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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4-25 21:37
제 3장 거꾸로 읽는 나의 인생 체험기
 글쓴이 : 혁명역사위원회
 
3장 거꾸로 읽는 나의 인생 체험기
 
12008713
 
군대를 다녀온 남자는 자신의 군번을 평생 기억한다.
 
군번을 양각으로 표식 하여 목에 거는 것이 군번줄이다.
 
일명 군인들 사이에서는 개목걸이로 통한다. 군인이 죽었을 때 신원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표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군인들의 죽음이 곧 개죽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박사논문을 쓰기위해 서재 겸 골방에서 두문분출 하던 첫날이 2008713일이다.
 
 학위 논문을 쓰기위한 기초자료 수집은 서울의 국회도서관에서 박스로 신청하였다.
 
자료를 잘 찾아 준 재원에게 감사를 드린다.
 
 나는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논문 통과까지를 딱 3년으로 한정하고 공부하였다.
 
끝장을 보는 내 성격상 3년이라면 가능한 시간으로 대략 계산을 하였다.
 
더불어 내 인생의 나이를 계산해 보니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질적인
 
삶의 의미에서 무의미한 계산에 도달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인문학(사회학) 박사를 3년 만에 딴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한 학기를 시작하면서 알아버렸다.
 
박사학위는 권위와 명예의 상징이기에 그리 빨리 학위를 쓸 자격을 주지 않고 훈련시킨다.
 
 학위의 과정은 영어시험에 합격해야 종합시험의 자격이 주어진다.
 
종합시험에 합격하면 비로소 예비발표의 자격이 주어진다. 이후 본 발표가 5차까지 진행된다.
 
예비발표가 끝나도 공부의 분량과 논문의 일정한 틀이 형성되지 않으면
 
교수들이 먼 산만을 바라본다. 학생이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불가능에 가까웠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내 몸이 거의 죽음 근처에 다다른 것이다.
 
호흡조차 거의 터지지 않았고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엄청난 통증과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원인은 이러하다.
 
첫째 박사 1학기 과정에서 공부와 논문 작업의 틀을 만들어 나갔고,
 
영어시험을 미리 패스해서 부담감을 줄이려는 과욕을 하였다.
 
둘째 남들은 30학점을 이수하였지만 나는 석· 박사 전공이 각각 달랐기에 60학점을 이수하였다.
 
 하여, 공부의 분량이 수치적으로는 2배이지만 가공할 분량이었다.
 
셋째 영어원서를 공부하고 요약, 발표하는데 생소한 단어가 많아서 수 없이 밤을 지폈다.
 
넷째 하루 2-3시간의 수면을 취한 것이 몸에 부담감을 가중 시켰다.
 
2절 전신마비 증세
 
20064월 학위 첫 학기 눈을 뜬 악몽이 시작되었다. 시계의 초침소리만 들린다.
 
어제까지 무리 없이 수업을 받고 과제물을 정리하고 새벽5시에 잠이 들었다.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 전신마비증상이다. 더 힘든 것은 호흡이 10초 정도
 
열리지 않았다가 겨우 한 숨을 쉬고 또 호흡이 멈추는 증상이 반복되었다.
 
핸드폰이 바로 옆에 있는데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낮과 밤이 바뀌었다. 호흡은 적당히 돌아왔지만 숨을 쉬는 동안
 
옆구리는 여전히 엄청난 통증에 시달리면서 깔딱 숨을 쉬었다.
 
정신과 눈만 살아 있지 몸은 움직이지 못하는 산송장이다.
 
3절 정신은 육체를 지배한다.
 
남들은 이럴 때 어떤 행동을 할까. 기도를 할까. 아니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렇다면 나는 이 상태를 도대체 어찌 벗어나야 할까.
 
나는 솔직히 우선은 이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악에 바쳤다.
 
호흡을 가다듬고 으아악~ 하고 고함을 질렀다.
 
온 몸의 경직과 울림의 통증을 그대로 맛보면서 몇 미리씩 몸을 한쪽으로 굴려나갔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겨우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남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분명히 핸드폰으로 119를 부르거나 지인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하지 않았다. 내가 1996년도 겨울, 바닥이 얼어서 다리가 부러지고
 
목발을 짚고 다닐 때 저놈 천벌을 받았다라는 몰상식적이고 치욕적인
 
말을 들은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에서 시동이 꺼져서 차가 서너 바퀴 구르고 무사했을 때도 똑같은 말을 들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길거리 개 한 마리가 쓰러져 있어도 가슴 아파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이 더러운 속성의 인간들은 도대체 인간의 가면을
 
쓴 짐승의 속성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이들의 의식은 타인이 잘되면 배 아파하고 질투하고, 몸이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면 천벌이라 말한다.
 
나는 이 더러운 말을 더 이상 듣기 싫어서 비록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정신으로
 
육체를 다스리기로 하였다. 앉은 자세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나간 나의 일들을 하나씩 반추하여 보았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 내부의 모든 힘을 육체를 일으키는데 정신을 집중하였다.
 
으악~ 하는 고함을 지르면서 벽에 한손을 짚고 조금씩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몇 시간을 사투하면서 마지막 접혀진 무릎을 필 때는
 
악에 바쳐서 씨발~하고 고함을 치면서 겨우 일어 설 수 있었다.
 
산고의 지독한 고통에 남편에게 욕을 퍼 붓는다는 산모의 심정까지도 느낄 수 있던 경험이다.
 
이 당시 나는 집과 학교를 통학하였고 이수해야할 과목이 많아서
 
10시 반에서 11시쯤 끝나는 날이 많았다.
 
수업이 끝나면 운전을 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눈의 혹사로 밤 운전을 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한 연유로 수업이 있는 학기마다 학교 옆에 조그만 원룸의 달세 방을 얻어
 
새벽까지 과제물을 정리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몸이 부서져 내린 것이다.
 
잠시, 1996년으로 돌이켜 보자. 내 다리가 부러진 사연은 빛 투성이 단체,
 
망한 단체의 경제문제가 너무 고통스럽고 미칠 것 같아서
 
단체 가족 몇 명과 술을 마시고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 때이다.
 
난 이 당시 술을 마시면 정말 많이 울었다. 하소연 할 때도 없었고,
 
단체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망해있었다. 본사의 근무자는 몇 개월 째 그 알량한
 
월급조차 못 타고 있을 때이다.
 
