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조직의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는 혁명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과정 중에 일희일비一喜一悲 가 뒤따른다. 국가와 민족, 조직, 제도, 종교혁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명가들이 나타났다. 이들 혁명가들은 우리 앞에 반드시 혁명에 성공한 세력과 실패한 세력으로 양분되어 모습을 드러낸다. 당대에 성공한 혁명세력은 새로운 왕조를 세웠거나 기존 왕조를 이어 받았고, 실패한 혁명 세력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혁명의 성패에 관한 본질과 목적을 당대의 역사법칙으로는 절대평가해서는 안되고, 평가 되어 질 수 도 없다. 적어도 수십 년에서 백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야 하나의 혁명이 일어난 원인과 동기가 드러나고 그 본질과 목적에 관한 진실여부의 가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당대의 혁명이 비록 성공했을지라도 얼마 가지 못해서 혁명세력이 재차 무너진 경우도 있었고, 당대의 혁명이 비록 실패했거나 실패 한 듯 보였을지라도 그 불씨가 살아나서 완벽한 혁명에 성공한 경우가 근대와 현대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실존적 역사 무대인 장場이기 때문이다.
쑨원의 본질적 혁명은 민주가 아닌 민생으로 둔갑된 사회주의이다.
쑨원의 삼민주의 중에서 민생民生이란 뜻은 공산 •사회주의에서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평등사상과도 그 맥락을 같이하고 대의적으로는 그 해석의 본질에 합당하다. 그러나 해석의 본질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맥락이 있다. 그것은 바로 쑨원이 살아 있을 때 처한 중국의 국내외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쑨원이 오늘 날 까지 ‘국부로 추앙’받는 이유를 제대로 깨닫게 될 것이다.
서태후가 대륙을 독단적 권력으로 움직였을 때 거대 중국을 움직인 법률은 ‘서태후를 위한 법률’이었을 뿐이다. 비록 청나라를 움직인 법률이 백성을 위해 존재했을지라도 그 법은 엄격히 ‘서태후와 권력자들을 위한 사문화된 법’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에 의해서 전개된 변법자강운동變法自疆運動인 개혁으로 촉발된다.
변법자강운동이란 부패한 권력에 대한 정치개혁이요. 권력 가진 자들이 온갖 혜택을 받으면서 관료로 등용되는 교육이요. 서태후 황족을 중심으로 한 법질서 체계에 대한 일체의 도전이요, 개혁운동이었다. 비록 “100일 천하”로 끝난 운동이지만 쑨원이 혁명을 일으키는데 크게 일조한 하나의 초석이요. 쑨원 혁명의 역사적 사건과 깊은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외눈박이 눈으로 쑨원의 혁명을 바라보지 마라.
▲ 동맹회에서 1905년 11월 26일 창간한 기관지 민보와 쑨원
이제 쑨원의 역사혁명 장으로 들어가서 그 본질을 바라보기로 하자. 쑨원이 혁명에 관한 의식을 본격적으로 가진 것은 1887년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홍수전에 관하여 깊은 연구를 한 시점이다. 이후 7년이 지난 1894년 11월 하와이에서 흥중회라는 비밀결사조직을 만들면서 혁명의 본질에 관한 서막이 드러나게 된다.
흥중회興中會란 ‘중국을 부흥 시킨다’는 아주 평범한 뜻이지만 그 내면의 본질이 “청조에 반대한다는 뜻”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청조에 반대한다는 혁명의 본질적 역사인식이 어느 날 갑자기 쑨원의 머릿속에서 나타난 혁명의 논리는 결코 아니다. 쑨원이 홍수전을 연구하던 시점인 1887년부터 11년이 지난 1905년에 비로소 중국동맹회를 창설하고 월간 기관지인 『민보民報』를 창간하게 된 것과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혁명가는 스스로 출몰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법칙에 의해서 세상이 동요되고 부패된 세상일 때 멸망하기 전조의 필연적 구제사명救濟使命 역할을 하기위해서 나타나는 인물이다.
