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일본의 중국수탈과 위안스카이의 황제등극
▲ 도쿄 우메야 쇼키치 집에서 식을 올린 쑨원과 쑹칭린 결혼기념 사진
1914년 10월 25일 쑨원과 쑹칭링이 결혼 한 시점은 전 세계가 격변의 시기에 접어드는 해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모든 인간들은 미쳤다’는 표현처럼 1914년 7월 28일 제 1차 세계 대전이 촉발된다.
중국은 이 세계대전으로 인해 모든 강대국들이 전쟁에 힘을 쏟는 바람에 중국의 자원을 침탈했던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결과적으로 중국에 대한 침탈은 수그러드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지 않은 일본은 중국에 대한 침탈을 오히려 강화할 수 있었다.
일본은 위안스카이 정부를 상대로 1915년 1월에 21개 조에 걸친 요구를 요구했는데, 그 내용은 중국을 압박하고 수탈하려는 내용들로 구성됐다. 일본은 이러한 요구를 위안스카이에게 요구하면서, 만일 이 요구를 들어주면 위안스카이가 추진하는 황제체제의 성립을 은밀하게 돕겠다는 거래를 제시했다.
위안스카이는 일본이 내 놓은 중국수탈의 내용을 1915년 5월에 원안 그대로 받아들였고, 중국 국민들은 이에 격분하게 된다. 한편 이때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던 쑨원은 거친 항의를 했다.
그는 황제가 되려는 욕심을 품은 위안스카이가 먼저 일본에 도움을 청하는 바람에 21개조 요구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면서 “매국노 위안스카이를 타도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러한 비난 앞에서도, 위안스카이는 황제체제를 성립시키려는 운동, 이른바 제제운동帝制運動을 강력히 추진했다. 국민대표대회라는 것도 조직해, 이 기구로 하여금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도록 결의하게 했다. 마침내 1916년 1월 1일에 그는 황제로 즉위했다.
쑨원의 제3혁명으로 인한 위안스카이의 죽음
위안스카이가 일본과 결탁하면서 황제에 취임하게 되자, 쑨원의 중화혁명당은 벌떼처럼 일어나서 위안스카이 타도를 위한 무장봉기를 선동했다. 쑨원의 추종자들이 국내 이곳저곳에서 일어났고, 심지어 위안스카이에 협조했던 입헌파 세력도 이번에는 쑨원 편에 섰다.
그들은 모두 민국을 보호한다는 뜻에서 호국군護國軍을 편성하고, ‘호국군 기의’를 부르짖으며 제3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제3혁명의 불길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열강은 태도를 바꿔 제제연기를 결정했다. 이것을 보고 위안스카이 측근의 장군들조차 제제취소를 권고했다. 위안스카이는 안팎에서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는 결국 1916년 3월에 제제취소를 선언했다. 그런데도 반反위안스카이운동이 계속되자, 그는 6월에 실의와 슬픔 속에서 병사했다. 향년 57세였다.
위안스카이와 조선의 관계
▲ 흥선 대원군과 조선에 주둔한 위안스카이
1882년 조선에서 구식군대가 신식군대의 차별로 촉발된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위안스카이는 23세였다. 이때 민비세력은 청에 파병을 요청했고, 이홍장은 군대를 보내는 동시에 위안스카이를 한성방위책임자로 보냈다.
이 당시 중국은 남과 북, 동과 서로 군벌세력들이 독자적으로 혹은 연합해서 있을 시점이었다. 이홍장은 베이양北洋대신으로 위안스카이를 파견한 신분이었기에 전체 중국을 대표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조선주재총리’로 행세하면서 고종과 조선조정을 겁박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위안스카이를 그 이후에도 다시 재차 불러서 조선에서 청이 파견한 세도가로 지내면서, 그는 조선에서 세 여인을 첩실로 맞아들이게 된다.
▲ 위안스카이와 조선인 안동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위안커원(좌)와 중국을 대표하는 과학자 위안스카이 손녀 며느리 우젠슝(우)
그 여인들은 모두 15명의 자녀들을 출산했다. 그들 가운데 서울에서 태어난 아들 위안커원 袁克文은 중국총리 저우언라이도 높이 평가한 문호文豪로 성장했으며, 그의 며느리, 달리 말해 위안스카이의 손녀며느리 우젠슝吳健雄은 ‘아시아의 퀴리Curie 부인’ 이라고 불리는 세계적 물리학자로 성장했다. 그녀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물리학박사를 받은 뒤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와 미국물리학회 회장으로 봉직했다. 그사이 미국의 원자폭탄개발계획에도 참여했다. 물리학에서의 그녀의 업적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후보로 오르내리게 만들었느나 받지는 못했다. 그녀는 1997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쑨원의 제 3혁명의 실패
쑨원은 제3혁명이 중국을 강타할 때 그 기대를 가지고 위안스카이가 죽기 3개월 전인 1916년 3월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역사는 위안스카이를 죽음으로 몰면서 사실상 쑨원의 제3혁명도 끝나게 된다. 호국군은 스스로 황제에 오른 위안스카이의 제제운동이 끝났으므로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됐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은 다시 위안스카이가 죽게 됨으로 동•서•남•북의 군벌정치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됐다. 사실상 연합파인 호국군이 위안스카이의 황제등극을 막았다는 것은 군벌들이 스스로 소小황제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사표시였고, 쑨원은 이를 불만스럽고 못 마땅하게 여겨서 정세의 흐름을 바라보다가 『민권초보民權初步 : 사회건설』라는 책을 썼다.
군벌들의 추대와 군벌들의 배신에서 쓰여진 책 『건국방략』
▲ 쑨원의 건국방략 책자와 이 책자에 처음 기록된 싼샤댐 건설(우)
1917년에는 서남지방의 몇몇 군벌들이 쑨원을 초대해서 재차 정치무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쑨원은 곧 9월에 광둥성의 성도 광저우에서 중화민국 군정부를 조직하고 이 정부의 대원수로 취임하게 된다. 이것을 제1차 ‘광둥군 정부’라고 부른다. 쑨원은 다시 호법을 내걸고 이것을 관철하기 위해 북벌을 개시했다. 이것을 ‘호법북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쑨원이 계획한 대로 역사는 흘러가지 않았다. 북쪽의 군벌들이 책략을 부리자 광둥군정부에 가담했던 몇몇 군벌들이 배신함으로써 1918년 여름에 이 군정부는 무너지게 된다. 참담한 심정으로 쑨원은 다시 상하이로 가게 된다. 쑨원은 거기서 『건국방략』의 완성에 온 힘을 쏟게 된다. 이 책에서 쑨원은 중요한 관점을 제시했다.
중국은 서방자본주의 폐해를 반성하는 기초 위에서 새로운 사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중국의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또 이 책을 통해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오늘날까지도 인용되는 ‘알기는 어렵고 행하기는 쉽다〔지난행이 知難行易〕’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알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어렵다〔知易行難〕’라고 믿는데,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그것이 그 반대임을 파악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