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10<거울鏡>
어느 책에서 만난 이 한 구절이 인상적이다. 만고풍상을 다 겪은 듯 한 도가 트인 말이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여아손高會夫妻女兒孫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와 생강, 나물
가장 좋은 모임은 남편, 아내와 아들딸과 손자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들 딸 손자들과 만나는 것을 가장 좋은 모임이라 한 것이다. 세상 속에서 비로소 철이 들면 천륜의 모임을 최고로 친다. 철이 없을 때야 친구 따라 강남도 간다지만 철이 들면 달라진다. 인생 뭐 있나 싶어 세상을 떠돌아 보지만 결국 천륜의 소중함을 깨닫고 돌아온다. 유행가 가사처럼 파랑새 쫓아갔다 피앙새 되어 돌아오는 꼴이다.
도전을 읽다가 보면 만인경이라는 거울을 만난다. 죽어 저승을 가면 누구도 이 거울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는 바로 그 명경이다.
<지은 죄상을 만인경萬人鏡에 비추어 보면 제 죄를 제가 알게 되니 한탄한들 무엇하리,/ 죄는 남의 천륜天倫을 끊는 죄가 가장 크니라./ 유부녀를 범한 죄는 워낙 큰 죄이므로 내가 관계하지 아니하노라.>
만인경이란 무엇인가. 만인의 공통된 마음자리를 거울로 삼은 것이다. 여기에 내 삶을 비추어 보면 스스로 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천륜을 끊는 죄가 가장 큰 것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인류역사를 살다 간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천륜을 해한 죄를 가장 크게 문제 삼는 다는 말로 해석된다.
인간이 깨달은 생의 가장 소중한 궁극의 진리가 천륜이다. 인간의 역사가 이 천륜에 의해 이어지고, 덧없는 듯 한 인간 삶의 행복이 이 천륜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천륜을 해하는 것은 인간 행복의 근원을 끊어내는 일이므로 만인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얼굴을 종종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이건 어쩌면 부모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부도체 전류의 벽인지도 모른다. 상제님 말씀을 통해 부모와 자식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보자. 누가 감히 천륜의 만남을 방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최익현이 고종부자의 천륜을 해하였으므로 죽어서 죄가 되어 나에게 하소연 하는 것을 볼지어다. (도전개정9:103:2)
‘최익현이 고종부자의 천륜을 해하였다’는 것이 어떤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인지 도전 측주에 상세히 나와 있다. 펼쳐보자.
<측주 : 최익현은 대원군과 치열한 정쟁을 벌이던 명성황후의 후원을 얻어 잦은 상소로 대원군을 탄핵했다. 1873년 ‘계유상소癸酉上疏’는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대원군은 운현궁에 유폐되고 10여 년 동안 아들인 고종과 상면하지 못하였다.>
최익현이 올린 계유상소 때문에 대원군이 실각을 했고 그로 인해 대원군은 운현궁에 유폐되어 10여 년간 고종과 만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부모와 자식을 못 만나게 한 사건이 천륜을 해하는 일이 된 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 한다. 이것이 천륜의 지극한 즐거움이다. 이런 근원적인 행복을 방해할 권리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을 방해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도문에는 상제님의 이런 말씀에도 아랑곳없이 천륜을 향한 소송 질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스스로 도전 편찬자라 자부하는 종정님이 사위라는 사람의 어설픈 법적지식에 휘둘리는 것이다. 혁명위에서는 종정님께 스스로 잘못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거울을 만들어 올리지만 종정님은 사위라는 사람의 말만 듣고 도무지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한다. 종정님은 추한 자기 모습을 마주하기 싫어서 거울을 보지 않는 추남일까, 아님 종통에 눈이 멀어 거울을 볼 수 없는 장님일까.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종정님께서 젊음을 송두리째 상제님 사업에 바친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불철주야 책 편찬에 매두몰신 한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개벽이 한때 도문의 대박이었다. 분명 종정님의 저술 공덕으로 많은 인재들이 도문에 들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정님은 상제님 진리에 정통하지 못했다. 도전을 편찬했다고 자부하시는 분이 상제님 진리를 오직 개벽과 종통으로만 제한시켜버렸다. 옛 고사에 비추어 보면 ‘서자서아자아書自書我自我’한 격이다. 이로 인해 신도들의 무한한 창조성을 ‘들은 말만 반복하는 구관조’의 새 대가리로 전락시키고 만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창의적 인재가 길러질 턱이 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송 사태도 종정님께서 상제님 진리의 본질을 개벽과 종통으로 제한시키고 사위를 주장으로 하는 오적 십적을 가까이 함으로써 천륜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종통을 위해서 천륜을 이렇게 하찮게 내팽개쳐도 되는 것인가. 분명 천륜이 종통위에 있는 것이 만고의 진리이지만 종정님은 천륜이 종통 아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상식과도 맞지 않는 동토의 논리다.
