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 전쟁 시기의 중국 국내 상황
▲ 제 9대 함풍제와(좌) 제 10 함풍제의 후궁인 서태후가 낳은 아들인 동치제 (우)
청나라는 1894-95년에 일본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 당시 중국을 통치하던 황제는 9대 함풍제와 함풍제의 외아들 10대 동치제의 뒤를 이어 제 11대 광서제가 재위(1874-1908)할 시기이다. 그러나 국정의 모든 실권은 서태후가 장악하고 있을 때이다.
▲ 4살 배기의 어린 광서제
서태후는 함풍제의 후궁으로 동치제를 낳았기에 동치제의 즉위와 더불어 서태후로 불리며 동치제의 섭정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동치제가 18세에 천연두로 죽자 서태후는 누이동생의 아들인 갓 세 살 된 아기를 광서제로 즉위 시키고 재차 섭정을 하게 된다.
1887년 광서제가 16세가 되었을 때 친정을 시작했으나 실권은 여전히 서태후가 쥐고 국정을 농단 했다. 그녀의 섭정기로 인하여 청국은 갈수록 망국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청•일 전쟁으로 인한 일본의 중국 독식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3국 견제
서태후가 섭정하던 시기 중국은 외세의 침략과 강탈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는 무력한 종이호랑이 대국이었다. 오죽하면 청•일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 러시아의 외교관인 청국주재러시아공사관 공사 카시니 백작이 “중국에서는 무엇인가 필요할 때 그것을 달라고 말한 다음에 그냥 가져버리면 그만이다.”라고 조롱을 퍼부었겠는가. 이와 동시에 광저우에 주재하던 영국의 부영사도 중국을 “젖이 풍부하게 나오면서 살코기도 많은 큼직한 암소”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무능한 중국이 청•일 전쟁에 대패하자 일본은 시모노세키에서 패전국 청나라와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한 뒤 일본 돈으로 3억 2천만 엔의 전쟁 배상금을 뜯어냈다. 이 당시 청나라 돈으로 2억 냥에 해당하는 돈이고, 청나라의 3년분 세출예산인 동시에 일본정부의 4년분 세출 예산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일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펑후다오澎湖島와 타이완 및 요동반도를 할양받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의 야심은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이른바 3국 간섭으로 좌절됐다. 앞에서 인용한 영국부영사의 표현을 빌리건대, 중국이라는 큼직한 암소로부터 여러 나라가 젖을 계속 짜내려면 모두 제 몫만 챙겨야 했다 그런데도 일본이 독점하려는 욕심을 보였기에 젖을 함께 나누려는 다른 강대국들이 견제했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상황이 너무나 비참해지자 국민들의 배의의식과 혁명사상이 강렬해졌다.
청나라의 전쟁패배로 영국에서 싹튼 쑨원의 삼민주의 정신
1895년 전쟁 패배로 청국의 위신이 심각하게 깎여진 것을 본 쑨원은 이것을 청조를 타도할 기회로 보고 홍콩으로 가서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더불어 홍콩에서 흥중회 지부를 설립하는데 성공했다. 흥중회의 목표는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국을 회복하며 공화국을 창립 한다”는 것이다.
쑨원은 광저우 봉기를 위해서 거사자금을 혁명 동지들과 함께 투여했고, 그 중 한 혁명동지는 오늘날까지도 타이완의 중화민국 국기로 쓰이고 있는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를 도안했다. 이들은 1895년 10월 26일 거사계획을 세웠지만 경찰이 이들의 움직임을 파악해서 대처했기에 실패 했다. 쑨원은 거사가 실패하자 일본으로 다행히 망명했고 29세인 이 때부터 1911년까지 무려 16년간의 긴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일본에 잠시 머문 쑨원은 하와이로 건너갔다가 디음 해인 1896년 가을에 영국 수도 런던으로 갔다. 영국으로 간 이유는 서의서원의 은사 캔틀리 교수가 영국유학을 강력히 권했기 때문이다.
▲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IS 에 잡혀 선전물로 이용되고 있는 영국 사진기자 존 캔틀리(중간)는 쑨원(우측)의 목숨을 구해준 제임스 캔틀리가 증조부이다.
그러나 쑨원은 부주의하게도 영국주재청국공사관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가 이미 그의 신원을 파악하고 기다리던 공사관원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다행히 캔틀리 교수가 영국의 외무부를 개입시켜 석방될 수 있었으며, 이 과정이 영국언론에 상세히 보도돼 쑨원은 “중국의 혁명가”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더구나 그의 짧은 자서전과 더불어 피랍기도 출판돼 그는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게 됐다. 크게 고무된 그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청조를 타도하도록 도와주면 자신이 구성할 새 정부는 그 서양 국가들과 협력해 중국에 새로운 민주 국가를 세울 것임을 약속했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물론 유럽의 어느 나라도 움직이지 않았다.
크게 실망한 쑨원은 대영박물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영국의 정치현실에 눈뜨게 된다. 이 당시 영국은 의회민주주의를 운영하면서 사회주의를 일정부분 흡수하여 사회보장정책을 쓰고 있었으며, 그 이면에는 노동당이 노동계급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영국 정치의 현실에 자극을 받았다. 이러한 영국의 국내 정치현실에 관한 독서를 통하여 쑨원은 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로 구성되는 삼민주의 뼈대와 골간을 세우게 됐다고 훗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