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뭐땜시 워째서 성경을 우롱하는가?
회유와 협박, 불안과 공포, 물질적 축복의 갈구 등을 통해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들은(어쩌면 거의 대다수이지만), 진리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자신의 부족분을 채우는 것으로만 만족하기 쉽다. 불안한 사람은 평화로우면 그만이고, 몸이 아픈 사람은 마음의 위안을 얻으면 그만이고, 빈궁한 자신의 신에게 부를 가져다 달라고 기도를 드리며 위안을 얻으면서 더 이상 진전이 없는 상태로 거기에서 안주하고 마는 것이다. 안주하고 만족하는 순간, 치열한 과정을 통해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의심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 의심 자체가 불필요한 상태에 머물게 되어버린다. 이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의심하지 않는 신앙, 의심 없는 믿음! 언뜻 강고한 신앙인의 자세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복제품일 따름이다.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보아도 도대체 의심 없이 믿음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맹신이 아니지 않는가! 한참 지적인 활동이 왕성할 청소년들에게 반복적인 찬양을 시키면서, 사고하고 의심할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교회교육이다. 사회를 개혁하고 이웃을 섬기는 복잡하고 불편한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회의해야 할 성인들에게, 단순하기 짝이 없는 교회 포스터 쪼가리 따위로 "그대는 구원받았다!"며 마취시키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기본 패턴인 것이다.
신학대학의 많은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 교회의 많은 신자들도 조금만 자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처음 기독교를 접하고 당연히 회의를 갖지 않는가? 그런데 그들이 종래 어떻게 변해가는가? 기독교가 지난 2천년 동안 회의하는 지성과 자의식을 잠재웠다. 그래서 의구심, 회의, 지적 호기심을 죄악시 하기 위해 "성령을 의심하지 마라"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이 믿는 신의 전지 전능이 부족해 결국 마귀나 사탄까지 동원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거의 세뇌의 기술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반복적인 행위와 반복적인 억압, 동류의식 그리고 죄의식의 주입해서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신의 뜻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으니 그냥 믿어 버려라"라는 주장을 흔히 한다. 정녕 믿음이 그런 것인가? 답이 나오지 않은 것을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 것인가? 그것이 확신인가? 그것이 신앙인가? 믿음으로 얻는 진리, 그것이 무슨 구구단인가? 그렇다면, 무당이 섬기는 신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으니 그냥 믿어버리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치열하고 처절한 의심의 터널에서 헤매보지 않고서 쉽사리 얻을 수 있는 진리 따위가 있겠는가? 있다 한들, 혹시 광신자의 싸구려 진리가 아니겠는가? 종교와 학문을 착각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실 분께서도 계시겠지만, 철저하게 믿음의 복종만 강요하는 한국 기독교는 비난 받아야만 한다. 기독교에 뭐 대단한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사기만 치지 말라는 거다.
목사들 자신 역시 신학교에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딴판인 신학을 배웠다. 기독교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이 죄악이라면, 신학 따위 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왜 신학생들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워야 하는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보기 위함이다. 만약 목사의 조건으로 믿음이 우선이라면 광신자를 목사로 세우는 것이 낫다. 그러나, 그런 광신자의 관점으로는 신자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낼 수가 없다. 그런데, 목사들은 신학교에서 제대로 된 신학을 배우고서는, 주일날 강단에 서서는 신도들에게 엉뚱한 설교를 하는 것이다. 한국의 목사들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신학을 배우고서도 신자들에게 맹신과 광신을 요구하고 있다.
제발 거짓을 가르치지 말자. 믿기지 않아도 믿으면 알 수 있다고 사기 치면서 사람 바보 만들지 말라. 그리고 의심하는 자에게 질문을 허락하라! 손 붙잡고 시험에 들었다는 둥, 기도하자는 둥, 의심을 가지게 된 사람을 자신과 똑같은 바보로 끌어내리지 마라.
기독교인 되기 쉽다고 한다. 일단 믿으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무조건 믿는 자세, 즉 맹신하는 믿음은 어린이들의 태도에 불과 할 뿐이다. 하기야 기독교인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최고로 평가한다. 이러니 말이 통하는가? 어쨌든, 그 믿음, 혹은 믿는다는 착각, 혹은 진실에 대한 외면 속에서 스스로 도취되어가고 자기방어 집단 합리화와 끊임없는 동어반복! 신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든 적이 없다. 상식과 지식과 몸과 영혼을 모두 내던져 부딪히면서 치열하게 자연에게 도전하면서 삶의 난제들에 대한 숨은 해답을 찾아가는, 그런 의심 많은 진정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길 기대한다. 필자는 그러한 점에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재조명해 보도록 자료를 올린 것 이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조금의 의구심이라도 생긴다면 필자는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그러나 성경의 모순을 이야기 하고자 하면 읽기 전부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끝까지 읽지 못하고 중도에서 내팽개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념은 그 벽이 두터워 깨뜨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관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꽁꽁 얽어 메어 버리기 때문에 꼼짝달싹 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관념을 깨뜨리고 나면 우물 속에서만 살던 개구리가 지상으로 뛰어 나오듯이 지금까지 살아온 틈 바구니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세상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세상은 지혜로운 세계이며 무지에서 해방되어 인간 본연의 권위를 되찾는 세계이다. 관념을 헐고 타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누리도록 하라. 만약 지금까지 지녀온 관념을 소중하게 여기어 관념을 깨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끝까지 독파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그 관념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독파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내 팽개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필시 패배자 이거나 낙오자일 뿐이지 결코 승리자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합리적인 이성 앞에 무릎을 꿇은 맹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흔히 감성(느낌 또는 영감)으로 읽어야 한다고 기독교인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진리는 만인이 공유할 수 있어야만 진리일수 있는 것이다. 성경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성경은 더욱 더 감성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을 감성으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는 2천년간이나 기반을 닦은 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2천년간 철학과 사색을 통해 기반이 닦인 종교가 기독교라고는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기독교 치하에서 정상적인 비판이 용인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가? 긴 탄압의 터널을 지난 기독교 역사는 서구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 짧은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만 판을 칠뿐이다.
물론, 성경에는 고린도 전서13장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같이 훌륭한 구절도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의 한쪽 편에는 여성을 비하하는 구절도 함께 공존한다. 성경에는 훌륭한 말씀과 함께, 한쪽 구석에는 배타성과 인종차별, 성차별등과 수많은 사악한 것들이 함께 공존한다. 목사들은 그 중에서 그럴듯한 구절들만을 끄집어내서 설교를 할 뿐이다.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성경을 파헤치지 않는 한 그들의 광신행위는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광신자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성경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에서는 아직까지도 모세오경이 모세에 의해 쓰여졌다고 가르쳐주는 마당이니, 우리가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어야만 한다. 이제, 기독교인들에게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함께 손잡고 공존할 수 있는 여유, 오류를 개선할 용기, 진실을 구별할 줄 아는 지식과, 진실 아님을 고발할 배짱이 요구되고 있다.
이제부터 언급할 사실들은 기독교인들을 시험하는 악마의 속삭임도 아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성경을 보라. 객관적인 시각에서 여러분의 신을 보라. 그리고 기독교와 성경이 형성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냉담히 보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의심이 생겼다면, 그것은 한 명의 진정한 인간으로 가기 위한 위대한 첫걸음이다.
성직자들은 성경으로 교인들을 우롱한다. 자신의 노예로 삼기 위해......
그러나 이제부터 필자는 성경을 우롱할 것이다. 여러분들을 성경의 문자 속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여러분은 성경의 문자에서 자유로워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