종정님이 끊임없이 신도들 앞에서 종통을 주장하는 것은 어린 짓이다. 내 앞에 큰 감 놓으라고 떼쓰는 어린아이의 의식이다. 이 세상이 나를 위해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어찌 이 세상이 나를 위해 생겨났는가! 이런 태사부님 교육을 백 시간 천 시간을 받았지만 서나파에게만은 우이독경이다. 종통이라는 마구니가 뻥 뚫려있던 귓구녕을 틀어 막아버린 거다.
이에 비해 천륜이란 껄 벗어진 어른의 모습이다. 서정주님의 ‘국화 옆에서’의 시 한 대목처럼 먼먼 젊음의 뒤안길을 돌아와 거울 앞에선 누님 같은 꽃이다. 만고풍상을 다 겪고 비로소 깨달은 진리가 천륜이다. 아직도 가족과 천륜에 대한 의식이 전무하다면 껄 덜 벗어진 철부지 아이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부정님과 혁명가님을 출교시킨 것은 무슨 까닭인가. 태사부님 살아생전에는 혁명가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였고, 태사부님 선화 후에는 혁명가님을 부친 장례식에도 참석치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또 누구의 소행인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종정님 혼자서 증산도를 일구었다고 주장하고 싶었기 때문인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그나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종정님의 저술 공덕마저 깔아뭉개버리는 일이 돼버리고 만다. 남을 인정해야 나도 인정을 받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혼자서 이룬 일이 아니기에 천륜을 끊어내 독차지하려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도전 편찬자라 하시는 종정님은 상제님 말씀을 채록한 것을 놓고 상제님 일을 성사재인 한 것인 양 착각을 한다. ‘도를 전해 주었으니 너희들은 나를 받들어야 해’하고 말한다. 물론 위대한 업적을 남긴 건 분명하지만 대업을 이룬 것은 아니다. 대업을 이루어 나가는데 참고서 하나를 만들었을 뿐이다. 전체 상제님 대업을 놓고 보았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책이 있다고 해서 상제님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책을 만든 것은 여러 가지 일 중 하나인데 종정님은 이것을 가지고 종통 대권을 주장한다는 것이 곧 사리분별이 어두운 어리고 유치한 욕심이라는 말이다. 책머리는 책머리일 뿐 일머리가 아니다. 책이 모든 일을 하지 않는다. 사위의 법적지식을 이용해 혼자서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고 주장해 종통을 사수하고자 하지만 옆에서 바라보니 동상이몽이다. 사위는 종정님마저 법의 올가미를 씌워 끊어내고 증산도를 훔치려는 꿈을 꾸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세상에 천륜보다 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종통대권을 주장하기 이전에 천륜을 돌아보아야 한다. ‘먼저 사람이 되어라’하는 옛사람의 말이 틀린 바가 하나도 없다. 어린아이 의식 같은 종통으로는 우주일가를 이룰 수가 없다. 어른 된 천륜이라야 우주일가가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음은 <똑딱벌레님>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안경전 종정님께 올리는 글 입니다-사위 분과 혁명가님의 6월 5일 대질심문’에서 정리한 혁명가님의 천륜에 관한 말씀이다.
<혁명가님께서는 마지막 진술에서 사위 분에게 이런 말씀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1. 종교가 어찌 천륜에 앞설 수 있는가, 지금 니 놈은 태사부님의 공도를 운운하면서 종교를 팔고 있다.
2. 어찌 사위란 놈이 한 가정의 천륜을 끊어가면서 종교를 운운하는가. 제 아무리 종교라도 천륜과 가정에 절대로 우선하지 못한다. 종교 이전에 천륜이라는 가정이다.
3. 사위란 니 놈이 말하는 태사부님은 나의 부친이지 니 놈의 부친이 아니다. 감히 어디서 내 부친을 니놈이 공도를 운운하면서 팔아먹느냐.
