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英組)․정조(正組)시대의 실학
영․정조시기는 조선초기부터 모든 사회와 문화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던 전통적 유학(儒學)인 성리학(性理學)의 이념적 체계를 가지고는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음을 절감한 때였다.
17세기 후반인 1682년에 미수가 세상을 떠나고 미수보다 훨씬 뒤에 태어난 반계는 1673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17세기에 실학사상의 뿌리와 기반을 다져 놓긴 했지만, 성호․순암․녹암․담헌․연암․다산 등이 활동하던 18세기에 들어와서야 그 학문이 제대로 활착하여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 변혁의 물결이 밀려든 18세기는 새로운 이념과 논리개발의 주문이 증대하였고 이러한 시대적 환경과 조건은 실학적 사고의 다양한 탐색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문예부흥기'라고 부를 정도로 학문적 분위기가 활기에 차고 충만했던 것이 이 시기의 특성이었다.
이때 성호(안산)․순암(광주)․녹암(여주)등 일군의 새로운 시대적 감각을 지닌 학인 들이 우연찮게도 경기지역에 집중화되어 근기학파(近畿學派)를 형성하여 활동하였고 뒤이어 다산(지금의 남양주시)이 태어나 조선실학을 집대성, 19세기로 실학의 전통을 연결시켜주게 된다.
경기도의 자랑인 수원시에 있는 오늘의 화성(華城)은 당시 실학적 사고들이 총동원되어 이루어진 구체적인 성과물이라 알려져 온다. 정조의 아버지로서 비참한 생을 마감했던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수원 인근의 융릉(隆陵)에 모셔진 관계로 정조 등극 이후 화성이 축조되고 당시의 예술․공학․건축학․조경학의 모든 역량이 축성에 투입되었다 하니, 오늘 경기도의 도청소재지인 화성은 한시대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물임에 분명하다.
여기에는 정조라는 뛰어난 군주와 다산일파를 포함한 실학자들의 학문과 공력이 녹아들어 그만한 대역사(大役事)가 이룩될 수 있었다고 보여지기에 화성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왕실에 보존되어 현재까지 전해지는 제반 의궤(儀軌)나 도서 및 사실도(寫實圖)등은 전통문화의 살아있는 보물들이어서 더욱 큰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되던 실학의 열기가 찬란하게 계승 발전되다가 정조의 죽음으로 마감되듯 일대 파란이 야기된다. 1801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로 시작된 신유사화(辛酉邪禍)의 사건이 그것이다. 이 화란은 새로운 이념과 생각으로 진전된 사회건설을 열망하던 학자군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꼈던 기득권 세력들의 조직적이고 집요한 반격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실학자들이 유가(儒家)적 전통과 상충되는 이교(異敎), 즉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빌미는 한갖 구실에 불과했고, 그 본질은 사회 변혁세력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이었다. 이때 성호학의 좌파에 속했던 녹암 일파가 큰 타격을 받아 녹암은 극형을 당하고 그와 가깝던 수많은 인사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다산 형제(정약전, 정약용)도 먼먼 해변가로 귀양을 떠나야만 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18년의 귀양살이가 다산의 실학사상을 더욱 무르익게 하여 고난에서 환희의 길이 열리 듯, 장구한 세월의 결과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集大成)했다는 찬사를 받게 되었다. 다산은 유배에서 57세에 풀려난 뒤 다시 18년 동안 고향에 칩거, 7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학문적 연찬을 거듭하고 온갖 저서들을 제대로 마무리하여 위대한 다산학(茶山學)을 결국(結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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