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9 <갓冠>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다. 그림을 그려서 가져왔다. 제목을 가족이라 써놓았다. 화면의 중심에 엄마 아빠를 그렸다. 엄마가 아빠보다 조금 더 크다. 아이는 엄마가 아빠보다 조금 더 힘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키로 따지자면 아빠가 조금 더 큰데 말이다. 사실 우리 집 대장은 엄마가 맞다. 이것을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의 순수함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순수함 속에는 유치함도 함께 공존을 한다. 아이들은 원근법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자신의 심리나 좋고 싫어한 것에 따라 크기와 배치가 달라진다. 이것이 유아 그림의 특징이다. 나이를 먹어도 미술에 재능이 없으면 원근법을 터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유치원 다닐 때 미술상에 입상을 한 것은 미술재능과 하등 관계가 없다. 유아들의 그림은 원근법을 적용해 심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만 미술에 재능이 없는 우리 아이에게만 적용된 얘기일지 모른다.
우리 도운사를 돌아보면 믿는 사람의 심리에 따라 진리를 해석한 경향이 짙다. 마치 유아 그림처럼 원근법을 무시한다. 화면의 중심에는 상제님께서 기다리지 말라는 개벽을 배치해 놓았다. 그리고 가장 크게 그렸다. 그 바탕에는 종통을 깔아놓았다. 다른 중요한 내용은 워낙 작게 그려놓아 어지간한 눈으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이 그림을 보면 상제님 일의 우선순위에서 개벽이 마치 영순위처럼 보이는 착시를 일으킨다.
사오미를 잘못 해석해 개벽만 외치는 모습은 마치 부모가 하지 말라는 짓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어린아이 같다. 클 땐 다 부모의 잔소리를 듣는다. 다 그렇게 큰다. 마음은 순수하지만 아직 정신이 유치하기 때문이다. 매를 들어 이런 유치함을 고치려고 고집을 부리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지켜보는 부모도 있다. 상제님 태모님께서는 이 성장의 과정을 그대로 두고 보셨다. 어릴 땐 어린 짓을 해서 유치한 기운 다 빠져야 한다. 그래야 어른이 되어서 어른스런 짓을 한다.
그림의 원근법처럼 우리가 성사재인하는 상제님 진리는 일머리가 있어야 한다. 일머리가 툭 터져서 일을 해야 시행착오가 줄어들고 신속하고 정확하게 일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상제님 말씀을 보자.
<大學에 ‘物有本末하고 事有終始하니 知所先後면 則近道矣리라. 其本이 亂而末治者否矣며 其所厚者에 薄이오 而其所薄者에 厚하리 未之有也니라’>
만물에는 본말이 있고 일에는 시종이 있으니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가릴 줄 알면 도에 가까우니라. 그 근본이 어지럽고서 끝이 다스려지는 자는 없으며 후하게 할 것에 박하게 하고 박하게 할 것에 후하게 할 자는 없느니라.<증산도 도전 8:19>
일머리란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가릴 줄 아는 지혜다. 상제님께서는 이것이 되어야 상제님의 모사재천의 대명을 역사 속에 성사재인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원근감 있게 그린 그림은 먼 곳과 가까운 곳이 구분이 된다. 진리의 그림이 원근감 있게 그려지면 먼저 갈 곳과 나중 갈 곳을 누구도 다 알게 되는 것이다. 천리의 먼 길도 내가 서 있는 발 앞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먼 곳을 욕심 때문에 가깝게 그려 놓았으니 모두가 조급하기만 했지 일은 되지 않았다. 먼 곳이 가깝게 보이니 불고가사에 목숨 걸었다가 다른 소중한 것들을 죄다 놓쳐버렸다. 가족과 이웃과 친구와 그 외 여러 가지의 중요한 것들을.
아닌 게 아니라 말은 겁나 화려했다. 말은 늘 종말신앙을 경계했다. ‘저놈들 어찌 근심이 없을까’라는 장 제목이 붙어있는 도전 8편 18장을 보자. 상제님 말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루는 비가 내리니 성도들이 앉아 있다가 졸음을 참지 못하고 낮잠을 자거늘/ 상제님께서 이를 보시고 호연에게 “저놈들 잠을 자게 할까, 어쩔까?”하시니/ 호연이 “아이고, 왜 그래요? 내버려 두세요!”하고 만류하니라./ 상제님께서 “저놈들 어째 근심이 없을까?”하시니 호연이 “근심은 무슨 근심이요?”하거늘/ 말씀하시기를 “여기를 오려면 노자도 있어야 하고, 또 제 집에 들어가 먹고살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 일을 생각하면 무슨 연구를 한들 저렇게 잠이 와?/ 가만 둬서는 못쓴다, 가서 눈구녕에 불을 질러야지.”하시며/ 성냥불을 콧구멍에 갖다 대시고 또 눈썹도 그스시니 곤히 자던 성도들이 화들짝 놀라 일어나니라.>
이 말씀에 측주를 붙여놓았다. <어찌 근심이 없을까>를 끌어내어 주석을 달았다. 이 주석을 보면 개벽을 희망적인 것이라 주장하는 듯이 보인다. 개벽은 희망이고 종말은 절망이라는 말인가.