4. 니 놈은 한 가정의 천륜을 이간하여 파괴한 놈이다. 천륜을 이간하는 것은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다. 어디서 태사부라는 내 아버지를 팔아먹느냐. 다 니 놈들이 산소 호흡기 꽃은 내 아버지를 자극 시키고, 내형과 나를 쫓아내기 위해서 벌인 자작극이다. 나와 내형을 출교 시킬 때 사위라는 니 놈도 그곳에 있었다. 어찌 생각하느냐. 엄격히 말해서 니 놈들이 내 아버지를 빨리 죽게 만든 환경을 조성한 원흉들이다.>
종정님께서는 종통이라는 망상을 똥통에 던져버려야 한다. 종통을 붙들고 있다가는 몸까지 따라서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놓으면 죽을 줄 알지만 그곳에 새로운 지평 천륜이 열린다. 인존시대에 사람의 삶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없애버려야 한다.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이 그랬다. 그가 하남성 혜림사에 머물고 있을 때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하루는 좌선을 하다가 겁나 추웠던 단하는 불당 제단에 놓인 불상을 내려다가 도끼로 패서 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다. 놀라 기겁한 원주가 달려와서 어쩌자고 부처님을 태우느냐고 꾸짖는다. 단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부처님을 태워서 사리를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사리가 나오지 않으면 부처님이 아닌 통나무에 지나지 않으니 태워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천륜이 해를 입고 있는데 무슨 종통의 우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가. 종통이란 혼 없이 말라비틀어진 막대기일 뿐이다. 단하소불丹霞燒佛처럼 종통이라는 우상을 도끼로 패서 불을 지펴 소송으로 얼어붙은 천륜을 살려야 할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올바른 상제님 신앙을 할 수 있다. 그래야 대도를 세상 속에 수립할 수가 있다.
종정님께서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때를 놓쳐버리면 만인경을 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진다. 만인경은 죽어서 보는 거울이 아닌가. 살아서 보는 거울은 혁명위에서 만들어 놓은 거울이다. 신앙을 했던 사람들의 회한의 마음자리가 어린 이 거울을 보아야 흐트러진 천륜을 바로 잡을 수가 있다. 그래야 만인경 앞에서의 통곡을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마뜩찮다면 상제님께서 내려주신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상제님께서 읽어 주신 도리원서야 말로 흐트러진 천륜을 회복시키고 가다듬을 수 있는 종정님의 거울이 되기에 충분하다. 도리원서를 개벽시간표라 한 김병선 성도님에게 내려주신 것이 마치 종정님 보령에 개벽을 걸어놓았다는 주장과 일치하니 이것은 종정님께 내려주신 상제님의 성언이라 해야 할 것이다. 김병선 성도님이 천 번을 읽었듯이 천 번은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의 주제인 천륜지락사天倫之樂事를 깨달아야 한다.
春夜宴桃李園序
夫天地者는 萬物之逆旅요 光陰者는 百代之過客이라
而浮生若夢하니 爲歡幾何오
古人秉燭夜遊는 良有以也로다
천지는 만물이 쉬어가는 숙소요 시간은 영원한 나그네라
인생이란 한바탕 꿈처럼 덧없으니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린들 얼마나 계속되리.
옛사람들이 촛불을 밝히고 밤에도 노닌 것은
참으로 뜻이 있음이로다.
況陽春召我以煙景하고 大塊假我以文章이라
會桃李之芳園하여 序天倫之樂事하니
群季俊秀는 皆爲惠連이어늘
吾人詠歌는 獨慙康樂이로다.
하물며 화창한 봄날이
아지랑이 황홀한 경치로 우릴 부르고
대자연은 아름다운 문장을 우리에게 빌려주었음에랴.
복사꽃 오얏꽃 핀 아름다운 동산에 모여
천륜의 즐거운 일을 글로 적으니
준수한 여러 아우들은 모두 혜련처럼 문장이 뛰어나거늘
내가 읇은 노래는 홀로 강락에 부끄럽구나.
幽賞未已에 高擔轉淸이라.
開瓊筵以坐花하니 飛羽觴而醉月하니
不有佳作이면 何伸雅懷리오.
如詩不成인데 罰依金谷酒數하리라.
그윽한 감상은 그치지 않고 고요한 얘기는 갈수록맑아지네.
화려한 연회를 열고 꽃 사이에 앉아
새 깃 모양 술잔을 날리며 달빛에 취하니
아름다운 문장이 있지 않다면 어찌 고상한 회포를 펴겠는가.
만일 시를 짓지 못할진대
벌주는 금곡의 술잔 수를 따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