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체류 후 일본에 도착한 쑨원 중산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기 시작
약 10개월간 영국에 체류하면서 삼민주의 뼈대를 세웠던 쑨원은 캐나다를 거쳐 1897년 8월 일본에 도착했다. 원래는 홍콩에서 혁명 사업을 시작하려고 계획했지만 홍콩당국이 그의 입국을 거부했기에 일본을 혁명의 전초기지로 삼기로 작정했다.
쑨원은 이때 31살의 젊은이였고 영국 런던에서 좋은 평판이 있었기에 일본사회에서 생각하는 인식도 호의적이었다.
▲ 좌로부터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더구나 서양제국주의에 맞서려면 아시아가 일본의 깃발 아래 단결해야 한다는 대아시아주의大亞細亞主義를 따르는 일본의 지도자들은 그의 활용가치를 인정했다. 그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그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등과 같은 일본정계의 거물급 지도자들로부터 정치적, 재정적 지원을 받기에 이르렀다. 크게 고무된 쑨원은 혁명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기 시작했다. 대체로 이 시점에 그는 나카야마 사코노中山樵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그 후 중산을 자신의 자字처럼 썼다.
일본에 망명한 캉유웨이, 량치차오와 대립했던 쑨원
청•일 전쟁의 패배와 서태후의 섭정으로 청조가 망국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 때 조장 안팎에서는 자연스럽게 「개혁론」이 제기됐다. 이 개혁론의 선구자는 캉유웨이康有爲와 그의 제자인 량치차오梁啓超이다.
이 둘은 중국이 일본처럼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법을 고쳐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변법자강운동을 전개했는데, 광서제는 1898년 무술년戊戌年에 그들의 헌책을 받아들여 이른바 무술변법을 시작했다. 그러나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파는 무술변법이 시작된 때로부터 1백일 만에 쿠데타로써 개혁운동을 좌절시켰다. 이것을 무술정변이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광서제는 궁중에 유폐됐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쑨원은 일본에서 우선 캉유웨이가 이끌던 보황회保皇會와 싸웠으며, 캉유웨이가 캐나다로 가버린 뒤에는 량치차오와 대립했다.
쑨원이 이 둘과 싸웠고 추구한 것은 청조의 타도를 통하여 민국民國을 수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의화단 義和團 사건과 8개국 연합군의 전쟁
▲ 반 기독교 운동을 벌이고 반청 운동의 선두에 섰던 의화단
중국의 대내외적 상황은 서태후와 군신의 보신정치 그리고 청•일 전쟁의 패배와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강대국의 이권쟁탈로 인하여 청조의 멸망이 임박했다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외세의 중국침탈에 분개해 1899년 의화단이 중국북부를 중심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을 시작했다.
의화단이 북부를 중심으로 일어난 것은 로마 가톨릭 선교활동이 왕성한 산둥 성 북부지역에서 1898년 4월부터 “부청멸양”의 구호를 내걸고 시작된 것이다. 외세를 배격하자는 의화단이 출몰하자 고무된 청 조정의 서태후는 1900년 6월 열강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다. 곧이어 의화단이 베이징으로 진격해 외국 공관을 포위 공격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독일 등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입해 55일 만에 공사관원들을 구출해 냈다.
▲ 의화단 병사를 효수하는 독일군. 이 당시 일본 및 대부분의 연합국은 의화단을 본보기로 효수에 처했다.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는 열강에 ‘베이징의정서’라는 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에 의거해서 청의 배상금이 눈덩어리처럼 불어나서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는 계기가 된다.
필리핀 독립 운동가들과 제휴 및 이홍장을 활용할 비밀공작활동
이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에 독립 운동가들이 무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때 쑨원은 이들 독립 운동가들과도 손을 잡는 정책을 취한다. 쑨원이 손을 잡았던 희망사항은 이들이 만일 독립전쟁에 승리한다면 중국의 혁명가들이 필리핀에 혁명 기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필리핀의 독립 운동가들은 비록 무력투쟁의 독립운동에는 실패했지만 전쟁자금에서 남은 돈 가운데 꽤 넉넉한 돈을 쑨원에게 주었다. 그는 이 돈으로 자신의 동지들로 하여금 홍콩에서 『중국일보』를 창간하게 된다.
위화단 사건으로 청조가 거액의 배상금으로 인해 고통 받을 시점 쑨원은 홍콩 총독과 긴밀히 음모를 진행한다. 광둥과 광시 두 성을 관할하는 총독으로 집무했던 이홍장을 설득해서 이 두 성을 독립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처음에 이홍장은 관심을 분명한 보였지만 조정에서 이홍장을 의화단 사건 마무리를 위해 열강과 협상 주역으로 내세우고 핵심 직위인 즈리성 총독으로 다시 임명하자 북상의 길을 선택했다.
이제 쑨원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으로 건너가 프랑스당국에 자신의 혁명계획을 설명한 후 프랑스 당국이 도와서 성사된다면 프랑스에 많은 이권을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거부당했다. 쑨원은 이 당시만 해도 풍운아처럼 각 나라를 떠돌면서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 할 때이다. 각 열강들은 자국의 이권을 위해서 오히려 쑨원을 적당한 선에서 이용했지만 쑨원의 활동반경은 은밀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그 범위를 넓혀가면서 민국을 설립할 역사의 시간을 저울질 하고 있었다.
쑨원이 건설하려는 민국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