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은 경험,체험을 바탕으로 내면에서 창조됩니다.
많은 체험들이 쌓여서 더 정교한 생각이 나오게 되고, 체험들속에서 다시 질문이 나오게 되고 질문은 다시 내면에서 정리되어 새롭게 창조됩니다.
우리들의 각자 개인들은 스스로가 자기를 창조 하게 됩니다. 자신이 창조한 것을 주체적 이념이라고 합니다. 주체적 이념의 확장을 수신의 시작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수신은 생각으로 시작됩니다. 타인이 만들어 놓은 생각의 창조물은 객체적 이념인데 그 가치관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때 규칙으로 정해지고, 공동의 이념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 규칙을 깰 때 당사자들은 사고와 재앙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공동의 이념이 시간을 지나면서 서서히 바뀌어 지는 경우도 있고, 또 몇천년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공동의 가치관이 상황변화에 따라서 점차 바뀌어지게도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수신은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으로 창조되어 더 위대한 가치관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창조되어 이루어진 가치관을 주체주의라고 합니다.
주체주의는 능동적 주체주의와 종속적 주체주의로 나눌수 있는데,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사람은 생각도 부지런해서 질문하고 답하는 창조적인 능동적 주체주의와 남들이 만들어놓은 이념과 가치관에 편승해서 가는 종속적 주체주의로 나눌수 있습니다.
능동적 주체주의를 진보적이라 하고, 종속적 주체주의를 보수적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제껏 사부님이 만들어놓은 상제님 말씀의 해석을 편안하게 믿고 받들고 살아왔습니다.
사부님의 해석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사부님의 개인적인 해석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문제 의식없이 이제껏 살아왔는데, 세월이 지나서 우리들의 경험이 풍부해지고 새로운 가치관들이 정립되면서 도전의 말씀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이 사부님의 종속적 주체주의자로 살아오면서 편안하게 신앙하다가, 세상을 살아보니 능동적 주체주의자로 점차 바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부님이 쓰신 도전은 개인적인 사적인 도전이란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떠한 해석도 좋지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진주이고, 자신이 종통이고, 자신이 천자라는 것으로 해석을 해놓은 것입니다. 말이 들어서야 일이 된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입니다. 결국 말이들어서 망한 것입니다.
사부님이 비틀어 놓은 상제님 말씀들은 지금 혁명을 꿈꾸고 있는 일꾼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습니다. 상제님 말씀을 사부님 개인을 우상화시키는 제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더러운 심법이 느껴지는 순간 사부님의 명예는 하루 아침에 실추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사부님의 사적인 해석을 전면 배격하며, 종속적 주체자에서 탈피하고 일꾼 전부가 능동적 주체주의자로서 상제님 말씀을 재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틀린 해석이더라도 마음대로, 하고 싶은대로 해보는 것입니다. 단, ‘내가 누구다’ 라는 것만 하지 않으면 될것입니다. 개개인의 창의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깊게 궁구해보면 새로운 해석들이 분명 쏟아져 나올것입니다.
참된 법은 능동적 주체주의자로부터 나오게 되고, 누구나가 꺼림없이 자신이 생각하고 경험한대로 느낀 깨달음을 말하고 기술하다보면 진법의 보물들이 쌓여져 갈 것입니다.
이런 창의적인 해석이 쌓이고 쌓여져 진법의 문화가 탄생하여 세상사람들이 상제님의 진면목을 알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 합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내마음대로 생각이 가는대로 편하게 능동적 주체주의자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상제님의 천하사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줄임말로 이해하고 확신하는데, 상제님 천지공사가 천하통일의 천하사가 되다보니까 결론적으로 천하사란 말씀이 가장많이 등장하게 되고, 모든 초점이 과정을 생략하는 착시 효과를 느끼게 됩니다. 천하사는 모사재천하는 상제님의 종합적 어휘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사재인으로 풀지 않고 모사재천의 상제님입장이 되어서 해석을 하다보니까
시작과 중간과정인 ‘수신제가치국’을 다 생략해버리는 모순을 범하게 된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개벽을 이야기하고 거기다가 시한부 종말설까지 붙여서 많은 신앙인들을 방황하게 만들고 때만 기다리는 바보로 만든 것입니다. 유치했던 리더와 그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사재인의 입장에서 천하사天下事라고 부르지 않고 수신사修身事 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렇게 부르다보면 일의 선후를 잘 인식할수 있게 되고 성급한 마음과 붕뜬 거품의 종말적 마인드가 사라지리라고 봅니다.
“모사재천은 천하사이고 성사재인은 수신사이다.”
“모사재천은 천하사이고 성사재인은 수신사이다.”
“모사재천은 천하사이고 성사재인은 수신사이다.”
태사부님의 음성이 생각납니다. ~이상~~
수신속에 평천하의 그림은 벌써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나는 수신의 창조적 과정이 없다면
결코 평천하는 이룰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을 거꾸로 하기 때문에 답이 생각이 안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수신에 화두를 두고 차근차근 계획하여 실천해 나간다면 상제님의 평천하도 어렵지 않게 이룰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제까지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포교도 자연스럽게 순리적으로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억지주장으로 순서없이 하다보니 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육임을 짜라고 이야기 하지만 지금은 육임을 짤수 없는 상황입니다. 또 짠다고 해도 곧 붕괴되어 버립니다. 일의 순서를 뒤죽박죽 만들어 놓고 무슨 육임얘기가 나올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환단고기 역사 콘서트도 접어야 합니다.
일의 순서를 모르는 사부님은 정신차리셔야 합니다. 사부님은 정말 프로는 아닙니다. 빨리 장가나 가서 행복하게 사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으시고 산과 더불어서 산삼이나 캐고 산더덕이나 구워먹으면서 자연과 벗삼아 기타치며 노래부르면서 사위와 십적들과 오순도순하게 소통하면서 살아보는 것이 남아 행락의 극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단, 산에서 하지말아야 할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산적두목”입니다.
올바른 수신의 시작은 있는 그대로 현상황을 직시하고 대처해나가는 것이며, 어둠에서 밝음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말과 행위가 일치되는, 거짓이 없는, 마음을 속이지 않는 내마음의 평화가 자리잡아야 합니다.
혁명의 장에는 모든 것을 가식없이 보여주는 것이며, 거칠게 질문도 해보며, 비판도 해봐야 합니다. 거기에서 답을 얻어야 할것입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안되는 것이며, 정심을 바탕으로해서 결과물을 스스로가 능동적 주체주의자가 되어서 얻어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