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 말기에 태어난 쑨원의 사상적 배경
쑨원은 1866년 11월 12일 중국 남부지방인 광둥성廣東省 주장珠江 삼각주에 위치한 샹산현香山縣인 농촌에서 태어났다. 청조 제 10대 동치제同治帝(재위1861 -74) 때였다. 쑨원이 태어난 광둥성이라는 지역은 그가 태어난 시기와 맞물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장래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 광둥성 중산에 있는 쑨원의 생가. 보수를 거쳐서 깨끗하게 단장 되었다.
쑨원이 태어난 광둥성은 반골적 기질이 강했다. 이곳은 만주족이 한족의 명나라를 무너뜨리던 때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성이다. 만주족이 청조를 세운 뒤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장악한 때로부터 6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광둥 출신의 한족 홍수전은 1850년에 반란을 일으켜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세우고 난징南京을 수도로 정하면서 1864년까지 14년 동안 ‘천왕’으로 군림했다. 그는 관군에게 토벌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자살, 혹은 병사라고도 알려졌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관군은 무덤을 파헤쳐 시신이 그의 것임을 확인한 뒤 불태워 버렸다.
광둥 샹산현 삼각주 일대가 반골기질이 강한 이유는 무엇인가
쑨원이 태어난 샹산현 삼각주는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 인이 1517년 도착한다. 이후 유럽의 해양국가 들과 중국 사이에는 이 삼각주를 중심으로 무역거래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연계점 구실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서구 유럽의 해양국가 들로부터 기독교를 접하는 동시에 교역에도 서서히 눈을 뜨게 된다.
샹산은 특히 그 일부인 마카오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예수교 선교사들의 거점 지역이었다. 이 당시 예수교 선교사들이 드나드는 곳에는 반드시 서양식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더불어 풍부한 물자교류가 이루어진 까닭에 외국회사의 대리인을 맡은 매판상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쑨원은 자연스럽게 서양인 특히 선교사들이 만든 기독교 학교를 다니게 된다. 중국의 국내 정세는 아편전쟁의 패전으로부터 24년이 지난 시점이고, 홍수전의 반란이 진압 된지 불과 2년 뒤의 시점이다. 쑨원이 태어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혁명가 홍수전을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쑨원은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시골 마을치고는 부자 집 환경에 속했다는 일설도 있고, 무척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부자 집 환경에서 자랐다는 주장은 쑨원이 13세인 1879년 하와이로 가서 영국계 학교와 미국계 학교를 차례로 다녔다는 근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쑨원이 외국계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하와이에 먼저 이주해서 정착한 맏형이 도왔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난한 농가의 아들이라 차라리 하와이에 자리를 잡은 맏형에게 가서 배우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20대 전반기 쑨원의 성장과정
▲ 홍콩 의학원 시절의 쑨원.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쑨원
1887년 21세가 된 쑨원은 홍콩으로 가서 현재의 홍콩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서의서원西醫書院에서 의학을 공부한다. 이 당시 중국에서는 서양의 의과대학에 해당되는 학교를 ‘서원’이라고 불렀다. 이 서의서원은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중국인이 세운 의과대학으로, 교수진에 스코틀랜드 의사가 포함돼 있었다.
쑨원이 26세가 된 1892년 이 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임스 캔틀리James Cantlie라는 교장이 쑨원을 각별하게 아끼고 지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학교가 홍콩법률에 의하면 ‘홍콩일반의료위원회’의 기준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판정을 받았기에 의사면허로 개업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쑨원은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결합시킨 중서약국中西藥局을 여는 것으로 일단 인생의 탈출구로 삼았다.
쑨원이 꿈꾸는 혁명은 상하이 선진 개혁가 정관잉鄭觀應을 만나면서 시작
쑨원이 비록 의과공부를 했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의과 공부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의과대학생 시절에도 홍수전을 깊게 연구했고 정치적인 야망을 갖고 있었다. 시기적으로는 서양제국주의 침탈이 노골적으로 진행될 때이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새로운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을 때이다. 쑨원은 일본과 같이 신문물을 중국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 선진 개혁가 정관잉(좌) 1869년 건축된 정관의 고택
잠시 중서약국을 운영하다가 28세 때인 1894년 상하이로 가서 개혁적이고 선진적 학자인 정관잉鄭觀應을 만났다. 정관잉은 샹산 출신의 매판으로 1880년 이래로 개혁을 부르짖는 글들을 발표해왔던 인물이다. 그의 글은 주로 서양의 지식을 전파하는데 주력했고 서양이 중국보다 앞선 것이 과학과 지식의 발달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 지식을 전파하는데 주력한 중국어 월간지 『만국공보萬國公報』를 후원해온 사람이다.
혁명을 꿈꾸면서 흥중회를 조직하는 쑨원
정관잉의 개혁사상에 감명을 받은 쑨원은 중국에서 개혁할 대상을 연구한 결과 먼저 중국은 농업과 자원 활용에 커다란 진보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른다. 이러한 개혁안을 들고 최고 권려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홍장李鴻章을 만나러 톈진까지 찾아갔지만 만날 수 가 없었다.
▲ 광서제의 부친 순친왕(가운데)과 자리를 함께한 이홍장(우측)
이 당시 이홍장이 청일전쟁에 몰두해 있을 때인지라 쑨원은 자신의 개혁안을 『만국공보』에 발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8세의 쑨원은 비록 이홍장을 만나지 못했지만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꺾을 위인은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1894년 11월 하와이로 가서 비밀결사 조직인 ‘흥중회興中會’를 결성한다.
흥중회란 중국을 부흥 시킨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썩어빠진 청조에 반대한다는 뜻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흥중회의 회원들은 전부 홍수전과 쑨원이 태어난 광둥성 출신이고 그 가운데 최하층 계급이 거의 대다수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