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정약용이 생각한 방납(防納)과 피역(避役)의 문제~2
다산이 인식한 궁방전의 마지막 문제점은 궁방전의 설치 후 해당 토지에 대한 면역의 혜택이었다. 조선 후기 부역에 대한 민간의 고충은 막심하였고, 이 때문에 면역은 커다란 혜택 이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면역은 국가재정의 손실이기도 하였다. 실제 궁방전의 면역 혜택은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면세의 특권을 규정한 속대전(續大典) 이후의 법전에도 궁방전에 속한 민인・노비의 면역 특권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궁방전에 속한 구성원에 대한 면역의 특권은 사적 토지소유상에서 왕실의 신분계급적 지위를 보장하는 방책으로 국왕의 권력에 기대어 발생하는 조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조선후기 각종 부역이 결납(結納)화 되면서 토지의 면세에 따라 면역조치도 자연스럽게 인정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면역의 특권은 이를 적용받기 위하여 궁방에 소유지를 투속하는 등의 사례가 발생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궁방전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면역은 불평 등한 조치였으며, 이에 따라 나타난 당시의 폐해는 다산의 목민심서에 서술되어 있다.
궁방토와 둔전이 원전을 잠식하여 나라의 수입이 날로 줄어들 뿐만 아니라, 백 가지 부와 역이 모 두 전결에서 나오는데 한 번 궁둔에 들어가면 [부와 역이] 면제됨이 없지 않으니 1만결의 읍에 부 와 역에 응하는 자들이 3천에 불과하다. 백성의 역이 치우쳐 고통스러워 유망하는 이들이 계속되니, 이는 일개 현의 수령이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정은 어쩔 수 없다.”라고 한 것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각종 부세가 田稅化 되었고 부역 역시도 결납화가 심화되었다. 그리 고 부역은 전세와 마찬가지로 총액화 되어 부역민이 부족하더라도 할당된 수취량을 채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위 기사를 보면 기준이 되는 부역민의 30%에 불과한 인원이 부역을 적용받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역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하여 3/10의 인원이 편중되어 부역을 받음으로써 부담이 가중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다산은 면역의 문제를 지방정부의 권한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고, 부세의 기준이 되는 토지의 개혁이 불가피함 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다산이 궁방전의 면역 문제에 대한 개혁안을 중앙정부에 떠넘긴 것은 아니었다. 소극적으로나마 지방정부에서 면역 문제를 해결할 만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다음 기사는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또한 궁방전과 둔전의 백성은 대개 역에서 제외되어 그 고을의 요역과 부역에 응하지 않는가? 지방 수령은 마땅히 별도로 살피고 관대하게 하여 이치에 맞지 않게 백성을 침탈하는 자는 혹 불러서 타이르거나, 잡아서 죄를 주어서 횡포를 못하게 해야 한다. 궁방전과 둔전이 있는 마을은 혹 패망하여 지탱하지 못하거나, 충실하면서도 역이 없는데 [후자의 경우] 죄를 지어 도망한 무리의 소굴이다. 궁둔의 역을 제외하는 것은 비록 완문이 있다고 하여도 마땅히 한계와 절제가 없으면 안 된다. 대개 1결의 땅을 두 농가에서 지어도 납부하지 못함이 있지 않으니, 결수를 계산해서 이 정도의 농가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새롭게 붙인 호수를 조사하고 취하여 요역을 고르게 함이 좋을 것이다.
다산은 피역의 근본적인 해결은 전정에 있지만 이를 현실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지방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궁방전의 경우 면역의 대상지라 하여 간과하지 말며, 오히려 행정력의 사각지대에 놓인 궁방전의 민인들을 특별히 보살필 것을 주문한 것이다. 궁방전 소속의 민인들이 공적인 행정력에 벗어나 있다면 이들을 침탈하는 세력이 반드시 존재할 것 이고, 이를 해결해주는 것 역시 지방관의 역할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궁방의 면세전 1결 당 2戶씩을 배정하여 그 외에 과도하게 궁방전에 편입된 민인들은 부역을 부과하여 ‘균역均役’ 정책을 시행해야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다산의 궁방전의 개혁논의는 궁방전 내에 존재하는 각종 현안들을 다루고 있으며, 문제에 대한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이 제시한 개혁안이 실제 정책 입안에 얼마나 작용하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궁방전에 대한 개혁안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다산의 개혁안은 18세기 말~19세기 초 궁방전 운영의 실체를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 의미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전 시기와는 다른 개혁안이 나타난다는 점도 특징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궁방전에 대한 개혁안의 성격은 18 세기와 19세기를 잇는 시기의 궁방전, 더 나아가 왕실재정의 특징을 설명하는 방법이 될 것 이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 밀알가입은 hmwiwon@gmail.com (개인신상은 철저히 보호됩니다)
※ 군자금계좌 : 국민은행 474901-04-153920 성사재인(김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