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에게 아내가 있었을까.불쾌한 질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물음이다. 그래서 ‘금지된 질문’으로 통한다. 그래도 물음을 던져본다. 인간은 물음을 통해서 답을 찾아가니까. 예수에게 아내가 있었을까. 핵폭탄급 뇌관이다. 만약 이런 게 터진다면 엄청난 폭풍이 몰아칠 터이다. 그리스도교를 떠받치는 기둥이 무너질 거라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금지된 질문…예수에게 아내가 있었을까
신의 아들이 인간과 결혼하고 또 자식까지 두었다면 말이다. 기존의 신학 체계가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물음은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 속에도 있었다. 비단 최근에 등장한 물음이 아니다. 심지어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예수의 출생에 대한 격한 논쟁도 있었다.
2세기 인물인 희랍철학자 켈수스는 반기독교 저서 『참된 가르침』(178년경)을 썼다. 켈수스는 그 책에서 “예수는 로마 군인 판테라와 마리아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예수는 어느 유대인 마을에서 가난한 시골 여자로부터 태어났다. 목수인 남편은 그 여자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한동안 떠돌다가 불명예스럽게 아이를 낳았다. 사생아였다. 그리고 이집트로 건너갔다. 가난했기 때문에 거기서 하인 생활을 했다.”
3세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자 오리겐은 켈수스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오리겐은 자신의 저서 『켈수스에 반하여』를 통해 그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켈수스의 책 『참된 가르침』은 역사 속에서 소실됐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오리겐의 저서 『켈수스에 반하여』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2세기에 켈수스의 『참된 가르침』이란 책이 있었고, 내용이 이러이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이처럼 예수의 출생을 둘러싼 거센 공방이 있었다.
그럼 과거에만 이러한 논란이 있었을까.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생겨난 지 2000년이 흘렀지만,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2006년에는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예수의 아내’가 도마 위에 올랐다. 예수에게 아내도 있었고 자식도 있다는 설정이었다. 이 소설이 영화로도 제작되자 당시 기독교계는 개봉을 반대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2012년 9월에도 논란의 뇌관이 등장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신학대학원 캐런 킹 교수가 파피루스 조각 하나를 공개했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파피루스에는 콥트어가 적혀 있었다. 고대 이집트 언어 계열인 콥트어는 3세기경부터 그리스도교도에 의해 널리 쓰였다. 16세기까지도 이집트 콥트 교회 신자들은 콥트어를 일상어로 사용했다. 콥트어는 이집트의 고대 상형문자를 푸는 데도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다가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콥트어는 아랍어에 밀려 거의 사어(死語)가 됐다.
그 파피루스에는 앞면에 8줄, 뒷면에 6줄로 콥트어가 기록되어 있었다. 뒷면의 글자는 너덜너덜해져서 해독이 불가능했지만, 앞면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문제가 된 대목은 두 곳이다.
“예수가 그들에게…… 나의 아내……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는 그럴 만하다.”
단어들 사이의 ‘…’ 부분은 글자가 지워져 해독할 수 없다. 그래도 ‘예수’가 등장하고, ‘마리아’라는 여성이 등장하고, 예수가 말한 것으로 보이는 ‘나의 아내’가 등장한다. 또 “그녀는 내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는 그럴 만하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 파피루스 문서로 인해 큰 파문이 일었다. 전 세계 언론이 달려들어 일명 ‘예수의 아내 복음서’를 일제히 보도했다.
예수에게는 열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12사도다. 모두 남자다. 그렇다고 남자들만 예수를 따랐던 건 아니었다. 여자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막달라 출신 여성도 한 명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렀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던 것처럼 말이다. 한국으로 치면 시집온 젊은 아낙에게 이웃들이 고향 명을 붙여서 “수원댁” “전주댁”하고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마리아가 등장한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그만큼 흔한 이름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마리아가 둘 있다. 한 명은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이고, 또 한 명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다. 성서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출신과 배경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교는 오랜 세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붉은 딱지’를 붙였다. ‘음란한 여인’의 이미지를 덧씌웠고, 심지어 ‘창녀’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렇지만 성경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고 묘사된 대목은 없다.
