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
“주님! 주님!” 하며 예수를 쫓았던 유대인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예수에게 이적을 기대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맨발로 물 위를 걷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 그런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이를 통해서만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으려 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에게 이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있다고 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에게 이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예수의 메시지, 복음이 1순위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1순위는 이적이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성화가 오죽했을까. 성서에는 그들을 향한 예수의 직설적인 꾸지람이 기록돼 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복음 7장 21절)
깜짝 놀랄 일이다. 지금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도식적으로 믿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라고 선언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도 하나같이 “주여! 주여!” 하며 예수를 따른다. 그렇게 따르기만 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다. 이미 자신의 이름이 박힌 천국행 티켓이 예약돼 있다고 믿는다.
예수가 제시한 천국의 문은 달랐다. 하늘나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정작 예수는 손을 내저었다. “주여!” “아멘!” “할렐루야!”를 소리 높여 외친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가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2000년 전 예수에게서 그 말을 직접 들은 유대인들은 표정이 어땠을까. 그들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절대 공식을 부정하는 예수에게서 낭패감을 맛보지 않았을까.
우리는 쉽게 말한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되묻는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의 의미가 뭔가. 네가 생각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되묻는다. 우물쭈물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는 이렇게 답을 건넨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불교에도 그런 문이 있다.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름은 ‘불이문(不二門)’이다. 그 문을 통과하려면 조건이 있다. 깨달음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둘이 아니어야 한다. 차안(此岸, 속세의 땅)과 피안(彼岸, 깨달음의 땅), 그 둘의 속성이 통해야 한다. 그래야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 그래서 ‘불이(不二)’의 문이다.
예수 당시에도 많은 유대인이 "주여, 주여"하면서 도식적인 신앙의 행태를 보였다. 예수는 이런 이들을 강하게 꾸짖었다.
예수 당시에도 많은 유대인이 "주여, 주여"하면서 도식적인 신앙의 행태를 보였다. 예수는 이런 이들을 강하게 꾸짖었다.
사람들은 투덜댄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는 예수의 말 때문이다. 그 말이 천국의 문턱을 한껏 높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대폭 줄었다고 불평한다. “그렇게 높은 기준치를 들이대면 누가 그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하고 따진다.
그건 잘못된 이해다. 예수는 엉뚱한 곳을 향해 엉뚱한 방식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길을 일러줬을 뿐이다. 그쪽으로 가면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라고, 그리로 가면 서울이 아니라 광주라고, 그런 식으로는 서울에 갈 수 없다고 말이다.
예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울로 가는 이정표까지 일러주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비로소 천국에 간다”라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의 지적은 천국의 문턱을 높인 게 아니라 오히려 문턱을 낮춘 셈이다. 부산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서울로 불러, 어떻게 해야 서울로 입성할 수 있는지 계단까지 놓아주었다. 예수가 제시한 일종의 나침반이다.
‘예수의 나침반’을 행동 강령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성서 속 예수의 메시지는 맹목적인 행동 강령이 아니다. 무작정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만 치중하다가 자칫하면 율법주의자가 되고 만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그랬다. 그들도 구약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문자적으로 행하다가 형식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율법이야말로 천국의 열쇠라고 믿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며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율법이야말로 천국의 열쇠라고 믿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며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그럼 예수는 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라고 했을까. 거기에는 이치가 녹아 있다. 불이문을 통과하는 방법과도 통한다. 우리는 땅에 있고, 아버지는 하늘에 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다. 하늘의 속성과 아버지의 속성은 통한다. 하늘이 곧 아버지이므로. 그래서 ‘아버지의 뜻’에는 하늘의 속성이 담겨 있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실행하면 어찌 될까. 땅에 선 우리가 하늘의 뜻을 실행하면 어찌 될까. 그렇다. 속성이 바뀌기 시작한다. 땅의 속성이 하늘의 속성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우리의 속성이 아버지의 속성을 닮아간다. 이를 통해 간격이 좁아진다. 아버지와 나, 그 사이의 간격이 좁아진다. ‘나의 속성’이 ‘아버지의 속성’과 갈수록 닮아간다. 그렇게 나와 아버지가 서로 통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