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본문비평에 쓰이는 구약의 사본들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LXX)은 하나의 통일된 번역이라기 보다는 번역 기술이나 히브리어 지식이나 문체 등에 있어서 서로 매우 다른 여러 사람의 번역들을 모은 것으로 보인다. 70인역은 욥기는 히브리어 사본보다 6분의 1정도 짧으며, 예레미야서는 히브리어 사본보다 8분의 1정도 짧고 그 순서도 서로 다르게 되어있다. 내용 또한 많은 부분이 잘못 번역 되었는데, 70 인 역에 의하면 창조의 시점 이 1195 년이나 당겨져 있고 '무드셀라'가 '노아'의 홍수가 나고도 14 년이나 계속 살아 남은 것으로 계산 된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구약성경이 70인역이었다. 그들은 70인역 성경에서 기독교에 유리한 내용을 찾아내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기독교적인 내용들을 덧붙이게 되었다. 카톨릭백과사전은 70인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70 인 역을 채택 하였다. 70 인 역은 히브리 원본과 달랐다. 몇 권의 책과 구절들이 더 추가 되었을 뿐 아니라.....(중략)....... 부분적으로 번역의 실수가 있었고....(중략)..... 더구나 70 인들은 유대 랍비들이 쓰는 것과는 다른 히브리 경전을 토대로 번역하는 바람에...." [카톨릭백과사전 vii, 316]
"70 인 역은 믿을 바가 못 되니 제 멋대로 번역되고 변조 되었으며....(중략)....따라서 교회에 의해서 거부 되었다"
[카톨릭 백과사전 iv, 625]
이에 반발하여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구약으로 증거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경전을 위조했다고 기독교인들을 배격했으며, AD 2세기 경에 히브리 본문에 맞도록 새로운 희랍어 역본을 만들었다. 2세기초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아퀼라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위조한 70인역의 구약의 메시야 관련 위조부분을 히브리 원전에 맞게 번역함으로 아퀼라역(a')이라는 헬라어 축어적 역본을 만들었고, 2세기 말엽 심마쿠스는 아퀼라의 축어역과 달리 히브리적 표현을 없애고 순수한 헬라어를 사용한 의역본을 내놓았다. 이 외에도 레오도티온역, 역자가 알려지지 않은 다른 세 개의 역본이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구약을 위조했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AD 230~24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Origen)은 6500쪽이 넘도록 각 쪽에 여섯 란을 두고서 그 때 구할 수 있던 히브리 성경, 그것의 발음을 헬라어로 바꾸어 적은 것, 아퀼라 번역본, 심마쿠스 번역본, 70인역, 레오도티온 판을 각각 적어 넣어 서로 비교하도록 하는 헥사플라(Hexapla)를 편찬했다. 오리겐은 히브리원문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인들이 70인역을 위조한다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의 논쟁을 적당히 무마시키기 위해서 이 6가지 본문을 비교하면서, 그 나름대로 다섯 번째 란의 70인역을 새롭게 수정했다.
이 70인역이 나중에는 헥사플라와는 따로 떨어져서 그것만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이것을 70인역의 헥사플라 개정판(BHK의 GH) 또는 오리게네스 70인역(BHS의 GO)이라고 부른다. 그 뒤로도 70인역은 그 나름대로 여러 가지 개정판 사본이 생겨났다.
70인역의 가장 중요한 사본으로는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을 들 수 있다. 오늘 우리가 70인역을 연구하려고 할 때는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70인역 사본들을 비교하여 만들어 놓은 비평 판 헬라성경으로는 1931년부터 나오고 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괴팅겐에서 나오는 것과 1935년에 간단하게 나온 랄프스의 것의 둘을 본다. 괴팅겐의 70인역은 여러 사본을 비교하여 가장 원본에 가까와 보이는 본문을 재건한 것이고, 랄프스 70인역은 70인역 사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5) 페쉬타(Peshitta)
시리아 정교회가 전수해왔으며 '페쉬타'라고 일컬어지는 시리아어역 성경의 기원에 대하여는 정확한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페쉬타가 칠십인역에서 번역된 것이라고 주장하나 페쉬타가 반영하고 있는 본문이 마소라 본문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거나 근접하는 것으로 보아 페쉬타는 AD 2~3세기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한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페쉬타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AD 5세기의 것이 있고, 나머지는 5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기록된 사본들이다.
(6) 아람어 탈굼(Targum)
바벨론 유수 이후 회당에서는 성경을 낭독한 다음 히브리어보다 상용어(常用語)인 아람어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위해 아람어로 해설해 주었다. BC 2세기에 이르러 이런 구두 해석이 정교해지고 고정화되어 전승되면서 문서화 되게 된다. 여기서 탈굼이라는 아람어 역본이 등장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탈굼은 오경, 예언서, 성문서집 등이다. '타르구밈'(탈굼의 복수형)이라고도 불리는 탈굼은 그 형태가 아주 다양하다. 모세 오경만의 아람어 역본을 두고 볼 때, 비교적 문자적 번역만을 시도한 온켈로스의 탈굼이 있는 반면, 일명 '가짜 요나탄 탈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탈굼'은 온갖 주석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나중에 아람어 역시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아람어도 히브리어와 같은 운명을 겪었다.
(7) 라틴어 역본(Latin Vulgate)
라틴어로 성경이 처음 번역된 것은 2세기 말엽 북아프리카에서였고, 3세기 경에는 유럽에서도 기독교 공동체가 발전하고 헬라어에 대한 지식이 보편화되면서 유럽개정판이 만들어졌다. 어거스틴은 "신앙의 초기에 희랍어 사본을 우연히 입수한 자가 스스로 두 가지 언어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번역에 뛰어 들었다"라며 당시의 무분별한 번역에 대해 말했는데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역본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역본들은 문학적 언어가 아닌 지방어나 투박한 평민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역본들을 통틀어 고대 라틴어역이라고 부른다. 무절제한 수정이 본문의 와전을 더해 나가며 혼란을 일으켰다. 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대 라틴어 역본의 한계와 불완전성을 로마교회의 지도자들이 인식하게 되었고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는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오늘날 제롬으로 알려져 있음)에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을 요청한다. 제롬은 383년 복음서를 먼저 번역하여 405년에 번역을 완성하였다. 제롬의 역본은 이후 수 세기 동안 그 가치가 인정되어 결국 서방 기독교 국가 전역에서 받아 들여져서 공통적인 (vulgata : '대중적인'이 라는 뜻도 있음)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라틴어 사본도 오늘날 약 8,000개정도 있으며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제롬의 라틴어 번역본 역시 오늘날 원본이 없는 실정이다. 원래 성경에는 장(章)의 구분이 없었는데, 13세기에 스테판 랑튼이 라틴 번역에다 장을 구분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 역본은 로마 교회의 공인 본문이 되어 교회 용어 뿐만 아니라 라틴어가 로만스어로 발전하는 과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롬의 역본 역시 전달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와전되었고 원형을 되찾으려는 또 다른 수많은 수정 본이 만들어 졌다. 트렌트 공의회 (1546년)의 결정에 따라 교황 클레멘스 8세 때(1592년)에 당시 수집 가능한 모든 사본을 모아 수정본을 만들었는데 이 수정본이 현재 로마 교회의 공인본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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