내가 기억하는 정확한 수치는 이러하다. 그 당시 전국 전세금이 총자산인데 17.8 이였고,
 
빛이 43이 넘을 때이다. 이건 미치지 않고서는 이 따위로 운영을 못 하는 것이다.
 
죽어라 일하는 사람들이 알량한 월급조차 못타 애들이 배고파하는데도
 
인테리어에 억대를 투자하는 미친 자가 있을 때이다.
 
책임자가 억대 이상의 인테리어를 하면 그 인테리어를 자신의 형에게
 
오더를 줄 때이니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할 때이다.
 
그 당시 일억이면 본사 월급

혁명역사위원회 15-04-25 21:59
 
월급 6-8개월을 줄 큰 금액이었다. 이때 내 한달 생활비가 15만원이었다.
그 외 크고 작은 사연 또한 얼마나 많았겠는가.

 처음에는 인간을 원망했다. 그리고 하늘을 원망했다. 그러나 결국 난 하늘에 맹서했다.
다 때려 부수어 버리고 새로 출발하자.
죄송한 마음이지만 책임자 중에 억울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들의 품격을 믿기로 했다,
하여 나는 책임자 제도를 아예 없애 버리고 말았다) -

 내가 미칠 듯이 우니 한 가족이 했던 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oo님이 이러시면 저희는 더욱 힘듭니다. 캡틴 원과 캡틴 투를 생각해서 힘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도 울었다. 난 그의 말이 엉엉 우는 나보다 더욱 애절하게 들렸다.

 난 그의 말을 조용히 생각했다. 내가 울면 자신들은 더욱 힘들다는 그 말.
그의 울림이 어쩌면 전체의 생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누워 있는 동안 조직운영에 관해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했다.
부러진 다리에 부기가 빠지는 약 2주 후부터 마음에 독을 품었다.

 부기가 빠지고 병원에 가니 수술을 해서 뼈를 다시 붙이고 재활 치료까지 끝내면 6개월이 걸린단다.
 내가 병원에 누워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단체의 상황이 절박하였던 때이다. 양쪽 지팡이를 짚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서 한쪽
등산용 지팡이를 저울대 삼아서 깽깽이를 하고 뛰어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다리가 너덜거린다.
엄청난 통증이 계속 이어져서 병원에 갔더니 나 보고 머리 새하얀 원장이 미쳤냐고 묻는다.
진이 나와서 조금 붙었던 뼈가 재차 떨어져서 살가죽만 너덜거리고 뛰어 다니는 미친 사람이란다.

신경 끊어졌으면 평생 병신인데 정말 운 좋은 줄 알란다.
그날 깁스를 한 것이 다리 부러지고 한 달 후이다. 병신 되지 않으려고 깁스를 하고 양쪽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병원에 누워 있어도 모자랄 판에  통증이 오면 독주를 술 뚜껑만큼 따라서 홀짝거려가면서 얼굴만 웃으면서 일했다.

  난 지금도 엇비슷하게 붙은 내 다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 일
반 다리의 하중을 1/4 밖에 못 받는다.
 
그 당시 걷기만 하면 되었고, 시간 ‧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하여, 나는 그냥 엇나간 채로 진이 나와서 붙은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조금만 무리하면 다리가 퉁퉁 부어오른다. 수술을 하지 않은 결과물이다.
최근에도 무리하면 여지없이 부어오르는 다리를 바라본다. 정말 분한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제 4절 학교 그만 두시오.

 마비 증세가 온 후 지독한 통증을 참아가면서 수업에 출석하였다.
단 1분도 내 양심상 지각하지 않았고, 몸의 아픔에 대한 핑계를 대지 않았다.
몸에는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목-아대를 둘렀고 그 바로 아래 손수건을 넣어서 땀이 차는 것을 흡수시켰다.
 간혹 전신마비 증세가 재차 올 때는 재원이의 팔에 의지하면서 한 걸음씩 어렵게 걸었고 등에 업히기도 하였다.

 몇 발자국이라도 걷는 속도를 붙여 보고자 찾아간 것이 오주x 가족이었다.
목 부위와 척추에 손을 대고 뼈 치료를 받았다. 걷는 속도에 어느 정도 차도를 보였고 목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금 좋아진 듯해도 통증은 수시로 찾아왔고 마비증세는 계속 반복되었다.

 교수들도 눈치가 훤하다. 내가 워낙 아픔을 참아가면서 수업에 임하는지라
“학교를 그만 두면 어떠냐고” 넌지시 던진다. 책상에 앉았다가 일어서는 시간이 최소 5분이 걸렸다.
누가 도와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픔을 참고 일어서는데 누가 내 몸에 손을 대면 나는 그 고통으로 까무러칠 정도였기 때문이다. 악
으로 내 몸을 일으킬 때이다.
 
물론 내가 아는 모든 지인들도 한 마디씩 거든다. 제발 지금 이 상태로는 절대 안 되니
공부를 포기하고 치료에 힘쓰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말들을 한 마다씩 한다. 

 나는 내 심성 가득한 곳에서 울부짖으면서 말하였다. 
난 지금 포기하면 죽습니다. 내가 지금 공부를 포기하면 내 자신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수모입니다. 아직 죽지도 않았습니다. 저 아직 숨쉬고 있습니다.
이깟 고통 지금 즐기면서 다닙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모르핀(morphine)이라도 있으면 맞고 싶습니다.
너무 아프고 아파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는 줄 아나요.
나 사실 박사를 따서 내 응어리진 한을 풀어야 합니다.
나를 무시한 개새x들에게 긍정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이 공부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죽거나 돌아버릴 겁니다.
내버려 두세요. 또한 내가 만일 지금 박사를 포기하면 나중에 내 원망을 평생 듣게 될 것입니다.

난 지금 이 건강으로 목숨과 맞바꾼 사투를 벌이는 중입니다.
이것은 지금 내 한을 풀어내는 의지와 건강과의 싸움입니다.


 사실 내가 아픈 이유는 이 따위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아픔이었다.
육체의 아픔은 아플수록 나중에는 즐기면 오히려 편안해진다.
죽을 정도로 아프면 그 자체가 즐겨진다는 것은 아파 본 자만이 그 심정을 안다.

