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의 삼민주의 강의에 들어 있는 철학
쑨원은 1924년에 들어서 삼민주의 강의에 더욱 몰두했다. 여섯 차례에 걸쳐 강의를 한 결과 매 수천 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그 중 “밭갈이하는 사람이 그 밭을 가져야 한다는 《경자유기전 耕者有基田》”이라는 제목의 강의가 유명했다.
이 연속 강의에서 그는 건국대강 25조를 발표했다. 이것은 그의 지론인 삼민주의와 5권 헌법의 이론을 상세히 밝힌 것인데, 삼민주의의 순서를 민생주의•민권주의•민족주의로 바꿔 놓았다. 그는 이렇게 민생주의에 중점을 두면서, 종전의 ‘평균지권’과 ‘절제자본節制資本’에 부조농공扶助農工‘을 덧붙였다.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원조를 강조한 것이다.
국공합작 산물인 황포 사관학교와 장제스, 저우언라이(주은래), 학생 린뱌오(임표)의 등장
쑨원의 국공합작은 소련과 중국 대만 3개국에 모두가 정통성을 부여하는 아이러니한 역사적인 사건이 됐다. 소련은 쑨원을 이용해서 중국 내에 공산정권을 세우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통하여 국민당 내부를 공산당으로 확대 시키는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중국 공산당은 결과론적이지만 부패에 빠진 국민당을 대륙에서 섬으로 몰아냄으로써 정통성을 얻었고, 대만 입장에서는 공산당과 치열한 전투를 통해 민주주의 영토를 설립했다는 정통성을 부여했다.
▲ 육군군관학교로 정문간판이 있지만 중국인들은 황푸군관학교로 부른다.
이러한 국공합작의 피부에 와 닿는 산물이 6월 16일 중국 최초의 근대적 사관학교인 광저우 교외의 황푸黃埔에 문을 연 황푸군관학교다. 소련은 군관을 보내 학생들을 훈련시켰고 많은 무기와 장비를 보내주었다.
▲ 1924년 6월 16일 황푸군관학교 1기생 입학식에 참여한 쑨원(중앙) 오른쪽 군복 입고 차렸자세로 서 있는 교장 장제스
이 때 37세인 장제스가 교장으로 발탁됐고 저우언라이도 이 학교의 정치부 부주임으로 취임했다. 특히 눈여겨 볼 점은 이 학교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던 학생인 린뱌오林彪가 훗날 중국공산당군의 지도자로 중국국민당군을 패배시키는데 일조를 담당한 것은 역사의 역설적인 한 단면일 것이다.
일본에서 강의한 ‘대아시아주의 강연’
황푸군관학교가 세워지고 어느 정도 힘을 비축한 쑨원은 세 번째로, 헌법을 수호하자는 호법운동의 일환인 ‘호법북벌’을 재개했다. 그러나 각 지방에 있는 군벌정부를 쑨원이 전부 통제하지는 못했기에 힘의 한계가 있었다. 이런 까닭에 ‘호법북벌’을 개시했던 북벌군은 광둥성을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 무렵 베이징의 군벌정부는 쑨원에게 북상을 요구했다. 이것은 일종의 남북협상을 통해서 중국의 국내외 상황에 새로운 국면을 열자는 뜻 이였다. 그는 이 요구에 응해서 상해로 갔다가 일본 고베神戶에 들러 ‘대아시아주의 강연’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세 차례에 걸쳐서 했다. 이 연설의 주된 내용은 중국과 일본 두 나라는 진정으로 협력해야 아시아를 서양제국주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전제한 다음, 그런 만큼 일본은 중국에 대한 침탈을 중지하고 중국의 국민혁명을 지원하라고 호소한 것이다.
쑨원의 죽음과 유언- 혁명상미성공(革命尙未成功), 동지내수노력(同志仍須努力)
쑨원이 일본에서 연설을 마치고 1924년 12월 텐진에 도착했을 당시 극심한 복통을 느꼈고 치료를 받기 위해 급하게 베이징으로 옮겼다. 역에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10만 여명의 군중들이 모여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그는 기독교 병원인 셰허의원協和醫院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으며 간암판정을 받았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혁명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음〔혁명상미성공革命尙未成功〕’을 탄식하면서 ’동지들이 혁명의 성공을 위해 계속 힘써줄 것〔 동지내수노력同志仍須努力〕‘을 당부했다. 이때 쑨원이 신임하던 왕징웨이汪精衛가 쑨원의 유언을 받아썼다. 유언을 마친 쑨원은 곧바로 상하이의 사저로 옮겨졌다. 여기서 1개월 뒤, 쑨원은 다시 유언을 했다. “나는 국사에 진력하다 보니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다. 내가 남긴 서적, 의복, 주택 등 일체는 아내 칭링에게 주어 기념으로 삼게 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1925년 3월 12일에 58세로 별세했다.
▲ 쑨원의 장례식 장면
장례는 두 가지 형식으로 치러졌다. 이 당시 쑨원의 부인인 쑹칭링은 33세였다. 그녀의 요청에 따라 교회식으로 먼저 치러졌고, 전통의례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베이징 근교 샹산 비읜사碧雲寺에 그의 혼령을 모시는 의례도 가졌다.
▲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에 있는 쑨원(孫文) 묘역. 중산릉은 풍수의 명당인 쯔진산(紫金山)에 있는데 쑨원(孫文)이 직접 고른 장지다.
장제스(蔣介石)는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거대한 묘역을 조성했다.
쑨원의 묘지 이장은 이후 1929년 6월 1일 북벌에 성공한 직후에 이뤄졌다.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국민당의 고위간부들이 쑨원의 관을 국장형태로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옮겨, 난징의 동쪽 교외에 자리 잡은 쯔진산柴金山에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꾸민 능에 이장했다. 이 능이 바로 중산능원中山陵園으로 중국, 대만 양국의 국민들이 찾는 거국적인 성지로 대접 받고 있는 곳이다.
▲ 안장된 쑨원
쑨원 그는 비록 죽었지만 그가 왜 중국과 대만에서 국부로 칭송 받는가 하는 점을 깊게 깨달아야 한다. 그는 혁명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배신을 당했다. 쑨원의 혁명역사는 시작부터 죽는 순간까지 배신자들에 의해서 이용물로 점철된 삶이었다. 그러나 그가 비록 혁명성공을 보지 못하고 미완의 혁명숙제를 남기고 죽었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대륙의 역사는 쑨원이 뿌려 놓은 삼민주의 정신으로 결국 흘러갔다. 쑨원의 혁명 역사의 배신자들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조소와 멸시를 당하는 낙인만 각인 된 채로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강물 수면 아래로 수장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