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만장 안 내성(安乃成) 성도에게 부치신 도안(都安) 세 살림 중 세 번째 마지막 말복도수는 막둥이 도수에 걸어두셨습니다. 상제님은 안 내성 성도에게 막둥이 도수를 부치시고 초복, 중복 다 제끼고 말복 운을 타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말복 운이 가장 크니라. 늦게 들어온 사람이 크게 받나니 ‘막둥이 놀음’이니라 하십니다. 하루는 안 내성(安乃成)이 “때는 언제 오나이까?” 하고 여쭈거늘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가 새끼손가락을 펴 여섯을 세어 보이시며 “이것이 조화봉(造化棒)이다. 새끼손가락이 조화 낸다.”하십니다.
상제님께서 어천하신시기 전에 김 형렬 성도 집 약방 법궤에다 세 가지 사명을 써 넣은 심지 3개를 넣어두고 잠그었습니다. 어천하신 이후 태모 고수부님이 부벽지 천반자까지 다 훑어 대흥리로 가져가셨는데 차 경석 성도도 아직 법궤를 열어보지 못한 상태였을 때입니다. 그때 계축(癸丑)년(1913) 9월 19일에 후일 현무경파-순천도를 개창하고 김일부 성사의 정역을 용담팔괘로 완성시킨 장 기준이 차 경석(車京石)을 찾아옵니다. 태모 고수부님, 차 경석, 장 기준 세 분은 경진 생으로 동갑(同甲)이었기에 후일 사람들은 ‘삼룡(三龍)’이라고 약칭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상 곤존 하느님과 동격에 놓는 불손한 비례(非禮)입니다.
마침 상제님의 탄강(誕降) 치성(致誠)일이어서 장 기준은 치성금(致誠金)을 올리고 비단 옷 한 벌을 해드리고 치성을 정성껏 올리고 나서 상제님의 행적을 자세히 물으며 도담(道談)을 나누던 중 고수부님(高夫人)께서 상제님 어천(御天)하신 후에 생계가 곤란하여 그분이 재세 시에 사주신 검은 소 한 마리까지 팔아 썼다는 얘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상제님 어천하신 후 1911(辛亥)년에 태모 고수부님께서 정읍 대흥리 본소로 약장과 궤를 옮긴 후 다음해 1912(壬子)년에 차 경석은 고수부님이 지니고 있던 약장 열쇠를 양도받아 비밀히 열어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법궤에 일자(壹字)로 봉한 함지를 떼고 열쇠로 열려고 조화궤에 대는 순간 청천하늘에 뇌성번개가 대작하여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놀란 뒤 조화궤안에 보물조화가 들어 있음을 짐작하고 때가 되어야 법궤를 열 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 후 장 사수(기준)는 고수부님을 찾아뵙고 조화궤를 탐문하니 차 경석이 가로막으며 조화궤는 어느 누구도 보여 줄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장 사수는 꼭 한 번만 보자고 청을 하니 또 다시 거절하여 서로 언쟁이 일어 고성이 오가니 고수부님께서 말하기를 그 분이 열쇠를 내게 맡기실 때 뒷날에 열쇠를 찾는 자가 오거든 그 분에게 내어주라 하셨기에 보관하고 있다가 거년(去年:지난해)에 그대가 열쇠를 달라고 해서 내어 주었으나 그 때는 뇌성벽력이 대작하여 열지 못한 일을 볼진대 그 누구라도 때가 아니고 열쇠주인이 아니라면 열 수 없을 터인데 왜 안 주려고 그리 싸우는가 하면서 열쇠를 주어보라고 말하니 차 경석은 하는 수 없이 열쇠를 방에다 던지고 밖으로 나간 후 태모 고수부님이 열쇠를 장 기준에게 건네면서 한 번 법궤(둔궤)를 열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차경석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그깟 돈 좀 받았다고 아무한테나 열쇠를 내주느냐?’고 하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장 사수가 열쇠를 집어다 쇠 통에 대고 끌러보니 아무 이상 없이 쇠 통이 열리게 되어 경석이 대문을 나서기도 전에 방안에서 환성이 나왔습니다. 고수부님께서 조화궤가 열렸다고 하니 밖에 나가서있던 차 경석은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와 확인한 결과 조화궤가 열려있는지라, 고부인 차 경석 장 기준 3 경진생(三庚辰生)이 합일 되는 도수로 조화궤가 열린 것입니다.
개탁(開坼:개봉)된 궤 속의 내용물을 인수하여 확인하니 창호지(窓戶紙)로 쌓여진 책보자기가 나왔는데 한 겹을 펴보니 또 백지로 쌓여져 있는 끝에 흰 병이 있었고 병마개를 펴보니 길화개길실 흉화개흉실(吉花開吉實 凶花開凶實)이라는 글이 쓰여 져 있었고 병 속에는 백지로 말려진 심지 세 개가 들어 있기에 병을 쏟아 보니 심지 세 개가 바닥에 떨어져 각자 하나씩 주워서 펴보니 고수부님이 짚은 심지에는 安乃成이라 쓰여진 밑에 律呂度數라 쓰여져 있었고, 차 경석이 짚은 심지에는 車京石이라 쓰여 진 밑에 布政度數라 적혀 있었고, 장 기준이 짚은 심지에는 張基準이라 쓰여진 밑에 大學度數라 쓰여져 있었습니다.
차 경석이나 안 내성은 증산 상제님을 추종하던 성도들이었으나, 장 기준은 전혀 생면부지였는데 대학도수를 맡긴다는 글을 보게 되자, 차 경석은 장 기준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 경석이 손을 내밀면서 큰일을 도모하자고 하였으나, 장 기준은 ‘나는 그럴 위인이 못 된다’고 하면서 현무경(玄武經)을 필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갑니다.(계축년 9월 24일(陰))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내용을 모르고 있던 차에, 을묘乙卯년(1915년) 3월에 전주 동곡銅谷에서 김 형렬이 도통했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 그가 현무경(玄武經)을 풀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지니고 김 형렬이 창도한 「미륵불교」에 찾아갑니다.
증산 상제님 수석성도였던 김 형렬은 일본이 망하게 하기 위해서는 화둔(火遁)을 명산 꼭대기에 묻어야 한다고 하여 많은 무리들이 추종하였으나, 예정한 기일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정사丁巳년(1917) 정월에 김 형렬의 그릇됨을 깨우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3월 중순부터 마을 뒷산의 제왕봉(帝王峯)에서 상제님이 말씀하신 대로 서전서문(書傳序文)을 만독(萬讀) 하는 수련을 행하여 그 해 6월 23일에 활연대통(豁然大通)하여 현무경(玄武經)의 비의(秘意)를 풀고 정북창의 팔괘시(八卦詩)에서 정역팔괘의 한계를 보충한 황극수 십일귀체의 용담팔괘를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통합경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