내가 이 당시 수면을 취할 때는 침대 모서리를 두 손으로 잡고 앉은 자세로 눈만 감았다.
선잠이라도 잠시 자면 행복한 순간이었다.
고통이 심해 누울 수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누우면 호흡이 자꾸 정지되었다.

 정신적인 아픔은 간혹 분노로 바뀌어서 나를 괴롭힌다.
인간의 이중성과 추악함, 교활함에 치를 떨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누구에게 조차 말 못하고 혼자 삭이면서 공부를 하는 심정은 육체를 더욱 아프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도 나를 완벽하게 제거하려는 작업이 암암리에 진행 중인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내 영성이 모든 것을 느끼고 감지하였다.

하나에 미치지 않으면 내가 죽을 듯이 괴로웠다. 그 하나의 수단이 공부였다.

 육체의 아픔이란 적당히 아프면 통증이 심하다. 그러나 까무러칠 정도의 아픔이
지속되면 차라리 정신이 육체의 아픔을 즐기게 된다. 그런 세월을 보냈다. 


제 5절 혼돈의 세계

 지독한 통증과 사투를 벌이면서 2008년 6월 마지막 5학기를 이수하였다.
그리고 2008년 7월 13일 박사논문을 쓰기위해 책상에 앉았다.
 내 평생 이 날짜는 잊지 못한다.
내 영혼에 다짐하였다. 내가 지금부터 3개월간 이 논문을 완성 못하면 죽음과 같은 패배다.
어떠한 비겁한 변명도 할 필요 없었다. 내가 시작한 것이니 실패하면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가장 긍정적인 것이 가장 큰 복수이다. 이런 다짐을 하면서 정신을 자각 시켰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두 손을 합장하고 기도하였다.
논문만 완성해서 학위를 따면 내 영혼을 뜻 가는 데로 맡기겠다는 기도를 하였다.

순간 불쌍한 아버지의 눈빛이 아련히 떠오른다. 못 배운 자식인지라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황소 같은 눈만 껌뻑거리면서 쳐다보았던  깊은 눈 빛.

내 엄마의 말도 오버랩 되었다.

 “나 죽으면 무덤 파봐라. 그러면 내 몸이 썩어서 돈이 되 있을 것이다.
” 국민 학교 시절 흰 머리를 뽑아주고 있던 나에게 엄마가 던진 가난에 대한 지독히 한 서린 말이다.
지금도 내 엄마의 이 말이 귀에 못 박혀 있다. “ ㅇㅇ야 엄마 죽으면 무덤 파봐라
그럼 내 몸이 썩어서 흙 대신 돈이 되 있을 것이다. 

내 엄마가 한(恨)스럽게 뱉어낸 이 말을 나는 뼈 속 깊이 사무치게 생각하면서 산다.
내가 경제행위를 할 때 잠을 안자고 미치도록 뛰어 다니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며,
나를 경제 현실주의에 눈 뜨게 만든 인생의 좌표인 동시에 지침이기도 하다.

6절 죽어서도 가슴을 치는 여자 그는 내 엄마였다. 

 엄마의 산소는 내가 너무 힘들고 괴로 울 때 캄캄한 밤길을
걸어 실컷 울고 내려오는 소통의 장소이기도 하다.

여름철 새벽에 산소에 올라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깜빡 잠이 들었다.
산소에서 모기에 뜯긴 자국은 2주 이상을 간다.
그래도 참 행복하다. 난 다 컷 지만 산소에 들르면 엄마에게 내 x지를 보여주면서 오줌을 싼다.

엄마가 만들어 준 x지다하고 웃으면서 말한다.
누군가 보면 틀림없이 미친놈이지만 나는 엄마 앞에서 하는
그 행위가 자식으로서 참 행복하다.

 이런 행위를 반복 할 때 한 번은 엄마 산소에 가서 인사를 하고
내려올 힘조차 없었기에 재원이를 불렀다.
그 시각이 새벽 3시쯤 일 것이다. 이후 재원이가 엄마 산소랑 가까운 곳으로
나 몰래 집을 옮겼다.
나도 최근에 그 사연을 알았다.
지금까지도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보름에 한번씩 내 엄마의 묘소에 가서 정성을 다한다.
 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운 가족이다.

 더불어 이XX 교수의 묘소도 조상 모시 듯 그렇게 정성을 다해 매년 제사를 모신다.
내가 재원이와 같이 이 교수의 제사를 3년간 묘소를 찾아서 지냈다.
그의 제사 차리는 것을 보면 그의 처와 함께 밤새 음식을 만들어 온다.

참으로 지극정성이다. 차림 상을 보면 웬만한 집 제사 음식보다 풍족하게 잘 차린다.
특히 이 교수 생존시 나와함께 편의점용 섬씽을 즐겨 마셨기에
이술은 지금도 필수품으로 지참한다. 

 3년 째 되는 이 교수 제삿날, 묘소 앞에서 재원에게 말했다.
4년째인 내년부터는 너 혼자 정성 다해 모시라고.
 내가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도 못 가는 불효자이고 엄마 제삿날도 못가는 불효자이다.

예법 상 3년을 이 교수 제사를 지냈으니 기본 예법을 한 것으로 이해해 달라고 하였다.
 참 가슴 아픈 말을 뱉어 냈다. 지금도 변함없이 내 엄마 산소에 정성을 다하고
이 교수 묘를 잘 찾아주고 있기에 너무도 고맙다.

내 속 마음은 그에게 큰절을 한다. 너무도 고마워서.


제 7절 내 엄마는 이렇게 원통하게 죽었다.

 내 엄마는 신자가 죽였다. 나의 형들이 객지에 있을 때
나는 늘 상 엄마의 옆에 학생신분으로 붙어있었다.
죽는 순간까지 왜 엄마가 죽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내 엄마는 신자에게 머리채를 붙들리고 갖은 패악질을 당한 울화병이 근본적 원인이다.
그 울화병이 쌓이고 쌓여서 합병증으로 발병된 것이다. 후비소 공사니 이딴 웃기는 소리 마라.

 신자들이 연합하고, 돌변하여 어느 날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넘어트렸다.
나는 이당 시 그들에게 격렬히 대항 하였다.
그러나 내 엄마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내가 늦게 발견을 한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고함 소리가 나서 뛰어 나가보니
이미 내 엄마는 신자들에 머리채를 잡혀 당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들의 아들놈이 옆에 구경하기에 나는 아들놈을 두들겨 패서
주위를 분산 시켰고 그것으로 내 엄마의 머리채가 풀렸다.
이것은 인간을 파멸하는 원초적인 모욕감이며, 수모이다. 
내 엄마는 한 여자로서 그 원통함과 비통함이 쌓여서 가슴에 피멍이 든 것이다.

