 중심으로 변화한다거나 미국에서 형성된 보수적 신학이 한국의 기독교계에 영향이 나타났으며, 지식계급으로 표현될 수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계급적 성향이 기독교계로 하여금 독립운동을 비롯한 정치적·사회적 문제 등에 완전히 등을 돌리게 만드는데 그 원인이 되었다는 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들은 1920년대 초반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던 것으로, 왜 이 시기에 들어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이 급격하게 변화되는지를 설명하기에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사상 및 사회주의세력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크게 두 가지의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존립자체를 부정하는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인식과 현실에 기초한 민족문제 인식을 통해 사회주의를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먼저 일제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보수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종교적 외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과 기독교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것과 결코 분리해서 사고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종교적 신앙과 조직을 자신의 활동의 근거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종교적 신앙의 대상과 존재론적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자신들의 활동의 근거를 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종교적·신앙적 존재기반을 흔드는 사회주의자들의 철학적이고 무신론적인 기독교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과 비판은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를 종교자유 및 신앙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인식하는 주된 이유였던 것이다. 즉, 이 시기의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종교의 자유 및 신앙의 자유이라는 관점이 다른 어떤 요소들보다 우세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정체성을 강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즉 기독교계 내부적인 변화, 이를테면 기독교가 보수화·유산계급화·비정치화 등의 변화와 함께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은 기독교인들에게 사회주의를 부정적으로 인식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농촌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고 있었는데, 이는 기독교인들이 3·1운동 이후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반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운동의 노선을 사회경제적 운동으로 전환시켰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의 사회경제적 운동은 민족주의세력의 실력양성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민주주의정치와 건전한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가운데 현실에 기초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계급 대 계급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중심의 혁명노선과 폭력혁명을 부르짖으며 모든 종교세력에 대한 무차별적인 민족개량주의 공격에 대해 더 이상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며, 이에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의한 농촌의 피폐와 몰락이 더욱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현실인식에 기반을 두고 민족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민족개량주의자로 공격받는 가운데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와 제휴의 가능성보다는 현실적인 사회운동으로서 농촌을 살리는 농촌운동에 더욱 매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자들이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고 이에 기독교인들이 이를 강경하고 대립적인 시각으로 인식하였다고 해서 이후에 그러한 대립적인 인식이 고착화되거나 결정론적으로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에 변화가 생겼으며, 이는 1930년대 중반 이후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파시즘과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맞선 반파시즘·반제통일전선의 실현이 제기되고 이어서 러시아에서 종교에 대한 유화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외 사회주의자들은 변화된 국제 사회주의운동노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함과 더불어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전시파쇼체제가 그 절정에 오르자 광범위한 민족연합전선을 지향하게 되고 종교적 차이까지도 넘어서는 경향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전민족의 계급·성별·지위·당파·연령·종교의 차별을 묻지 않고 백의동포는 반드시 일치단결하여 구적(仇敵)인 일본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할 것"이라고 하여 종교단체와의 직접적인 연합도 주장하게 되었으며, 실제로 천도교단의 일부와도 제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 이후 국내외 사회주의자들의 종교에 대한 인식도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다음의 글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는 감방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꽤 많이 만났는데,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그 동안 박해 때문에 형성되어 있던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태도를 상당히 수정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그때까지 공산주의를 싫어했던 것은 단지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부정하고 박해했기 때문이었다. …… 나는 감방 안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내 생각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너는 옛날 공산주의를 말하고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서 소련에서 1936년 12월 스탈린 헌법을 제정했는데 그 헌법은 종교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배척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공산주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감방 안에서 그들과 싸우거나 적대시하는 일 없이 사이좋게 지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민족문제을 둘러싼 통일전선의 변화에 따라 파시즘에 맞서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제휴를 상정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은 소련의 종교 정책의 변화에서 나오는 종교에 대한 유화정책을 적극 수용하여 기독교를 포함한 여타의 종교에 대한 유연한 입장을 드러냈다. 이에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도 상당할 정도로 우호적인 쪽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는 외부적으로 보면 1935년 이후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동향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는 1931년 만주사변이후 군국주의화의 길로 나선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193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마치 1910년대의 무단정치 때와 같이 억압적인 탄압구조로 변화되었고, 기독교와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에게 사상적으로 위험한 세력으로 분류   인식되어 탄압을 받는 입장에서 양자간에 이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국내의 역사적 상황과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하였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듯이 적대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큰 흐름에서 보았을 때에 이 시기의 기독교인들의 대 사회주의 인식이 대립적이거나 강경하였다고 해서 그 자체가 철두철미한 반공주의·반사회주의에 입각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5. 맺음말

