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보民報』의 창간과 함께 찾아온 일희일비一喜一悲
쑨원이 혁명을 진행하면서 얻어가는 결실이 있는 만큼 그에 반反하는 세력들도 출몰하면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먼저 쑨원은 1896년 영국대영박물관에서 삼민주의 뼈대를 세웠노라고 고백을 한 이후 1905년에 이르러서야 그 개념을 처음 세상에 알리게 된다.
동맹회는 1905년 11월 26일에 『민보民報』라는 월간 기관지를 창간했다. 쑨원은 이 창간호에 머리말을 쓰면서, 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내놓았다. 시프린 교수에 따르면, 쑨원에게 민생주의는 사실상 사회주의를 의미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표시하기 위해 민생이라는 고전적 용어를 사용했다”고 그는 썼다. 다시 시프린 교수에 따르면, 머리말은 쑨원의 이름으로 쓰였으나 실제로는 그의 심복인 후한민胡漢民이 썼다고 한다.
쑨원은 곧이어 이듬해 『혁명방략革命方略』이라는 책을 출판하게 된다. 작은 소책자로 구성된 이 책 내용의 골간은 3년간의 군정軍政 단계 그리고 6년간의 훈정訓正 단계를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헌정憲政 단계에 들어가는 ‘입헌정부수립 3단계론’을 제시했다. 이러한 쑨원의 3단계 제시는 조선독립투쟁을 하는 독립 운동가들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주게 된다.
쑨원의 사상이 무르익을 즈음에 동맹회는 또 다른 내부문제가 터져 나오면서 분열에 휩싸이게 된다. 더불어 일본의 태도가 급격하게 변화되는 조짐을 보인 것이다.
우선 회원들의 사고방식이나 기질이 달랐으며, 어떤 수구적 회원들은 민생주의 또는 평균지권론平均地權論에 대해 수긍하지 않았다. 그래서 때때로 분파운동이 벌어지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쑨원을 상대로 배척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쑨원은 민생주의라든가 평균지권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도 했다. 동맹회는 외부의 공격에도 시달려야 했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및 그의 지지자들로 이루어지는 개혁파는 기관지 『신민총보新民叢報』를 통해, 동맹회의 혁명론에 따라 무장혁명을 일으키면 중국은 내란에 시달리게 되고 반드시 외세의 간섭을 불러온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일본은 1905년 청•일 전쟁에서 강대국 러시아를 물리치고 승리한 후 제국주의 반열에 당당하게 올라서게 된다. 일본이 초기 쑨원을 이용가치의 대상으로 생각해서 그를 귀빈대접을 했지만 이제 전쟁에서 승리하고 중국 침략자의 위치에 선 이상 중국혁명가들은 이용가치가 떨어지게 됐다.
그래서 1905년 말부터 1907년 초 사이에, 일본에 유학하면서 혁명운동에 가담하거나 동조한 중국 학생활동가들을 출국시켰고, 1907년 초에는 많은 돈을 주어 쑨원조차 출국시켰다. 그래도 쑨원과 동맹회 동지들의 기는 꺾이지 않았다. 우선 그는 화교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남아시아국가들을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1909년 5월에는 네 번째 세계여행길에 올라, 혁명의 대의를 선전하고 아울러 혁명자금의 모금에 힘썼다.
쑨원의 무장봉기와 서태후의 죽음
쑨원과 그의 동료들은 이제 중국 지역에 무장봉기를 유도하게 된다. 1906년 12월 장시성 핑상현과 후난성 류양현 및 리링현 세 곳의 앞 글자를 따서 흔히 ‘핑류리 기의起義’라고 불리는 이 무장봉기에 이어 산발적으로 무장 봉기가 전국에서 뒤 따라 일어나게 된다.
이중 가장 뜻 깊었던 것은 쑨원과 황싱이 주도한 1911년 4월 광둥성의 성도 광저우에서 추진한 ‘황허강 기의’로 불리는 무장봉기였다. 물론 이 무장봉기는 실패했지만 호리가와 데쓰오는 『쑨원: 구국의 정열과 중국혁명』(1973)에서 일반백성들에게 희망과 혁명에 대한 열기를 최대한 고조시켰고 기운을 높였다고 평가했다. 이 과정에서 동맹회는 점점 중국의 신흥부르주아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성장했다.
쑨원의 혁명이 무장봉기로 전환됨에 따라서 청조는 사실상 무기력에 빠져든다. 이때 서태후는 1901년 ‘신정新政’을 발표한 이후 나름대로 1905년 ‘입헌대강立憲大綱’을 발표할 계획을 밝혔으며, 1906년에는 ‘예비입헌豫備立憲’을 선포했고, 1908년에는 ‘흠정헌법대강 欽定憲法대강’을 반포했다. 그러나 흠정헌법이란 것 자체가 군주가 단독적인 의사로 제정하는 법을 의미한다.
서태후의 이러한 계략은 결국 청조가 서태후만을 위한 전제군주제 정치에서 헌법의 체제 아래서 헌법이 통제하는 정치방법인 입헌군주제로 전환할 뜻이 있음을 내비친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계획된 위장전술이었다. 서태후는 헌법제정기간을 9년으로 정해 실제로는 입헌의 뜻이 없음을 드러냈다.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로 대표되는 이른바 입헌파는 입헌군주제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 1908년 서태후 장례 모습(좌) 과 말년의 서태후(우)
1908년 11월 25일 ‘독사와 같이 교활하면서도 잔인한 권력자’인 서태후가 73세로 죽게 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죽기 하루 전날 자신의 정적으로 자신이 유폐 시켰던 조카 광서제를 독살했다. 이에 따라 생후 30개월 된 푸이溥儀가 제 12대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 푸이의 친 아버지인 짜이펑(좌) 1945년 소련군 장교와 함께 선 푸이(중간)
워낙 무능한 푸이의 아버지가 섭정을 하게 되고, 청조의 운명과 수명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에 혁명가들은 크게 고무되었고 사실이 섭정통치의 무능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망해가는 청조말의 분위기는 황권을 둘러싸고 황족들이 발호가 극심해져 갔고, 조정의 고위직들도 자주 바뀌었다.
이들의 무능은 결국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 일을 하게 되는데 1911년 5월 재정이 궁핍해지고 파탄지경에 이르자 외세에게 두 개의 중요한 철도를 팔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들은 이 결정으로 인해서 향후 피를 부르는 무장투쟁 운동이 전개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