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왕실재산에 대한 사고방식
16세기부터 형성된 궁방전은 17세기부터 민전의 침탈 및 운영과정 상의 문제점을 드러내며 사회 개혁논의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반계 유형원과 같은 실학자뿐만 아니라 정부 역시도 궁방전의 문제를 직시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개선방안을 제시하고 시행하였다. 하지만 궁방전의 문제는 지속되었으며 19세기 초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체 남아있게 되었다. 이에 다산 역시도 문제를 간과하지 않고 자신의 저술을 통하여 궁방전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었으며, 그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산의 궁방전 개혁안의 공통적인 특징은 전면적인 개혁이 아닌 운영상 에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에 있다. 궁방의 수취는 면세를 인정하되 그 징세는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거두어 궁방에 지급하는 관수관급을 지향하였으며, 세액은 대체로 민인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것이었다. 또한 수세를 국가에서 담당함으로써 중간 수취인인 도장과 차인은 필요하지 않게 되므로 이들이 일으키는 폐해를 원칙적으로 근절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지방 수령・아전들의 지나친 과징은 다른 세목을 대체하는 용도로 사용하여 중앙・ 지방 재정, 그리고 납세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개선하도록 하였으며, 궁방전에 부여되는 면역의 특혜 역시 지방관이 주의를 기울여 폐단이 없도록 하였다. 결국 궁방전의 운영이라는 커다란 틀은 부정하지 않고서 문제가 되는 점만을 개선하여 원활한 운영을 꾀한 것이었다. 이러한 다산의 궁방전 운영 개선정책은 이전의 개혁안과는 다르고, 정조대 시행되었던 개혁 정책과는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먼저 다산의 궁방전에 대한 개혁안을 이전의 개혁안, 특히 왕실 소유토지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었던 반계 유형원의 개혁안과 비교해보 도록 하겠다. 반계 유형원의 토지 개혁론 핵심은 공전제를 통하여 토지소유의 모순을 해결하자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다산이 閭田制 혹은 정전제로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역시 토지 소유 관계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하였다는 점과 비슷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왕족의 경제적 기반을 위한 왕실 소유지를 인정한다는 점, 수취는 국가 기구가 직접 집행한다는 점 역시도 반계와 다산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궁방전 즉 왕실 소유지에 대한 개혁논의에 있어서는 분명 차이점이 있다. 반계는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공전제 아래에서 왕실 구성원에게 공전・사세전을 분급하여 재정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는 기존의 궁방전 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즉 공전제하에서 궁방전이라는 별도의 토지제도는 불필요하며, 공전제를 기반으로 하여 지급되는 공전과 사세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산의 경우는 달랐다. 기존의 왕실에서 토지를 분급 받는 궁방전 제도와 이에 대한 면세조치까지 인정하였다. 다만 그 수취방식을 정전제의 틀 안에서 집행하고자 한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반계는 급진적인 개혁을, 다산은 점진적인 개혁을 지향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반계의 토지개혁론이 지주 전호제의 청산을 통한 국가 세수입의 증대와 농민생활의 향상, 그리고 농병일치제적 군사제도의 실현 등을 목적으로 두고 있는데 비해, 다산의 토지 개혁론은 반계의 논의를 넘어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권한의 강화와 이를 위한 재정의 중앙집중화 목적이 더 강화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다산의 궁방전 개혁안에도 드러난다. 즉 다산의 궁방전 개혁안이 반계에 비하여 소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산이 궁방전의 존재를 인정한 체 이를 근간으로 하는 국왕권의 강화를 의식하였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정조의 개혁정책과 다산의 개혁안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다. 필자는 다산의 개혁안이 정조가 즉위년부터 단행하였던 일련의 개혁조치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조 역시도 궁방전의 폐해는 인정하였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폐지가 아닌 개선의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다산과 정조의 공통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우선 왕실재정의 공공성 확보가 있다. 다산이 제시한 정전제 자체가 국가 중심의 농지개혁이라는 점에서 다산의 공공성 강조는 두말 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다산은 궁방전의 경우 궁방의 개별적 수조가 가능하였던 절수제의 폐지와 호조를 중심으로 수취체계를 일원화하는 궁방전의 개혁을 주장 하였는데, 이는 결국 사적인 토지점탈을 막고, 국가의 재정운영에 궁방전을 포함시키는 조치였다. 정조 역시도 왕실 재정을 공적 영역으로 포섭하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궁방전에 대한 출세를 조치하면서 내수사・궁방 토지수입의 85%정도를 호조를 통해 공급하게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정조는 출세 조치 이후 宮稅를 公稅로 인식하면서 궁방의 재정을 공적인 것으로 규정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내수사・궁방에서 파견하는 도장・궁차 등의 파견을 중지하고 그 권한을 감사와 수령에게 넘긴 조치도 다산과 정조 개혁안이 상통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다산과 정조의 궁방전 개혁에 대한 공통점이라 한다면 지나치게 확장된 궁방 재정을 감축하는데 있다.
먼저 다산은 궁방의 절수를 통한 무분별한 궁방전의 확장을 막고자 「을해정식」 이전 설치된 궁방전에 대한 절수제 역시도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절수제를 혁파하자는 내용이었다. 또한 영조 대 편찬된 均役事目과 속대전의 규정 을 다시 언급하였는데, 이를 어기는 것은 백성의 원망을 만드는 일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다산은 기존의 규정을 다시 확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수세의 개혁안으로 토지 생산량에 대한 구일세를 광범위하게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구일세의 적용은 사실상 민간의 입장에서 잉여생산물에 확보에 이득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동시에 궁방의 입장에서 재정의 감소를 일으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했을 것이다. 정조도 다수의 면세결을 출세 조치함으로써 비대해진 궁방의 재정을 축소시키는 정책을 펼쳐 나갔는데 이 역시 다산의 개혁안과 공통 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궁방전에 대한 다산과 정조의 개혁은 궁방전 운영의 안정화를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궁방전의 공공성 확보는 개별・분산적으로 운영되던 궁방전에 통일된 규정을 제공함으로써 일반민에 대한 피해를 근절하고, 수취의 안정화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일관되게 비판 받아오던 왕실의 사재 운영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왕실의 사적재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궁방전의 무분별한 확대를 막고 긴축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산과 정조의 궁방전에 대한 공공성의 부여와 절감 정책은 궁방전을 지속적이며 항시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산이 원하였던 것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안정되게 궁방전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궁방전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왕권의 안정 및 강화를 지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다산의 궁방전 개혁안은 이전 토지문제에만 집중하여 논의되어 왔던 것과는 다르게 다산 자신의 정치적인 이념이 투영되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다산의 궁방전 개혁안은 이전 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당대의 현실을 적용하며,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관철시킬 수 있는 방향의 개혁안을 만들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다산의 궁방전에 대한 개혁안은 현실의 적용 여부를 떠나 조선후기 재정사・경제사 속에서 독자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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