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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5-16 13:14
6.25와 나의 어머니
 글쓴이 : 현포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우리 삼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로 씌어 주셨다.먹을 것이 없던 우리는 개천에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호박잎을 너무따서 호박이 자라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어머니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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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 글 속의 “어머니”는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가 되십니다. 


[출처] 나그네 - 박목월|작성자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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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1 15-05-16 13:39
 
짜안 하니 막걸리 생각나는 글 아니것습니까~
만사지 15-05-16 15:05
 
흰 백발의 박동규 교수, 어눌한 말투에 담긴 예전 티뷰 인터뷰 내용을 떠올리니 어느 분인지
알 것 같습니다. 감동입니다.
선유도 15-05-16 16:09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 -목월에게>
     
등대 15-05-16 18:06
 
나그네라는 시에 대한 조지훈의 답시군요
그때그모습 15-05-16 17:18
 
-내 머리를 껴안고<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하시며 우셨다.
천권, 만권의 책 보다 이 환경 하나로 역경을 이겨내는 힘이 생겼으리 봅니다
명유리 15-05-16 18:17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도망간 아저씨는 죽을 때까지 양심가책을 느꼈을텐데요
사오리 15-05-16 18:45
 
배고프면 달라붙었다가 배부르면 떠나 버리고, 따뜻하면 재빨리 다가왔
다가 추워지면 가버리니, 이것이 세상 인정의 병폐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마땅히 냉철하고 객관적인 안목을 길러야 하고, 삼가
강직한 기질을 간직하여 경거망동하지 않아야 한다.
꿈이였어 15-05-16 20:39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혁명밀알 15-05-17 12:09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빈병 15-05-17 15:19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눈물나는 물물교환인데 이 쌀을 또 잃어 버렸고. ;;;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하시며 우셨다
만사지 15-05-17 20:54
 
갈림길에 섯을 때 그 어릴적 스크래치가 평생 악몽으로도 남았을 수 있었겠습니다.
전쟁통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천만이라 하니 그 비극이야 오죽헸겠습니까
산백초 15-05-18 20:17
 
눈물겨운 우리의 과거입니다.
정수리헬기장 15-05-18 21:33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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