쑨원이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국내외의 상황을 바라보자. 그가 1866년에 태어났을 때는 아편전쟁으로 몰락한 중국에 항거하여 홍수전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이 겨우 2년 지난 시점이다. 외부적으로는 프랑스, 영국, 러시아, 미국 등의 침탈행위가 있었다. 그렇다면 열강제국들이 침탈행위를 벌인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바람 앞에 촛불처럼 힘없는 청나라가 된 근본원인은 장기간에 걸쳐 부패하고 무능한 서태후와 그 관료들에게 있었다. 만일 그들 체제를 전복 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열강제국들에게 민족자체가 동화되거나 지도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홍수전의 1864년까지 진행된 태평천국의 난과 캉유웨이, 량치차오의 1898년 변법자강운동은 결국 혁명가 쑨원에게 동맹회에서 월간 『민보』라는 기관지를 창간하게 만든 정신적 구동력이 됐다.
쑨원이 주창한 민생이 비록 사회주의 성격이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 던져진 ‘민생이란 바둑돌’은 민주가 아닌 사회주의 성격을 띤 필연적인 선택일 수밖에는 없었다. 먼저 프랑스, 미국, 영국들로 대표되는 민주 열강세력이 침탈한 것이 주요한 원인제공을 한 것이다. 쑨원이 태어나기 불과 6년 전 일어난 제 2차 아편전쟁(1856-1860)시기에 중국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대와 싸울 때 러시아가 슬며시 끼어들었던 원인도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 시대환경에서 쑨원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황족 사회에서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 국민적 역량 자체도 없었거니와 보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관료들이 정권을 장악할 시점이다.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과 변법자강이 실패한 원인도 결국 힘없는 청나라 정권이 단독으로 그들을 제압한 것이 아니다. 그 ‘난亂’을 평정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관료들이 군대와 자본을 주었고 서태후는 이에 힘을 얻어 재 쿠데타를 일으켜 장악한 사건을 보면 그 시대환경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개념으로 쑨원을 이해한다면 그는 오늘 날 거대 공산주의 국가로 남아 있는 중국을 건설한 원초적인 이념가요, 공산주의 교주이다. 그가 주창한 민생이 사회주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쑨원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 ‘민생’이란 개념이 만일 민주적인 이론에 머물렀다면 이 급진적인 선택은 실패했을 것이다. 그 만큼 황족체제에서 지배받았던 백성들의 사고방식이 빠른 시간에 문명개화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방법으로 백성들을 교화 시키는 것은 총칼로 위협하면서 지옥사자를 방불케 하는 수많은 살해행위를 통하여 만드는 공산•사회주의 국가일 뿐이다. 이와 더불어 본다면 쑨원 이후에 벌어진 장개석과 모택동의 혈전에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간 것을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하는가.
쑨원이 던져 놓은 3화점 바둑 돌
▲ 노동절 중국 북경 천안문 광장앞에 모인 인파와 쑨원 사진 (좌) 대만 국부기념관 정원의 쑨원 동상(우)
쑨원은 바둑판에 민주•민생•민권이라는 사회주의 이념과 민주주의 이념이 혼합된 바둑돌을 교묘하게 올려놓고 그 선택의 핵심인 3 화점의 시비대상을 뿌려 놓았다. 그리고 새로운 혁명가들에게 바둑돌을 선택할 권한을 넘겨 버린 것이다.
이제 오늘 날 중국 본토인 대륙과 대만에서 쑨원을 동시에 ‘국부’로 추대하는 이유를 알겠는가. 현대의 대륙 중국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자본주의 길을 걷고 인권을 부르짖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떳떳한 이유는 그 이면에 쑨원의 삼민주의 ‘바둑 돌’이 있기에 행위 자체가 정당한 것이다. 대만은 물론 침묵만 해도 국가의 정통성이나 정당성에 전혀 손상을 받지 않는다.
이와 같이 볼 때 그 어떤 국가일지라도 이념의 근간과 뿌리를 제공한 국가의 교주가 없이는 역사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하물며 종교에서 진리의 뿌리를 제공한 교주를 멸살하고 혁명한다는 행위는 정당성과 정통성이 없기에 역사법칙에 위배되는 행위이다. 지구상에서 정당성과 정통성이 없는 국가나 종교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 허무한 역사를 만드는 주역들은 결국 정통성과 정당성의 부재로 말미암아 궤멸 당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역사의 필연적인 인과 법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