그 당시 남자 신자가 있었다. 옆에 과부가 살았다.
이 둘이 붙어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신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배신을 하면서 내 엄마의 머리채를 잡아 챈 것이다.
 일이 벌어진 자세한 내막은 똥간(화장실) 사건이지만 내 가슴에 묻어 버리고
 언젠가 혹여 자서전을 쓸 기회가 생기면 세밀히 기록하겠다.

 나는 최근 한 달 전 이와 똑같은 패악 질을 이틀에 걸쳐서 교육관에서 당하였다.
태어나서 평생 당해도 모자랄 수모와 치욕을 이틀에 걸쳐서 당해보았다.
권력에 눈이 멀고, 교만함으로 뭉쳐 온갖 권모술수를 피는 그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패악 질과 음모를 꾸미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음모에 희생되었나를 생각하면, 피가 끓어오른다.
더불어 망해가는 조직을 바라보고 있자면 내 심장이 용솟음친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의를 가진 사람들이 이들을 척결할 것이라 믿는다.
그들이 나의 정신을 모르기에 오히려 다행이다.

 너희에게 용서라는 단어가 들어갈 따뜻한 심장이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 보아라.
너희가 행한 더럽고 추악한 그 사건이 명확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조직이 제자리를 찾아야 망해 가는 조직 분위기가 일소된다.

조직을 망 하게한 원인의 주체가 누구인가. 바로 너희들이며, 너희를 감싸는 자들이다.
나는 그것을 명확히 알고 있다.
너희는 행한 만큼 거둘 것이다. 




제 8절 내 엄마의 시신이 오던 날.

 1980년.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배치를 받은 토요일이다.
석양이 참 아름다운 날이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2학년 반배치를 받고
번호표를 부여 받을 때 바라 본 하늘의 석양 노을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하늘이 온통 붉은색, 노랑색, 초록색 형태를 띠어가면서

형형색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채식된 하늘의 뭉게구름은 갖가지 형상으로 모습을 탈바꿈 할 때이다.
때로는 인자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때로는 토끼의 모습도 하면서 채색된
구름이 흘러갈 때이다.

참 아름다운 석양의 노을은 학교가 끝나서 집에 오는 중간쯤 까지 이어졌다.
집에 도착하니, 셋째 형이 엄마를 등에 업고 쇠다리 두개를 포개어 놓아
다리구실을 하는 개울을 건너온다. 나는 퇴원 한 줄 알고 한 달음에 달려가서 말했다.
엄마~~ 퇴원 했어? 너무 기뻐서 깡충깡충 뛰었다.

 형이 엄마를 방에 뉘이고 다리를 잡고 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엄마 돌아 가셨다>. 이 말은 내 심장에 박힌 슬픈 대사이다.
엄마 죽었으니 엄마 젖이라도 만지라고 한다. 마지막 떠나는 엄마의 젖을 만지는 것이
 슬픈 추억이겠지만 그렇게라도 동생에게 말을 해야 했던 형의 심정은 오죽 했을까.

 그때가 양력 3월이라 몹시도 시샘추위를 할 때이다.
장례를 나가기 하루 전 서울에 있는 막내 누이가 늦게 소식을 듣고 사색이 되어서 내려왔다.
 막내 형은 장례를 다 치르고 입관 후 내려왔다.
어디서 무엇을 해서 엄마 부고소식도 전달 못 받았는지 참 어린 마음에 원망스러웠다.


제 9절 입관 식 날

 진잠 방동 저수지. 지금이야 포장이 되었지만 1980년에는 비포장도로였다.
간간히 신도안 쪽으로 가는 버스가 지나 갈 때면 먼지가 자욱해서 한참동안
주위 사물이 보이지 않았다.

 관을 내려놓고 하관을 하려는데 난리가 났다.
찢어지게 가난 한 집인지라 선산이 당연이 없었다.
송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 말을 믿고 송씨 문중 산에 묻으려다 문중사람이 나타나
난리가 났다. 당장 관 들고 떠나라는 것이다.

 그때 내 아버지가 송씨 문중 사람에게 한 말씀 한다. 
“이왕 이리 된 것 시신 물 빠지는 3년만 봐 주십시요.”

 난 30년이 지났지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때의 말을 기억한다.
내 아버지가 당신의 여인을 묻기 위해  애절하게 송씨 문중 사람에게 부탁하는 대사를.
그리고  두팔로 무릎을 감싸 앉으면서 하늘의 반쯤을 향해 바라보는
하염없이 슬픈 아버지의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다. 

 간혹 내 친구 아버지의 사진 찍는 찰칵 소리가 들린다.
직업이 사진사 인지라 내 엄마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 날 나는 하관 식이 끝날 때 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너무 큰 슬픔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가 보다.
 동네 사람들이 너라도 정신 차리라 해서 그러한 연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저 사춘기인 내가 겪기에는 머릿속이 텅 비었고 멍했다.
 
물론 입관이 끝나고 나서 삼 오제 동안 목 놓아 참 많이 섧고 섧게 통곡하였다.
입관 식 후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까까머리 학생인 네가 동네 형들이 대접에 콸콸 따라주는
대병 소주를 마시고 그렇게 소리 내어 많이 울었다.
절을 하면서 통곡을 하였고, 울다가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허망하다.
 

제 10절 클래식-기타 속에 숨겨진 싸구려 중국산 배갈(baigar)

 한 남자가 어둠 속에서 심연에 쌓여 있다.
그가 밤길을 오고 갈 때는 늘 상 오고가는 동선이 정해져 있다.
케이블카 신작로를 통하여 걷다보면 하꼬방 나의 집 위에 걸터앉을 자리가 있다.

 아주 조그만 비탈의 텃밭이 조성되어 있고 막대기를 조잡하게 몇 개 박고
가시철망이 두어 줄 쳐져 있는 풍경이다.
내가 국민 학교를 들어가기 전 이 막대기에 개금 발을 집고 올라섰다
미끄러져 왼쪽 허벅지를 깊게 찔렸다. 그 상처가 아직도 v자형으로 남아있다.

