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운동을 계기로 중국국민당으로 당명을 고친 쑨원과 천중밍의 배신
1919년 5월 4일 베이징에서는 친일행보를 보이는 자들에 대한 반외세민족주의 척결의 일환으로 돤치루이가 이끄는 베이양 정권을 중심으로 5•4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그간의 운동과는 다른 결집된 힘이 보였고, 그 원동력은 1915년 ‘신문화운동’에 의해 격발된 것이다. 쑨원은 5•4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조류에 대응한다는 뜻에서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고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게 된다.
1920년 10월 쑨원은 다시 광둥군벌들의 추대를 받아 제2차 광둥군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 이것에 힘입어, 쑨원은 1921년 5월에는 광저우에서 비상 국회를 소집하고 정식으로 중화민국정부를 조직하게 했으며 스스로는 ‘비상대총통’에 취임했다. 미국정부는 쑨원을 칭찬했다. 이 바탕 위에서 그는 1922년 2월부터 다시 ‘호법북벌’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예하군벌 천중밍陳炯明이 주도한 쿠데타 때문에 실패해,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피신하게 됐다. 광둥성 출신의 천중밍은 법률가로 청조에서 관리를 지냈으나 중국혁명에 참여했으며 광둥성의 총독을 몇 차례 지내면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쌓았다.
국공합작은 레닌으로 하여금 또 다른 배신을 만든 동기
쑨원은 불행하게도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는 필요에 따라서 군벌들에게는 먹잇감이 됐다. 중국대륙 사방의 군벌들은 쑨원의 명성을 이용해서 그에게 직위만을 부여했을 뿐이고 결국 군벌들은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쑨원을 계속 이용해 먹으면서 배신행위를 저질렀다.
쑨원은 자신이 걸어온 혁명의 길을 돌이켜 보았다. 자신의 권력기반이 약했기에 늘 군벌의 도움으로 집권했다가 군벌의 배신으로 실권하곤 했음을 새삼 깨달은 그는 이제 변덕스럽지 않은 확실한 대안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쑨원은 그 대안을 소련에서 찾게 됐다. 1917년 10월에 레닌의 지도로 일어난 볼셰비키혁명은 인류역사에서 최초의 소비에트국가를 세웠다. 레닌은 볼셰비키혁명을 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코민테른을 창설했으며, 특히 서양제국주의의 침탈에 신음하는 아시아의 해방투쟁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잖아도 쑨원은 이미 레닌의 음모가적 비밀정당 조직원리, 그리고 사회주의체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레닌에게 소비에트국가의 출범을 축하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즈음에 소련은 명성이 있는 쑨원을 먹잇감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기회를 엿 보던 중 쑨원이 스스로 걸려들고 만 것이다. 소련의 레닌은 먼저 쑨원에게 호감을 표시하기 위해 그에게 소련을 방문해 달라는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쑨원은 이에 응하지 않는 대신에 1920년 가을 코민테른의 첫 번째 중국 주재대표인 그리고리 보이틴스키를 만나주었다.
소련은 재차 쑨원을 떠 보기 위해서 자국의 대표가 아닌 네덜란드 공산주의자인 헨드리퀴스 마링Hendricus Maring을 1921년 12월 보냈는데 쑨원은 이 면담에 응해서 덫에 걸리고 만다. 한편 소련은 이미 뒤쪽으로 중국공산당을 1921년 6월경 비밀리에 창당하면서 세력을 넓혀 나갈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이렇듯 쑨원은 내•외부적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이용물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 내부에서는 군벌들이 그를 이용했고, 이제는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도 이미 중국에 공산주의를 심어놓고 쑨원을 서서히 이용의 대상물로 끌어 들였다.
쑨원에게 있어서 철학은 오직 민생을 위한 삼민주의가 있었고, 그의 정신은 초기부터 서태후와 부패한 권력을 가진 자들에 대한 혁명만이 진실의 무기였다. 그러나 그는 대국적인 혁명철학에는 선구자였으나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손을 내미는 군벌세력들의 이용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순진무구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지지기반이 약한 것도 한 몫을 했지만, 그것은 오직 쑨원의 정직함을 이용한 검은 늑대 떼들의 애완용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1922년 8월 상하이에서 국공합작에 합의
소련 코민테른 파견원들과 접촉한 쑨원은 순진하게도 그들의 웃음과 호의에 빠져서 그들의 속셈을 간파하지 못한 채 레닌을 더욱 좋게 보았다. 결국 코민테른은 마링을 통해서 중국공산당과의 합작, 이른바 국공합작을 제의하자 쑨원은 이번에도 이 달콤한 독약을 받아먹었다.
쑨원은 나름대로 계산하기를 중국공산당이 기껏해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고작 젊은이들로 구성되어진 패기와 열정, 그리고 조직력’뿐 이라고 속단하면서 중국공산당에 중국국민당이 잡아먹힐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쑨원의 또 다른 계산은 국공합작을 단행하면 소련이 자신에게 무기와 돈을 대줄 것으로 순진한 오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나중에 소련도 쑨원의 체면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 보탬을 주었고 황포군관학교가 그것이다.
소련의 레닌은 중국을 공산화 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쑨원은 무기와 자본으로 권력 기반을 강하게 하고 싶다는 서로 다른 꿈을 가진 채, 쑨원은 최종적으로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코민테른의 소련대표 아돌프 이오페Adolf A. Ioffe와 회담 끝에 발표된 공동성명서에 합의했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국공합작이다.
제1차 국공합작은 당 대 당의 합작이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원은 공산당원으로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중국국민당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쑨원이 같은 해 3월에 제3차 광둥군정부를 수립한 뒤 11월부터 코민테른의 중국대표인 소련인 미하일 보르딘Michael Borodin의 지도 아래 국공합작에 맞게 중국국민당의 개조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국국민당 내부에서 중국공산당의 세력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국민당 우파는 이 점을 경계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제거를 강력히 권고했으나, 쑨원은 국공합작을 성공시켜야 한다면서 오히려 그들을 설득했다.
이제 쑨원은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 들게 된다. 소련이 요구한 국공합작의 의도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쑨원은 자신의 기본 철학인 건국대강과 삼민주의 연설을 중국과 일본에서 십 수회에 걸쳐 실행했다. 특히 일본에서 한 연설의 핵심 내용은 동양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이 중국을 침탈하는 것을 멈추어야 하고, 중국과 일본은 손을 잡고 서양제국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