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歲寒圖를 보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당황한다. 무슨 그림이 이렇게 생겼냐는 표정이다. 이게 과연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인가? 썰렁한 화면에 붓을 쓱쓱 문질러 대충 그린 것 같은 나무 몇 그루와 이상하게 생긴 집만 덩그렇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량한 느낌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단어도 없다. 도대체 이 황량하고 썰렁한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이것은 오랫동안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연구한 박철상씨의 말이다. 그가 지은 [세한도]라는 책자의 ‘네 번째 마당, <세한도> 그 황량함의 정체’ 편을 많은 사람들이 가졌을 세한도에 대한 첫 느낌, 첫 인상을 이와 같이 묘사하며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음 ‘다섯 번째 마당, <세한도> 감상하기’ 편에서는 감상의 실마리를 이렇게 제공한다.
“세한도의 구조는 참 간단하다. 창문 하나만 나 있는 허름한 집 한 채, 나무 네 그루, 세한도라는 그림 제목과 이상적에게 준다는 내용의 글씨 몇 자, 그리고 인장 몇 방, 이것이 전부다. 배경도 없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간단하다. 묘사력이 뛰어난 그림도 아니고 화려한 채색이 돼있는 것도 아니다. 나무를 감상하라는 것인지 집을 구경하라는 것인지, 난감하다. 하지만 장경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보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데 있지 않던가?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읽어내야 한다.”
얼마 전 태사부님의 체백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똥딴소의 짓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었다. 담력이 큰 것인지 백치인지, 그들은 체백사진의 마지막 모습을 놓고 이미 선화하신 태사부님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분명 망자에 대한 명예훼손이었다. 나아가 이 단체에 대한 반란의 선전포고였다. 그러나 여우는 특별한 종소리를 내지 않았다. 짬, 그들과 한통속이기 때문일까! 또다시 털보 전하의 안위가 심히 걱정된다.
난 이 기막힌 사건을 바라보며 완당의 세한도가 떠올랐다. 세한도를 처음 본 사람들이 대개 ‘무슨 그림이 이렇게 생겼냐’며 당황해 하듯이 태사부님의 체백사진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왜 이런 표정이야’하며 당황 할 것이 눈앞에 어른 했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안목으로 첫눈에 명화를 구분 못하듯 일반 사람들의 심법으로는 성인의 마지막 표정을 대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한도 전문가 박철상씨가 완당의 세한도 감상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읽어내는 데 있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란 무엇인가?
남조 송나라 때, 진여의의 시다.
含章檐下春風面 함장첨하춘풍면
造化功成秋兎毫 조화공성추토호
意足不求顔色似 의족불구안색사
前身相馬九方臯 전신상마구방고
함장전 처마 밑에 봄바람이 살랑 불 때
조물주가 만든 매화 붓끝에서 살아난다.
정신표현 완벽하니 모습 같을 필요 있나
전생엔 말을 보던 구방고였나 보네.
함장전 처마 밑에 매화가 피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때다. 화가는 그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그런데 이 그림은 매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진여의는 추운 겨울을 용케 견디고 이른 봄에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며 그림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매화의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모습이 같고 다른 게 뭐 그리 중요하냐는 것이었다.(박철상의 세한도에서)
세한도의 그림이 이상하다고 한 것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으로만 점수를 매긴다면 그렇게 잘 그려진 그림은 아닐 것이다.
추사의 삶은 화려했지만 55세에 제주로 귀양을 가면서부터는 그러하질 못했다. 그러나 권력만 따르는 세상 속에서 이상적만은 예나 지금이나 추사에게는 변함이 없었다. 추사가 58세 되던 해 이상적은 중국에서 귀한 책을 사 제주에 귀양 가 있는 추사에게 공수를 한다. 단번에 오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말이다. 여기에 대한 보답으로 추사는 쓸쓸한 처지의 자신의 모습과 변함없는 마음을 보여준 이상적의 정신을 세한도에 그려 넣은 것이다. 이 때 추사의 나이 59세였다. 이상적은 이 그림을 받아들고 눈물짓는다. 사람들은 결국 여기에 흐르는 의리를 이해하고 열광하는 것이다.
태사부님의 마지막 표정을 놓고 왈가왈부 하는 것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성인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으로 말하면 사실적인 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태사부님의 선화하심이 혁명기운을 몰고 와 묵은 기운을 일소하고 새로운 기틀을 열어놓았으면 되었지 마지막 표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진여의의 말처럼 추운 겨울을 용케 견디고 이른 봄에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으면 되었지 모양이 같고 다른 게 뭐 그리 중요한 것이겠는가!
지금 이 어둠은 다만 발전적 혼란기일 뿐이다. 곧 휘영청 밝은 달이 뜰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는 태사부님 마지막 모습 속에서 이러한 희망을 보아야 한다.
태사부님은 역경만첩의 삶을 살다 가셨다. 20년 휴게기 그것은 귀양살이였다. 추사의 제주도 위리안치 귀양살이보다 더 곤혹스러웠다. 태사부님은 이상호 이정립이 보낸 암살 대와도 싸워야 했다. 이상호 이정립이 죽고 난 후에는 그들의 뒤를 이은 홍성렬이의 태사부님에 대한 역사왜곡에 치를 떨어야 했다. 이제 선화하신 후에는 홍의 뒤를 잇는다는 짬똥들이 이상호와 똑 같은 정신으로 태사부님을 헐뜯고 있는 것이다.
태사부님 선화의 마지막 모습이, 이상호 이정립으로부터 시작해 홍성렬을 거쳐 짬똥으로 이어지는 개만도 못한 불의한 정신을 뿌리째 도려낼 수 있는 도화선을 제공했으니 진실로 성인의 마지막 모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태사부님은 마지막 한순간까지 상제님 대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다. 이를 아는 자는 태사부님 마지막 모습 앞에 일어나 합장 부복해야 하리라.
구라야 너 이제 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