이 당시 엄마는 아파서 울고 있는 나를 보고 더 황당했는지 내 등짝을 때려주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끌고 가서 상처에 된장을 발라주었다.
그때는 그게 만병통치약일 때이다. 지금은 내 등짝을 때려 줬던 엄마 손이 참 그립다.

 텃밭 공간의 후미에 앉을 공간이 있는데 엉덩이를 붙이면 다리가
허공에 뜨는 모습이 연출된다.
그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12시로 되어 있기에 시간의 제약이 있던 시절이었다.
늦은 밤 그 공간에 한 남자가 앉아있다.

그가 어둠을 마시면서 고뇌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때로는 맑은 정신으로,
 때로는 힘에 겨운 20대의 젊은이가 배갈을 마신 상태로
어두운 밤을 하염없이 앉아서 고뇌를 한다.

 그는 때때로 다 마시지 못한 배갈 병을 아버지 몰래 예의를 지키려고
클래식-통기타의 뻥 뚫린 구멍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 45 도 각도로 기타를 세워 놓는다. 그래야 술병이 쓰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익히 고뇌에 찬 술병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고뇌할 때 나는 조심스럽게 뒤편에서 자리에서 일어 날 때까지
옆을 스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등 뒤 반찬가게 옆 골목에 숨어서 계속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고뇌 할 때 나는 그의 등을 보면서 내 나름의 고민을 하였던 시절이다.
그가 고뇌할 때 나 또한 그의 고뇌가 무엇일까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그가 추구하는 생각과 고민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시기였다.
술병을 숨긴 주인은 나의 털 많은 산적 셋째형이다. 이 당시 내가 속으로 붙인 별명이다.


제 11절 학벌에 대한 인간의 콤플렉스(complex)와 이중가면

 나는 다짐하였다. 긍정적인 복수를 반드시 할 것이고 내 목표를 반드시 이루어
내겠다고 내 영혼에 다짐을 하고 시작하였다.

 한국의 사회란 그 어떤 자들도 학벌에 있어서는 가면을 쓴 자들이다.
나는 그것을 피부로 느꼈다. 내가 무엇을 하든 결국에는 “무식한 놈”이란
뉘앙스나 말을 결론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이 나에게 은연 중 냄새를 피우거나 말로 표현하는 칼자루였다.
이유는 나보다 배움이 조금 더하다는 단 한가지이다.

 내가 보통의 사람  몇 배의 책을 읽어 지식을 얻고
그것을 사회경험과 결부하여 무엇 하나를 만들어 내도 결국은
 “어찌 되었든 넌 무식한 놈이야” 정도로 낙인 도장을 찍었다.
한 인간이 한 인간을 향해 ‘저 놈은 어떤 놈이다’라는 등식의 낙인도장을 찍는 것,
이것 보다 인간을 파괴 시키고 영혼을 파괴시키는 것이 없다.

 이 낙인의 도장이 결국은 갈등의 소재를 만들어 내는 매개적 역할을 하게 된다.
한 인간을 낙인 시켜 갈등이 쌓이다 보면 그것이 큰 원한으로 마음에 자리 잡는다.
갈등이 대립하면 결국 소통이 없어지는 것이다. 갈등과 대립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두 쪽이 다 상처를 입어야 소통의 문으로 다가 서게 되는 정치판의 현실이 그러하다. 

인간의 삶 속에서도 이 논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의 실정상 학력에 관한 대중의 이중구조를 어찌 볼 것인가.
공동체적인 삶 속에서의 환경적 영향을 지극히 받는다. 
한국의 동토에 사는 사람들 중 자신의 성씨를 온전히 가진 사람들이 사실은
채 절반이 되지 못하였다.

조선 중∙후반기 실정이 이러했으니 그 이전의 세대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쌍놈의 호칭에는 결코 사람이라는 용어가 아닌 머릿수 숫자(頭)를 붙여주었고
쌍놈 일가족 전체와 소 한 마리를 맞바꾸는 시절이 있었다.
그 만큼 사람의 가치가 개‧소만도 못한 시절이었다.
소수의 양반 족들을 제외한 일반 백성 태반이 족보를 위조해서 성씨를 꾸민 것이 가족학의 정설이다.

 양반이 쌍놈 되고 쌍놈이 양반이 된 확률로 치자면 쌍놈이 돈만 있으면
 양반이 된 수효는 상상을 초월한다. 양반이 쌍놈이 되는 환경은
역적질 밖에는 없었으니 그러하다. 이러는 와중에 족보를 세탁하면서
성씨를 갖게 된 자의 수효만큼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였다.

이것은 묵시적으로 그 시대적 환경이 만들어낸 공동체∙ 집단적
범죄 행위이기도 하다. 이것은 중국의 공자 생존시에도 있었던 문화관습이나
대 흉작 때 일어난 식인행위와 조선의 임진란 때의 식인행위에 대해 인권을
논 하는 자체가 난센스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공자 또한 인육을 먹었다. 어찌 설명하고 표현할 것인가. 
다수의 억눌렸던 대중이 성씨를 사고, 억눌렸던 노비의 마음이 폭발하여
사∙농∙공∙상이라는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백성 모두가 더 높은 계층을 향해 탈출을 시도할 때이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계층은 사(士)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하여 가족의 희생을 담보하면서
단 한명의 선비를 만들어 내기 바빴다. 그래야 그들이 선비의 가족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고 합리적으로 완벽하게 범죄행위를 마무리 짓는 완전범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산물의 결과가 바로 학벌과 경제라는 이중구조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현 세대를 학벌과 경제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비교해 본다면,
 대다수가 경제력이 있는 자를 가치 선택의 비교 우위로 확정 지을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학력이라는 메리트(merit)가 사라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하다.

 그러나 음흉한 한국의 대다수 족보 위조자들은  두 가지를 다 원한다.
이러한 원인은 그들의 유전자 속에 알게 모르게 위조의 각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손은 물론 족보 위조자의 자손인지 전혀 모른다.
물론 알 필요조차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알았다 손 치더라도 스스로 부정할 것이다. 그것이 마음이 편할 것이다.
스스로 오랜 시간 부정을 하다 보면 심리학적으로
그 부정이 사실적 객관화가 되는 것으로 사람들은 착각을 일으킨다.

