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거꾸로 읽는 나의 인생 체험기
제 1절 2008년 7월 13일
군대를 다녀온 남자는 자신의 군번을 평생 기억한다.
군번을 양각으로 표식 하여 목에 거는 것이 군번줄이다.
일명 군인들 사이에서는 ‘개목걸이’로 통한다. 군인이 죽었을 때 신원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표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군인들의 죽음이 곧 개죽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박사논문을 쓰기위해 서재 겸 골방에서 두문분출 하던 첫날이 2008년 7월 13일이다.
학위 논문을 쓰기위한 기초자료 수집은 서울의 국회도서관에서 박스로 신청하였다.
자료를 잘 찾아 준 재원에게 감사를 드린다.
나는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논문 통과까지를 딱 3년으로 한정하고 공부하였다.
끝장을 보는 내 성격상 3년이라면 가능한 시간으로 대략 계산을 하였다.
더불어 내 인생의 나이를 계산해 보니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질적인
삶의 의미에서 무의미한 계산에 도달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인문학(사회학) 박사를 3년 만에 딴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한 학기를 시작하면서 알아버렸다.
박사학위는 권위와 명예의 상징이기에 그리 빨리 학위를 쓸 자격을 주지 않고 훈련시킨다.
학위의 과정은 영어시험에 합격해야 종합시험의 자격이 주어진다.
종합시험에 합격하면 비로소 예비발표의 자격이 주어진다. 이후 본 발표가 5차까지 진행된다.
예비발표가 끝나도 공부의 분량과 논문의 일정한 틀이 형성되지 않으면
교수들이 먼 산만을 바라본다. 학생이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불가능에 가까웠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내 몸이 거의 죽음 근처에 다다른 것이다.
호흡조차 거의 터지지 않았고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엄청난 통증과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원인은 이러하다.
첫째 박사 1학기 과정에서 공부와 논문 작업의 틀을 만들어 나갔고,
영어시험을 미리 패스해서 부담감을 줄이려는 과욕을 하였다.
둘째 남들은 30학점을 이수하였지만 나는 석· 박사 전공이 각각 달랐기에 60학점을 이수하였다.
하여, 공부의 분량이 수치적으로는 2배이지만 가공할 분량이었다.
셋째 영어원서를 공부하고 요약, 발표하는데 생소한 단어가 많아서 수 없이 밤을 지폈다.
넷째 하루 2-3시간의 수면을 취한 것이 몸에 부담감을 가중 시켰다.
제 2절 전신마비 증세
2006년 4월 학위 첫 학기 눈을 뜬 악몽이 시작되었다. 시계의 초침소리만 들린다.
어제까지 무리 없이 수업을 받고 과제물을 정리하고 새벽5시에 잠이 들었다.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 전신마비증상이다. 더 힘든 것은 호흡이 10초 정도
열리지 않았다가 겨우 한 숨을 쉬고 또 호흡이 멈추는 증상이 반복되었다.
핸드폰이 바로 옆에 있는데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낮과 밤이 바뀌었다. 호흡은 적당히 돌아왔지만 숨을 쉬는 동안
옆구리는 여전히 엄청난 통증에 시달리면서 깔딱 숨을 쉬었다.
정신과 눈만 살아 있지 몸은 움직이지 못하는 산송장이다.
제 3절 정신은 육체를 지배한다.
남들은 이럴 때 어떤 행동을 할까. 기도를 할까. 아니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렇다면 나는 이 상태를 도대체 어찌 벗어나야 할까.
나는 솔직히 우선은 이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악에 바쳤다.
호흡을 가다듬고 으아악~ 하고 고함을 질렀다.
온 몸의 경직과 울림의 통증을 그대로 맛보면서 몇 미리씩 몸을 한쪽으로 굴려나갔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겨우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남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분명히 핸드폰으로 119를 부르거나 지인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하지 않았다. 내가 1996년도 겨울, 바닥이 얼어서 다리가 부러지고
목발을 짚고 다닐 때 ‘저놈 천벌을 받았다’라는 몰상식적이고 치욕적인
말을 들은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에서 시동이 꺼져서 차가 서너 바퀴 구르고 무사했을 때도 똑같은 말을 들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길거리 개 한 마리가 쓰러져 있어도 가슴 아파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이 더러운 속성의 인간들은 도대체 인간의 가면을
쓴 짐승의 속성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이들의 의식은 타인이 잘되면 배 아파하고 질투하고, 몸이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면 ‘천벌’이라 말한다.
나는 이 더러운 말을 더 이상 듣기 싫어서 비록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정신으로
육체를 다스리기로 하였다. 앉은 자세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나간 나의 일들을 하나씩 반추하여 보았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 내부의 모든 힘을 육체를 일으키는데 정신을 집중하였다.
으악~ 하는 고함을 지르면서 벽에 한손을 짚고 조금씩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몇 시간을 사투하면서 마지막 접혀진 무릎을 필 때는
악에 바쳐서 씨발~하고 고함을 치면서 겨우 일어 설 수 있었다.
산고의 지독한 고통에 남편에게 욕을 퍼 붓는다는 산모의 심정까지도 느낄 수 있던 경험이다.
이 당시 나는 집과 학교를 통학하였고 이수해야할 과목이 많아서
밤 10시 반에서 11시쯤 끝나는 날이 많았다.
수업이 끝나면 운전을 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눈의 혹사로 밤 운전을 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한 연유로 수업이 있는 학기마다 학교 옆에 조그만 원룸의 달세 방을 얻어
새벽까지 과제물을 정리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몸이 부서져 내린 것이다.
잠시, 1996년으로 돌이켜 보자. 내 다리가 부러진 사연은 빛 투성이 단체,
망한 단체의 경제문제가 너무 고통스럽고 미칠 것 같아서
단체 가족 몇 명과 술을 마시고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 때이다.
난 이 당시 술을 마시면 정말 많이 울었다. 하소연 할 때도 없었고,
단체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망해있었다. 본사의 근무자는 몇 개월 째 그 알량한
월급조차 못 타고 있을 때이다.
내가 기억하는 정확한 수치는 이러하다. 그 당시 전국 전세금이 총자산인데 17.8 이였고,
빛이 43이 넘을 때이다. 이건 미치지 않고서는 이 따위로 운영을 못 하는 것이다.
죽어라 일하는 사람들이 알량한 월급조차 못타 애들이 배고파하는데도
인테리어에 억대를 투자하는 미친 자가 있을 때이다.
책임자가 억대 이상의 인테리어를 하면 그 인테리어를 자신의 형에게
오더를 줄 때이니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