<이는 철저한 문제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도에 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천지부모의 뜻을 성취하는 천하사 일꾼으로서 나태하고 무책임한 태도로 도업에 임하는 묵은 정신과 허상에 빠진 종말신앙을 경계하신 것이다.>
말은 겁나 화려하게 해놓았는데 너무 추상적이라 핵심이 무엇인지 비켜서 나간다. ‘무책임한 태도로 도업에 임하는 묵은 정신’이라는 대목은 개벽타령의 연장선인 종통타령이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허상에 빠진 종말신앙’이라는 말과 서로 호응을 하는 듯하지만 서로 모순이다. 개벽을 끊임없이 강조해놓고 이제 종말신앙을 경계한다는 것은 창과 방패를 파는 가게주인의 심법이다. 종말신앙과 개벽신앙의 차이가 무엇인지 묻고 싶어진다. 이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은 아마도 이순신님의 난법일기 속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SNS 난법일기 24- 천하사는 통일문화이다>에서 이 말씀의 참뜻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상제님께서는 먹고사는 가사 일에 충실하고, 종말론, 도통 병에 빠져있는 성도들을 항상 경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성구 상동) 상제님께서는 종말론 및 도통병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혼구녕을 내셨습니다. 종말설과 도통을 얘기한 장본인도 상제님이지만 먹고사는 일에 더 충실하라고 당부하신 분도 상제님이십니다. 상제님 재세 시에도 현실을 망각하고 도통병에 걸린 사람들은 어쩌지 못했나 봅니다.>
필자가 혁명초기 혁명가님께 문자 하나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짬 사태로 모든 것이 어수선해지고 힘들 때였다. ‘혁명가님, 제가 아무런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혁명가님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열심히 사는 것이 혁명입니다.’ 혁명가님의 이 한마디 말씀 속에서 일의 지소선후에 대한 일면을 볼 수가 있었다.
선후에 맞게 일을 해야 일이 이루어진다. 자동차를 수리할 때 먼저 조립해야 할 것을 깜박 잊고 나중에 할 것을 먼저 조립했다면 일이 마무리 되지 않는다. 다시 분해하여 재조립을 해야 한다. 숙련된 정비공은 이런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지만 초보자는 늘 이런 문제 때문에 정비 시간이 표준 시간을 늘 초과하는 것이다. 선후를 살피는 것이 중요한 건 이 때문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특히 육체를 갖고 사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녹을 확보하지도 않고 오직 개벽으로 통일천하를 꿈꾸는 것은 공산주의와 같은 점령군이 될 꿈을 꾸는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 이후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이유로 지주와 부자들을 무차별하게 처단해 버린 그 역사를 보라. 상제님의 도성덕립은 개벽으로 이 세상을 점령하여 공포정치로 이루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상생의 탈을 쓰고 상극을 자행한 서나파의 도정은, 만약 개벽이 되어 천지대권을 검어 쥔다면 이런 점령군이 될 싹이 농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인함열해야 할 권리를 갖고 있는 인류를 위하여 혁명하여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글머리는 있지만 일머리는 부족한 듯싶다. 사부님의 보령은 이미 회갑을 넘어섰다. 그러나 여적 원근감 없이, 일머리 없이 상제님 진리를 해석하고 있다. 일머리는 나이에 비례해 생기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 도정경영의 유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성숙한 도정이 나온다는 관왕도수의 호패와 갓은 사람의 나이에 붙이지 않으신 게 분명하다. ‘남아 15세면 호패를 차나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하신 상제님 말씀을 사부님의 천지도수 산술법인 10곱하기 5에 맞추어 보아도 이것은 나이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데 이상하다. 이 성구가 초판도전에는 있었는데 개정판 도전에는 아무리 찾아도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호패라는 검색어로 인터넷을 찾아보았더니, 조선시대 호패는 16세부터 찼다고 나온다. 아마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아서 중간에 누군가가 잡부 자작했다고 생각해 빼버린 것일 수도 있다. 개정판도전이 나올 당시로 돌아가 보면, 역사적 사실에 맞게 16세로 고치자니 사부님 보령 50에 맞추어 놓은 도수해석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아 이건 상제님 말씀이 아니다’라고 단정 짓고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부님 당신의 역사에 맞지 않으면 아니라고 단정하고 빼거나 다른 말로 바꿔버린 말씀이 어디 이것뿐이던가.
인터넷을 더 뒤져보면 대순에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들여다 볼 수 있다. 대순에서는 15세를 조철제의 나이 15세라 주장한다. 허무맹랑함이 극을 치닫는다.
1909년 4월 28일 당시 15세였던 조철제가 창원역에서 신의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는데 그 기차가 대전의 신탄진을 지날 때에 상제님께서 미리 마중 나와 보고 계시다가 보고 ‘남아 15세면 호패를 차나니 무슨 일인들 못하리오.’하며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조철제가 천명을 받드는 50년 공부를 이때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이 조철제가 종통을 계승했다는 유력한 증거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이상호 이정립도 빼버린 이 성구를 증산도 초판도전에 기록해 놓은 것은 워낙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싣지 않을 수 없다며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증산도 초판도전에는 1909년이 아니라 병오년 4월 28일로 되어있다. 15를 오십으로 확대 해석해 실었다가 호패를 16세에 찬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맞지 않아 빼버린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인데 대순의 그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십오 수란 한 개인의 나이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미성숙한 도정은 어디가 되었든 숫자를 자신의 나이에 꿰맞추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16세에 호패를 차는데 15세라 한 것은 이것이 사람의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숙한 어른 도정이 나오는 것을 십오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상제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 일머리를 갖춘 사람이 나와 상제님 진리를 정법으로 집행 할 것이다.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의 선후가 바로 서서 시행착오만 거듭하는 아마추어 도정을 매듭지을 것이다. 진정 상제님 천하사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혁명과업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성사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