 이제까지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에 대해 그 역사적 상황, 인식의 구조, 인식의 내용과 변화과정 등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이를 정리하면서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의 성격으로 이 글의 끝을 맺고자 한다.
 먼저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독교계 대내외적인 기독교 비판에 직면하면서 사회주의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 상황이 형성되어 있었다. 3·1운동 이후 한국사상계는 기독계가 열악한 사회적 현실을 외면한 채 내세주의적 신앙과 외국선교사들의 친일화 경향, 교회의 지적소외, 발전된 과학과 새로운 사상의 경시풍조등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와같은 일반의 반기독교적 분위기와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회유분열정책이 진행되는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는 기독교계에 큰 충격과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기독교계에 보다 큰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던 것은 일반 사회의 반기독교적 분위기와 사회주의자들의 격렬한 반기독교운동의 과정에 이전의 교회출신들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계내의 내세지향적인 움직임과 이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 그리고 점점 심화되는 식민지적 억압구조와 일정한 긴장관계를 맺으면서 사회주의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 상황 속에 처해 있었다
 둘째,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에는 단순히 외부적 충격만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여 정치적·경제적 방향에서 추구해 왔던 지향의 논리와 관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복음을 근본 원리로 하여 정치사상으로 근대 자유 민주주의 사상을, 사회경제적으로 [건전한] 자본주의제도를, 종교적으로 신앙의 자유 및 종교의 자유 등을 지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구조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인식하면서 기독교 사회운동의 방법론을 모색하였다. 따라서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인식구조로 기독교계의 대내외적인 충격과 함께 기독교인들의 지향의 논리와 관점들은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주요한 틀이 되고 있었다.  
 셋째,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은 다음과 같은 세 시기에 따라 변화하고 있었으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제1기(1920~1924년) : 이 시기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은 크게 사회주의의 폭력적 건설방법에 대해서 비판적인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대체로 인식의 큰 흐름은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가치균등하게 비교하고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가 그 지향하는 목적과 방향에서 일치한다고 보는 적극적인 해석의 자세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의 배경에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고 전달하는 입장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사회주의 속에서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찾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제2기(1925~1928년) :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의 영향과 기독교 내부 비판 등의 대내외적 자극에 영향을 받으면서 식민지 민족현실에 더욱 철저한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기독교사회주의·사회복음주의·민중종교론 등 기독교 사회운동의 지향점들에 대해 활발한 의견들이 주장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극복하려는 움직임들이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기독교인들은 이전까지의 사회주의에 대한 낭만적 접근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사상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이에 대한 찬반의 자세보다는 기독교 자체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찾으려고 모색하는 경향들이 크게 특징을 이루었다. 
 제3기(1929~1930년대 초) :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종교의 본질 자체에 대해 이론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 종교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거부하고자 하는 반종교운동을 일으켰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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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이바이젠 15-03-15 11:45
 
기독교사회주의·사회복음주의·민중종교론 등 기독교 사회운동의 지향점들에 대해 활발한 의견들이 주장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극복하려는 움직임들이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사회주의자들의 무신론 주장을 죄악(罪惡)으로 규정하여 한국교회에는 무신론를 대비하는 변증신학(辨證神學)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종교학적으로 무신론을 반박하였다.
지고이바이젠 15-03-15 11:49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하였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듯이 적대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큰 흐름에서 보았을 때에 이 시기의 기독교인들의 대 사회주의 인식이 대립적이거나 강경하였다고 해서 그 자체가 철두철미한 반공주의·반사회주의에 입각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주 잘 읽고 갑니다.
전설따라소설쟁이 15-03-15 14:32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계내의 내세지향적인 움직임과 이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 그리고 점점 심화되는 식민지적 억압구조와 일정한 긴장관계를 맺으면서 사회주의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 상황 속에 처해 있었다.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인식구조로 기독교계의 대내외적인 충격과 함께 기독교인들의 지향의 논리와 관점들은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주요한 틀이 되고 있었다.
그때그모습 15-03-15 19:08
 
3기(1929~1930년대 초) :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종교의 본질 자체에 대해 이론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 종교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거부하고자 하는 반종교운동을 일으켰다.
폼생폼사 15-03-15 20:12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독교계 대내외적인 기독교 비판에 직면하면서 사회주의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 상황이 형성되어 있었다. 3·1운동 이후 한국사상계는 기독계가 열악한 사회적 현실을 외면한 채 내세주의적 신앙과 외국선교사들의 친일화 경향, 교회의 지적소외, 발전된 과학과 새로운 사상의 경시풍조등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와같은 일반의 반기독교적 분위기와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회유분열정책이 진행되는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는 기독교계에 큰 충격과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사오리 15-03-15 21:33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근심하지 말고, 생각대로 잘된다고 기뻐하
지말라.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라고 믿지 말며, 처음에 어렵다고 꺼리지 말라.
【태사부님께 암살자 보내고 친일부역한 이상호, 이정립무덤에 절을한 노상균 이석남/ 통진당 광주 홍어 이석남  】
이상호 이정립 추종계열
이상호 이정립 --- 홍성렬
노상균(견마지로.whRkfkakdltld) --- 이석남(참종자. 도심주. 심주도. 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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