 하여, 옛 말에도 호랑이가 마을에 내려왔다 세 사람이 모여 작당을 하면
그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  거짓의 부정적 사실이 인위적인 진실로 위장되면
그럴듯한 긍정으로 바뀌듯이 그들의 족보세탁의 이면적 심성에는
두 가지를 다 공유하는 이중심리가 잠재되어 있다.

제 12절 한국 정서의 순혈주의는 이미 파괴되었다.

 족보 위조자들은 부정적∙ 역사적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순혈주의를 한편으로 주장한다. 이것은 사기꾼이 더욱 진실한 것처럼
위장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거짓 족보를 만들어 거짓 성씨를 부여 받은 자들이 역설적으로 만들어 낸
순혈주의(純血主義)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것은 내면에 잠재된 족보 세탁의 역사적 사실과 양심의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한국의 사회화 과정 중 하나인 다문화 사회의 진입이 최근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이 순혈주의는 앞으로 10년 정도 흐르면 거의 파괴가 될 것이다.
 한 학급당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혼혈 자손이 1/3 정도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물론 지금의 농촌은 이미 이러한 비율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농․어촌의 노총각은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후진국의 여자는 대학 졸업생, 미모, 혹은 나이가 어리다.
이것은 경제와 학벌, 미모, 젊음이라는 맞바꿈의 물물교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혼사이다.

 물론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사랑의 감정이 생길 수조차 없다.
그러나 노총각들은 자손번식을 위하여 결혼을 강행하는 것이 한국적 관습이다.
단지 섹스만이 필요하다면 굳이 외국의 며느리를 맞이할 필요가 있겠는가.
한국의 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돈만 들고 나가면 얼마든지 입맛에 따라
섹스를 할 수 있는 장소가 널려 있다.

이것이 대를 잇고자하는 한국적 문화사고의 근본적 방식이다.
이것은 또한 모든 종교 철학을 초월한다. 즉, 대를 잇기 위해 짝짓기를 하는
지극히 당연한 동물의 본성과 문화적 사고가 맞물린 결과이다.

 하여, 세상은 어차피 한 가족으로 묶이게 된다.
내가 만일 20대라면 김태희가 밭 갈고 한가인, 손혜진 정도가 소똥을 치우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날라 가서 그곳 여자를 꼬셔서 한국으로 데려와서 결혼할 것이다.
지금의 내 의식이 그렇다는 말이다.
굳이 한국 여자만을 고집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낀다.
어차피 세상의 종족은 섞이게 되어 있다.

 사실 한국의 상류사회는 그들만을 위한 관습적 결혼을 하지 않는가.
그들의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가족간의 이해적 관계에 의하여 대부분 성립된다.
다수의 대중 또한 그들에 맞는 끼리끼리 결혼의 이해 타산적 주고받는
관계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가령 돈과 명예, 돈과 학벌, 집안과 학벌, 혹은 미모라든지,
자신이 갖추지 못한 많은 변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다른 이들에게 교묘히 세탁하여 사랑하는 척 그렇게 결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손을 보면서 정을 붙이고 평생을 싸우면서 사는 것이다. 
하여, 부부를 전생의 원수가 만났다고 한다.

 나는 결혼 못한 노총각․ 노처녀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싶다. 
순혈주의 세대는 끝났다. 서로 필요한 물물교환을 인정하고
남자는 김태희 정도가 밭가는 나라의 색시를 아내로 맞아 들여도
무방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여성은 남성보다 솔직히 선택의 폭이 넓다.

그게 여성의 메리트 이다. 외국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거나
외국의 남자를 남편으로 삼는다면, 최소한 2-3개국 나라의 언어를 공짜로
 배울 수 있는 엄청난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살 붙이고 살다보면 손짓 발짓 언어도 통할 것이고
눈빛으로 감정을 읽을 수 있으며, 사랑의 언어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올 것이다.
 한 예로 튼튼한 여자를 얻고 싶다면 게르만족 여성을 얻기 바란다.
 게르만족 여성은  출산을 한 후 바로 찬 물로 샤워를 한다.

그만큼 튼튼하다는 반증이다. 한국의 여성이 이와 같이 흉내 낸다면
평생 중풍 걸린 듯이 사시나무처럼 온 몸을 떨 것이고 폐인이 될 것이다.
어차피 아시아권을 벗어나면 라틴족, 게르만족.  켈트족이 전 세계의 인구를
이루는 가장 큰 집단의 구성요인으로 작용한다.

 불과 30년 전 정도만 해도 연애결혼한 사람이 이 사회에서는
별종 취급을 당하였고 “개망나니 혹은 집안 족보에 먹칠한
호적 팔 개 호로 자식” 취급을 받았다.

지금의 연애결혼 관습으로 보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이 시대에는 미친 놈 취급을 당한다.
결론적으로 외국 여자나 외국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제 13절 학벌의 편파적 의식을 버려라.

 학벌에 관한 편파적 의식, 적어도 이 이중의 가면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이 것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다. 지금의 내가 보는 관점에서
나를 무시했던 그들의 지적 수준이란 것이 사실은 
고작 대학 기초교양 수준 정도이다.
그들의 정신적 수준은 유치원 수준이다. 하여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사실 품격이 있고 사려가 깊다.
사람을 다루는데 절대로 권위주의 적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다.
한 잔의 소주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자신의 주장을 강변하거나 화를 내어서 주장을 관철하려는
자들은 허위로 무장된 사이비 지식인이다.
이것이 내가 경험하고 느낀 실체이며, 속이 뻔히 보이는 행위이다.

 하여, 지식인들끼리는 자신의 전공이 아니면 결코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설령 자신의 전공에 적합한 질문이 나오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피해 가고 결론을 함부로 내리지 않는다.

이것이 지식인의 장점이며 우유부단해 보이는 양면적 딜레마이기도 하다.
겉만 살짝 아는 만물박사들이 밥 굶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생의 삶이란 그래서 무엇 하나를 해도 확실하게 끝장을 보아야 한다.

 사실 한국에서 고등학교 학력이면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 없다.
특별한 직업이 아니면 학벌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치졸한 허위의식이며,
계급을 만들어내는 허황된 치장물이다.