그럼 왜 그랬을까. 왜 막달라 마리아를 격하시켰을까. 지난 2000년은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랬다. 그리스도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때로는 교회가 더 했다. 성경 창세기에서 “절대 따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아담에게 처음 권했던 인물이 하와(이브)다. 여성이다. 뱀의 꼬임에 넘어가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자초한 이가 여성이다. 이 때문인지 중세 교회에서는 여성을 유혹과 죄, 악마와 타락의 이미지와 연결하는 시각이 강했다. 중세 때 숱하게 거행된 마녀재판 역시 그 연장선이었다. 그러니 중세 그리스도교는 예수 주위에 등장하는 젊은 여성을 좋게 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591년에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고 강론했다.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교에서 창녀의 이미지로 통했다. 그러다가 1988년에 와서야 잘못된 이미지가 바로 잡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막달라 마리아를 중요한 사도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인정했다. '사도 중의 사도'가 된 셈이다.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막달라 마리아의 의무기념일을 축일로 격상시키는 교령을 발표했다.
왜 ‘사도 중의 사도’가 됐을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따르던 여성 중 첫째로 꼽을만한 여성 제자였다.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도 막달라 마리아는 그 자리에 있었다. 12사도 중 대부분이 체포될까 봐 두려워서 도망갔고, 베드로는 예수가 심문받는 현장까지 따라갔으나 되돌아왔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는 그를 모르오”라고 자신이 예수의 무리임을 부인하면서 말이다. 12사도 중에서는 유일하게 젊은 요한만이 십자가 처형장에 있었다. 다른 제자들은 겁이 나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자리를 막달라 마리아가 지켰다.
숨을 거둔 예수의 시신이 동굴 무덤에 묻힐 때도, 그 동굴에서 예수가 부활할 때도 막달라 마리아가 목격했다. 열두 제자 중 아무도 보지 못한 예수의 동굴 부활을 그녀가 가장 먼저 목격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에서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어야 했다.
예수 당시 유대 사회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였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했다. 또 결혼한 후에는 남편의 뜻을 좇아야 했다. 미혼 여성은 혼자서 밖으로 다닐 수도 없었다. 가족이나 친척 등 신변을 보호하는 이가 있어야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미혼 여성이 임신이라도 하면 가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명예 회복’을 위해 가족이 돌로 때려죽이는 시대였으니 말이다.
유대교 회당에서도 그랬다. 예수 당시 랍비는 회당에서 ‘모세 5경’을 읽어주었다. 여성들은 랍비가 되는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남자와 여자는 좌석이 분리돼 있었고,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였다. 지금도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는 남성과 여성의 기도 공간이 분리돼 있다. 그러니 2000년 전에는 오죽했을까.
그런데도 미혼인 막달라 마리아는 자유롭게 예수의 행적을 좇은 것으로 보인다. 파피루스 조각에는 “그녀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는 그럴 만하다”라고 적혀 있다. 사도들이 먼저 이렇게 물었을 터이다. “마리아는 여자입니다. 여자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까? 여자도 사도가 될 수 있습니까? 사도가 돼서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물었을 터이다. 파피루스의 글은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보인다. 예수는 “된다”라고 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마리아는 상당히 흔한 이름이었다. 신약성서에도 여러 명의 마리아가 등장한다. 예수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당시 예수는 우리나라에서 철수만큼이나 흔한 이름이었다고 한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역사서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여러 명 등장한다.
캐런 킹 교수가 제시한 파피루스 문구를 반박하는 신학자들도 많다. 그들은 “당시 ‘예수’는 흔한 이름이었다. 파피루스에 등장하는 예수가 우리가 생각하는 신약성서 속의 예수라는 결정적 증거는 없다. 유대교의 어느 랍비의 이름일 수도 있고, 그의 아내 이름이 마리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 지적한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출간하는 성서학 권위지 『신약학(New Testament Studies)』은 “파피루스에 사용된 잉크는 고대 잉크 성분을 함유한 위조품이다”라고 주장하는 여섯 편의 논문과 사설을 실으며 캐런 킹 교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한쪽에서는 “위조로 결론 났다”고 말하고, 반대쪽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맞서고 있다.
역사 속의 막달라 마리아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나는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이었던 막달라 마을을 찾아서 떠났다. 궁금했다.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었다는 막달라 마을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그곳에 어떤 흔적이나 단서라도 남아 있을까.
백성호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