조금 더 배웠다는 자들의 내면을 알고 보면 가장 그럴듯한
가식주의자들이 상당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뱉는 말과 행동의 이중성. 자신은 행하지 아니하고 남을 가르치려고만 드는
못된 근성. 목에 힘을 주면서 말하는 변형된 목소리.
나는 그러한 가식과 허위의식에 가득한 자들의 속성을 나름대로 파악한다.
사람은 학력이 어찌하든 솔직담백한 순백색의 사람이 참으로 아름답다.

 공부의 허망함을 아는 사람들은 학벌의 상대주의적 허무를 또한 알기에
상대방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항상 부족한 자들이 교만한 것이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이다. 
못 배웠으면 어떠랴. 마음 아름다운 것이 최상이다.

 그렇다면 너는 왜 박사까지 공부했냐고 묻는다면 어느 cci-bal 池가
놈이 열 받게 한 것이 원인이다.
나는 딱히 이유랄 것도 없이 이 한 가지가 담백한 공부의 첫째 핑계였다.
내 정신은 수모를 당하면 달나라 까지 가서 내 생명을 걸고 갚아준다.

나머지도 내 감정상 포함은 되지만 부수적인 산물일 뿐이다.
최고의 학부를 가진 놈과 고등학교 중퇴 후
검정고시를 본 내 사이에 앉아 계신 아버지의 슬픈 눈빛을 바라봐야 했던
아들의 수치심이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한줌도 안 되는 지적 수준으로 갖은 폼 잡던
이자를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온다.

제 14절 소망하던 학위를 받다.

 내 인생을 잠시 반추하여 보았다. 학위 과정을 돌이켜 본다면 악전고투 자체였다.
3개월 동안 약 400쪽의 논문을 썼다. 하루 최소 18시간을 써 내려 간 것 같다.
이, 삼일 밤을 지피는 것이 삼 개월 과정 중 절반을 차지한다. 그

리고 이어지는 교수들의 비평과 논문 칼질이 시작되었다. 칼질을 당할 때의 아픔은
경험해 본 사람이 그 쓰라림을 안다. 온 몸을 난도질당하는 느낌 그 이상일 것이다.
학위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변명이 필요 없다. 따옴표, 쉼표 하나까지 지적을 받는다.
5차의 관문까지 통과해야 하는 살얼음판이다. 
 
 더 가슴 조이는 일은 단 한명의 교수도 반대표를 던지면 통과 할 수 없는 절박함이다.
이것이 현대판 화백제도이다.
물론 학교마다 학위를 주는데  학칙 상 85%의 찬성표를 합격의 기준점으로
 주는 학교도 있을 것으로 본다.

이제 옆 건물 경영학과 박사논문 심사과정에서 지도교수와 다른 심사교수 간에
주먹질이 오갔다는 흉흉한 말을 전해 들었다.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 확인해 보았더니 사실이다.
매년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주먹질이 오간 그 학과의 지도교수는 차처 하더라도
 학위를 받으려고 애 쓴 학생은 얼마나 불쌍하고 희생이 크겠는가.
그 학생은 정말 미치고 팔딱 뛸 노릇 아니겠는가.

 1차에서 2차 심사까지 기간이 일주일 남짓이다 .
 이 일주일의 시간 동안 200쪽으로 내용을 편집해야 한다.
논문 심사 교수들의 난도질의 결과이다. 한 교수가 하나씩 지적하면 그리된다.
 도리가 없다. 더욱 미치는 것은 각 교수들의 요구가 제각각 이라는 거다.
 말이 줄이고 편집하는 것이지 논문을 새로 쓰는 형식과 같다.

 논문 중 도려낸 부분은 나중에 책으로 출판할 때 잘 비벼 쓰라는
덕담을 하였다. 그들도 박사 논문심사 때 당해 본 경험을 나에게
그대로 써 먹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짓는다. 
미칠 지경이다. 통증이 밀려와서 편의점에서 썸씽 한 병을 사서 들이키고
논문 편집을 시작했다.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다.

 이 심정은 산에 오르던 중 깔딱 고개 앞에서 쉬고 있는데 내려오는
사람이 거의 다 왔노라고 하얀 거짓말을 치는 것은 양반에 속한다.
산모가 힘을 주는데 거의 다 나왔다는 하얀 거짓말 그 심정이다.

 배를 째는 제왕절개로 애를 낳는 대부분의 산모들은 깔딱 고개를
넘어보지 못한 여성들이다. 이들은 마지막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여
의사나 간호사의 홀림에 당하여 자연을 거스르는 인공출산을 감행한다.

가장 고통이 극을 달할 때, 위험 하다는 달콤한 유혹을 던지면 대부분의
산모나 보호자는 그 유혹을 넙죽 받아먹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태아 위치가 거꾸로 있다거나, 위험해서 배를 째었다고 변명한다.
심지어 자신이 선택하여 배를 째고 남의 탓을 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여성 배 가르는 비율이 10명당 4명이다.
산모들의 배를 열심히 갈라야 먹고 사는 산부인과의 양심과 고통이
결합한 산물이 전 세계 산모 배 가르기 1등이라는 오명이다.

 일주일 후 2차 심사이다. 편집을 다 못하였다.
물론 내용도 다 줄이지 못하였다. 일주일을 꼬박 세워도 시간 부족이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심사에 응했다.
심사 위원장인 부총장께서 잠시 나가 있으란다.
 20분 후 쯤 들어오라는 콜을 받고 심사위원 앞에 앉았다.

심사위원장인 부총장님이 총평을 하신다.

 “우리가 샌님 노릇 수십 년 한 사람인데 눈치가 귀신 입니다.
어떤 사람이 공부 열심히 하고 어떤 사람이 농땡이 하는 것 안 보는 척 하지만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원래 박사논문은 2차에서 결과발표를 해주지 않지만 5인 교수의 모든 평이 5학기
전 학습과정, 또 학위과정에서 보여준 열정과 성심에 만장일치로 동의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2차지만 박사논문을 통과 시켜 주기로 5인이 만장일치로 합의 하였습니다.
아직 5차까지 시간이 20일 정도 남았으니 지도교수와 상의하여 마무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각 단계 일주일이 짧은 시간이지만 매회 최선 다하기 바랍니다.

ㅇ ㅇ ㅇ 박사님 축하드립니다.
라는 말과 함께 악수를 청하는데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나에게는 서러움의 눈물이 더 컸다.
기뻐서 울어야 하는데 왜 나는 이리 서러운지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몸이 너무 아프고 인간의 이중성에 치를 떨면서도 하루에 수십 번씩
책상에 머리를 숙이고 손을 맞잡아 기도하면서 그 아픔을 이겨 내었다.
“제발 논문 통과까지 내 육체를 지켜주어 나를 못 이기는
패배자가 되지 말게 해 주십시요.
그리고 내 영혼을 거두어 가도 후회 없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증이
최고조로 밀려 올 때마다 반복 하였다. 아 ! 날마다 모르핀을 맞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둔하고 머리가 참으로 석두대장인 내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3년의 죽음 같은 박사과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이비(논문을 타인이 써 준 자. 기타 부정한 방법을 사용한 자들)를 빼 놓고
자신의 혼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 중에는 나 보다 더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꿈을 이룬 이도 있으리라. 나는 사이비를 제외한 그 분들을 마음 깊이 존경한다.

 달리 말하자면 서로 말 없이 존중 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국회 도서관 검색창만 활용하여도 학벌에 대한 거짓말은 쉽게 판별해 낼 수 있다.
그가 정말 주장하는 학교는 다녔는지 졸업은 하고 논문이나마 써 냈는지.
 불쌍한 영혼들 참 많다.
가우스 15-04-25 22:58
 
정도/사이비
혁명밀알 15-04-26 01:34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소인배들이 판을치는 곳에서 상제님 위대한 진리로
양아치들만 키우는 형국으로 보여집니다.
바람아구름아 15-04-26 08:28
 
꽃 피우는 나무는 그냥 피는 꽃이 아닌것 같습니다.
선유도 15-04-26 23:17
 
난 지금도 엇비슷하게 붙은 내 다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 일반 다리의 하중을 1/4 밖에 못 받는다.
 그 당시 걷기만 하면 되었고, 시간 ‧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하여, 나는 그냥 엇나간 채로 진이 나와서 붙은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조금만 무리하면 다리가 퉁퉁 부어오른다. 수술을 하지 않은 결과물이다. 최근에도 무리하면 여지없이 부어오르는 다리를 바라본다. 정말 분한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현포 15-04-29 21:36
 
못 배웠으면 어떠랴. 마음 아름다운 것이 최상이다.
 그렇다면 너는 왜 박사까지 공부했냐고 묻는다면 어느 cci-bal 池가
놈이 열 받게 한 것이 원인이다.
나는 딱히 이유랄 것도 없이 이 한 가지가 담백한 공부의 첫째 핑계였다.
내 정신은 수모를 당하면 달나라 까지 가서 내 생명을 걸고 갚아준다.
멜론 15-05-01 09:56
 
정신적인 아픔은 간혹 분노로 바뀌어서 나를 괴롭힌다.
인간의 이중성과 추악함, 교활함에 치를 떨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누구에게 조차 말 못하고 혼자 삭이면서 공부를 하는 심정은 육체를 더욱 아프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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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제 3장 위선의 탈을 벗어라 (3) 혁명역사위원회 06-25
258 제 3부 즉(卽)과 이(離)의 논쟁- 집착과 허무에 관하여 (3) 혁명역사위원회 06-25
257 제 2부 - .. (3) 혁명역사위원회 06-25
256 제 6장 결론 (1) 혁명역사위원회 06-10
255 제 5장 조직을 현실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 (2) 혁명역사위원회 06-10
254 제 4장 조직과 권력의 관계 -3 (2) 혁명역사위원회 04-30
253 제 4장 조직과 권력의 관계-2 (3) 혁명역사위원회 04-29
252 제 4장 조직과 권력의 관계-1 (3) 혁명역사위원회 04-28
251 제 3장 거꾸로 읽는 나의 인생 체험기 (7) 혁명역사위원회 04-25
250 제 2장 인간의 가치추구 (5) 혁명역사위원회 04-25
249 1장 서론 (6) 혁명역사위원회 04-25
248 혁명역사위원회 (26) 혁명역사위원회 04-21
247 혁명1 -조직 그리고 혁명- 이 어둠의 끝에도 희망은 있다. (14) 혁명역사위원회 04-24
246 노상균이가 나에게 한 질문에 대한 답변1 (8) 대마도 10-16
245 노상균 400만원 돌려주기 바란다. (13) 대마도 10-16
244 황극천자님의 독일 베를린 방문을 감축드립니다 (8) 이태백 09-12
243 니가 혁명을 아느냐? (4) 대마도 08-25
242 [담론에서]혁명동화, 피리부는 사나이와 딴전이(백의) (3) 가나다라 04-28
241 [담론에서]서나동 천자몽의 견전이 심보보소!!(백의) (2) 가나다라 04-28
240 밀알리스트는 어떻게 본부로 유출되었을까? (2) 제다이 04-22
239 종교의 절대적 속성과 현실의 상대적 속성 (2) 참외 04-03
238 절대성과 상대성의 조화, 자유민주주의의 위대성. 이에 도덕성을 상실한 ㅇㅇㅇ (1) 참외 04-03
237 08년 어느 날, 제이교의 책이 고물상으로 간 까닭 (가나다라) (2) 갑오혁명 03-18
236 추리극장, 아는 사람은 알지만 누가 가르쳐 주랴! 딴전이의 도수 연기 (가나다라) 갑오혁명 03-18
235 개벽마약중독 정신분열증에 대해서 (가나다라) 갑오혁명 03-18
234 이력서- 종교활동, 그 초라함에 대하여 (가나다라) 갑오혁명 03-14
233 기독교와 신불교의 순환논리 (묵향) 갑오혁명 03-14
232 현대과학으로 풀수없는 5가지 미스터리 - 사이언스지 선정 (예비밀알) 갑오혁명 03-16
231 지나간 역사- 2013년 교육관 인민재판식 장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대한늬스) 갑오혁명 03-16
230 경전무극상제 어천후 나온 10적판 도전(桃戰)-증산은 거짓상제이다 (대한늬스) (1) 갑오혁명 03-16
229 아이구 분해여~~~~~~~~~~~~ 아이구 분해여~~~~~~~~~ (저승사자) 갑오혁명 03-16
228 같은 도장 신도의 집에 해결사를 보내다 (무지개) 갑오혁명 03-16
227 교조 입천에 교주 명천이요 - 경전 입극천자 도통이요 (소향나무) 갑오혁명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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